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

글: 이신 목사(1980년)


1.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발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 교회의 시작이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한국 학자들이 진리 탐구의 학구열에 의해서 그 관계의 서적을 읽는 중 발견하여 자발적으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실행하다가 그것을 알고 훗날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는데, 이 과정을 한국 교회사를 읽은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의 출발은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고 한국 선각자들의 진리 탐구열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의 출발도 처음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 초기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을 전개한 주도적 인물 세 사람을 들 수 있는데, 동석기(董錫祺) 목사, 강문석 목사, 성낙소(成樂紹)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동석기 목사(1881-1972)는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1904년에 하와이로 이민길에 올랐는데 그후 미국 일리노이 주의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 가서 공부하였고, 또 게레트 신학교(Garrett Biblical Institute)에 가서 수학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귀국하였다. 이때가 1913년이었는데, 그후 14년간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27년에 다시 도미하여 순회하던 중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고 또 신시내티 성서 신학교(Cincinnati Bible Seminary)에 가서 연구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관한 교리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대오각성하고 귀국하여 자기 고향 북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여럿 개척하였다(초리 함전교회, 덕성 서흥리 교회, 수동리 교회, 수서리 교회, 하거서면 임장동 교회, 맹경시 교회, 증산리 교회 등). 또 그는 광복 후 서울에 환원운동의 기지 교회의 설립을 절감하고 내수동(內需洞)에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오늘날의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 밖에도 외국의 환원운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선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6.25사변 당시 수난의 교회를 돕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90세의 고령에 이르러 타계하였다.

강명석 목사(1897-1944)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훗일에 도일하여 관서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귀국 후 향리인 밀양에서 감리교 목사로서 목회하던 중 감리교의 감독을 지낸 양주삼 박사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테네시 주 내시빌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Vanderbilt University, Department of Religion)에서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접촉하게 되었고, 우리의 신앙은 다양한 교파의 교회나 신조에 따르기보다는 성서로 돌아가서 초대 교회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일 년을 더 머무르면서 프리드 하드만 대학(Freed-Hardman College)에서 '환원운동'에 관해서 예의 연구하였다.

그는 1936년 귀국하여 울산 등지에서 그리스도 교회를 개척하였고 경주, 진양 등지에까지 나가서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그는 인천에 이르러 송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광복 일 년을 앞두고 아직 한참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그의 나이 47세였다.

성낙소 목사는 젊은 시절에 동학당(東學黨)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일본의 침략으로 조국의 주권이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는 쓰라림을 경험했다. 그는 심중에 생각하기를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군관계의 훈련이 거국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던 차, 미국인들이 주동이 된 구세군(救世軍)의 활동을 보고 어떤 군사 수련의 기회로 생각하고 구세군에 입대하여 사관학교에서 수업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깨닫게 되었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전도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백인 사관들의 인종 차별 대우에 항거하다가 드디어 구세군 활동에 의아심을 갖게 되어 구세군을 탈퇴하고 향리인 부여에 돌아와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그때 생각에 여러 가지 교파로 나뉘어 분열된 교회보다는 단순히 교회명을 '기독교회'(基督敎會)라고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으며, 또 신앙도 성서적인 교훈을 고수하는 순수한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그런 방면으로 목회를 하였다. 그러던 중 자기와 같은 신앙 경향의 선교 활동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그는 도일을 결심하였다. 이것이 1930년 5월의 일이었다. 그는 동경에 건너가서 당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파송한 커닝햄(Cunningham) 선교회와 접촉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의 교리를 습득하는 한편 한국인 거류민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교리를 공부하고 난 후 하루속히 조국에 돌아가서 성서에서 발견되는 초대 교회의 원형을 따라 신약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것을 절감하고 1931년 귀국하여 서울의 계정(桂町), 공덕정(孔德町), 청파적(靑坡町), 내수정(內需町)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 이르러 성낙소 목사는 그의 주선으로 일본 커닝햄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존 체이스(John Chase) 선교사를 입국케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 강습회'(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전신)를 개최케 함으로써 교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성낙소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에서 교수하였으며, 필운동(弼雲洞) 교회에 계속 머무르면서 목회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타교단을 향하여 "基督의 敎會 合同 宣言文"이라는 것을 작성하여 교회의 일치와 신약성서적 근거에 의한 초대 교회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다가 그는 1964년에 타계하였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교역자는 최상현(崔相鉉) 목사다. 그는 존 체이스 선교사의 내한으로 그의 통역과 신학교의 교수로서 활약한 분인데, 그는 일찍이 연전(延專)을 졸업하고 3.1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일시 머물다가 귀국후 감리교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감리교회에서 일하던 중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접하고 6.25전란시 납북될 때까지 돈암동(敦岩洞)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앞서 존 체이스 선교사의 내한을 말하였거니와 1939년에 내한한 존 힐(John J. Hill) 선교사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자못 한국인과 잘 동화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를 잘 습득하여 곧잘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임자를 도와 활약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기독교 탄압은 가중되어 1940년에 이르러 두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날로 심해 가는 가운데 교회들은 일대 수난기를 당했다. 특히 일제의 신도(神道)를 한국민에게 강요하는 바람에 한국교회는 여기에 항거하여 순교를 당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묵종하여 신앙의 지조를 신도의 천조대신(天照大神) 앞에 버리느냐 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국에 있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순교의 피를 흘리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대교단의 지도자들 중에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자들도 생겼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체 교회의 독립이라는 것 때문에 집단적으로 일제의 강요에 끌려가는 일은 면할 수가 있었다. 몇몇 교회가 문을 닫는 비운도 있었지만 잔존하는 교회들은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일제 말기의 조선총독부의 기록을 보면, 경기도에 2개처, 경북에 1개처, 경남에 3개처, 함남에 7개처 교회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 전도자의 수는 5명으로 되어 있으며, 신도의 수는 1937년에는 236명으로 된 것이 1941년에는 겨우 140명으로 줄어 든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그 당시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던가 하는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그루터기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 역사하게 하신다.

2. 광복 후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민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해방'을 맞이했다. 전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탄압 받고 피 흘린 한국 교회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런 날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것을 연합군이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연합군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특별한 섭리라고 믿고 기뻐하였다. 각처에서 억압받던 성도들이 옥문을 깨치고 또는 동굴과 은신처를 박차고 나오면서 교회는 크게 신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의 선교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개체교회의 독립 체제(Local Autonomy) 때문에 집단적인 신도(神道)의 강요를 면할 수 있었고 그래서 교회의 기본적인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일 년이 지난 1946년 8월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시기야말로 교회의 순결과 일치를 주창할 절호의 기회로 알고 "기독의 교회 합동 선언문"을 발표하고 환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기독의 교회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돌아와서 각각 분열된 기독교에게 신약시대의 기독의 교회로 같이 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聖旨)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신자는 말씀에 비추어 각각 교파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단체의 헌법규칙을 존중시하고 분열됨으로 다투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구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 . . 다시 조선 교회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 각 교파가 악마 왜정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 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마귀에게 굴복하여 신사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성경 말씀인 주님의 성지를 반역하는 일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시대의 교회를 찾으려면 신약성경에서 찾자"고 선언하면서 전 한국 교회에 교회의 일치와 신약성서가 제시한 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창시자와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마 16:18; 엡 5:23) 모든 종파적인 기원과 인간적인 교권적 권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파의 분열의 통일을 기(期)하는 데 지름길은 교단의 인위적인 명칭을 지양하는 것인데, 그것도 신약적 근거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롬 16:16)라는 초대 교회의 명칭으로 전교회를 부르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聖禮典)의 성서적인 원형을 회복하기를 호소하면서 세례는 초대교회가 실행하던 대로 침수 세례(浸水洗禮, baptisma)를 주장하였고(마 3:16; 롬 6:3-11; 행 8:36-39), 성만찬은 초대 교회가 실행하던 대로 거행할 것을 호소하였다(행 20:7).

해방 직후의 한국 교회는 일시적으로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 난데 대한 감격도 가시기 전에 일제의 신도(神道)의 강요를 물리치고 박해를 감수했던 기독교인들과 박해에 못 이겨 신도(神道)에 굴종했던 지도자 신자들 둘로 나눠지기 시작하여 각 교단마다 상당한 물의를 빚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교단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의 호소는 뜻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도의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부한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순수하고 진실한 태도로 신앙하려는 사람들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1947년 일제에 의해서 축출되었던 선교사 존 체이스가 재입국하였고, 1949년 3월 5일에는 존 힐 선교사가 재입국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는 다시 문을 열게 되었는데, 처음 1947년에는 필운동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에는 송월동(松月洞)에서 계속되었다. 그 동안 앞서 말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호응한 사람들이 이 신학교에 들어와 공부하였다. 당대의 교수로는 존 체이스, 존 힐 선교사, 성낙소(成樂紹), 최상현(崔相鉉), 신현창(申鉉昌), 서병렬(徐丙烈), 목사들이었으며, 학생들 가운데 후일에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김은석(金銀石), 구광서(具光書), 이흥식(李興植), 정희건(鄭熙建), 함창현(咸唱泫), 김광수(金光洙), 한현태, 이종만(李鐘萬), 김동환, 김재건, 김봉섭, 조국형(趙國衡), 최병권(崔炳權), 성수경(成守慶), 강병천(姜病天) 등이었다. 해방 후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들 신학생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나가서 전도하여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때에 서울에서 만도 10여 곳의 새로운 집회처가 생기고 지방에서도 충남북에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선교 활동은 잠시였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군이 남침함으로써 중단되고 남한 일대는 전쟁의 참화 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3. 6.25사변 후의 환원운동의 전개

공산군의 남침으로 남한 일대는 전쟁의 참화 속에 싸였으나 유엔군의 협공작전에 의하여 공산군은 물러가고 그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일단 평온을 회복하였다. 전쟁 중에 수많은 전쟁고아와 과부와 이재민이 생겨났고 민가와 공공시설이 파괴되는 등 그 참상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특히 전란 중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순교를 당하였고, 많은 교회당이 파괴되었다. 이런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교회는 시기를 만난 듯 고아와 과부 이재민의 구호에 힘썼고 상처입고 멍든 영혼들을 위로하며 신앙의 힘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戰禍)의 잿더미 속에서도 찬송가 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복음 전도의 외침소리는 방방곡곡에 전파되었다. 그러므로 전전(戰前) 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건립되었고 더 절실한 심령의 요구로 신앙의 열기는 뜨거워져서 한국 교회의 신자의 수는 급증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서울에서보다 지방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는 전란을 피했던 존 힐 선교사가 1954년 재입국함으로써 구호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4후퇴 이후에 전국이 평온해짐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의 양성기관인 신학교는 또다시 문을 열고 계속하였다. 이 무렵 경기도 부평에 보육원이 생겼고 인천에는 이종만(李鍾萬) 목사가 경영하는 인천 보육원이 생겼으며 대전과 대구에 각각 보육원이 생겨서 전쟁고아들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의 선교 활동이 주로 구호 사업과 신학 교육에 주력하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에 주력하는 운동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었는데,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 지방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이 김은석(金銀石) 목사였다. 그는 일찍이 기독교 신앙에 입교하면서 중국 등지에서 전도하였고 또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도일하여 탄광 등지에서 노동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요 영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을 학문적으로 탐구했다기보다는 기도하는 가운데 다독하면서 영감에 통하여 체득하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활동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경원(硏經院)이라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에서 수학하였지만 거기서 가르치는 환원운동의 교리적인 가르침이 그의 영적인 요구에 만족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도중에서 학업을 그만두고 지방에서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앞서 언급한 신학교 교수인 신현창(申鉉昌) 목사와 의견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그와 더불어 협력하여 충북 부강(芙江)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부강 장로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 교회의 대다수의 인원이 신약교회로 환원할 것을 원하므로 그들에게 침수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성경연구회'를 열어 뜻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그 원근의 교회에 전문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는데 때로는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성경 가르침은 성경의 영감에 육박하려는 것이어서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거기서는 단순히 성서의 지식보다도 참여하는 자들로 하여금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전도의 사명 의식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뜨거움을 체험한 무리들이 충청남북도 전라도지방에 나가서 전도함으로써 많은 지방 개척지가 생겼고, 다른 교단에서 교회 전체가 환원운동에 참여하는 일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존하는 교회 중에서 서울을 제외한 지방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부분이 이 운동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들이다.

이 운동은 그후에 광주를 중심해서 전개되었는데, 광주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성경연구회'를 열었고 거기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안수 받은 사람들은 김재순(金在順), 함창현(咸唱泫), 장주열(張周悅), 최요한(崔要漢), 이신(李信) 등의 목사들이다. 이것이 1951년 봄의 일이었다. 그후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로 옮겨가서 동일한 '성경연구회'를 열었고 1954년에는 목포에서 '성경연구회'를 열어서 전남 지방의 환원운동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후 이 지방의 '성경연구회'는 1955년에 존 힐 선교사가 재입국함으로써 1.4후퇴시 일본으로 철수하여 중단했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를 다시 개강하자 이에 합류하여 '서울 성서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신학교의 교장은 존 힐 선교사였고, 교수로는 조국형(趙國衡), 이신(李信), 김동렬(金東烈), 김동수(金東洙), 김태수(金台洙), 김은석(金銀石) 목사 등이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환원운동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 내한한 선교사들로는 폴 잉그람(Paul Engram), 미스 톰슨(Miss Thompson), 재인 킨네트(Jane Kinnet), 미스 반힐(Miss Banhill), 등의 제씨였다. 재인 킨네트 씨는 후일에 존 힐 선교사의 후처가 되었다. 그후 1955년에 이르러 존 힐 선교사는 귀국하였고 그 후임으로 헤럴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가 일본 선교에서 손을 떼고 내한하여 힐 선교사의 일을 계승하였다. 그는 오자마자 선교 본부와 신학교사를 서대문구 송월동에서 신사동으로 옮겼으며 또 {한길}(One Way)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였다.

한편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최초로 1954년 5월에 데일 리차드슨(Dale Richardson)이 내한하였는데, 이 사람이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내한한 선교사였다. 그 다음으로 10월에는 헤스케일 체시얼(L. Haskiel Cheshir) 선교사가 내한하였는데, 이들은 다 동석기 목사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리차드슨 씨는 이화 여자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강의하면서 타교파와 유대를 통하여 전도하였고, 체시얼 씨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6번지에 선교 본부를 정하고 교역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한국 기독 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의 포부는 장래 아시아 환원운동의 역군들을 기르자는 데 있었다. 이 교육기관은 그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가 되었고,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학 대학'의 전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체시얼 선교사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6.25사변 직후의 한국의 사정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그 근본적인 해결책은 생산적 식량대책이라고 생각하고 낙농 사업을 펼 생각으로 젖소 백여 마리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것으로 파주에 신학대학 목장을 만들고(Cow for Korea Program, Paju Country) 일반 농가에게 보급함으로써 영양가 높은 식량원의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는 강조하기를 일정량의 식량을 곤란할 때 원조한다 해도 그것을 소비한 다음에는 또다시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생산성 있는 젖소와 같은 식량원과 생산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항구적인 식량 대책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낙농 선교를 위해서 아랜 선교사를 초치(招致) 했다. 그후 그리스도 신학 대학의 학장이 된 하딩 박사(Dr. Harding)가 내한하여 체시얼 선교사와 더불어 신학대학의 설립에 공헌하였다. 빌 램지 선교사는 내한하여 '통신 교육원'을 설립하고 통신으로 환원운동을 전하는데 종사하였다.

한편 테일러 선교사는 자기의 동역자로 미국으로부터 패튼 선교사를 초치하고 문서 출판사업을 일임케 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1972년에 한국을 떠나면서 자기의 후계자로 패튼 씨를 지정하였다. 부산 지방에서는 1967년에 알렉스 빌(Alex Bill) 선교사가 내한하여 '기독교 방송 선교회'를 설립하고 2년 후에는 버트 엘리스(Bert Ellis), 조 세걸키(Joe Segarki) 선교사 등이 내한하여 방송 선교의 일을 도왔다. 또 그리스도교 선교 연구원과 구호소의 일을 하던 말콤 파스리와 {참빛}이라는 월간지를 낸 이철신 선교사 등이 있었다.

1958년에 존 힐 선교사는 또다시 내한하여 대전에 머물면서 '한국 성서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역자를 양성했으며, 이 학교 출신자들은 대전을 중심으로 한 지방 개척에 주력하였다. 이 사업은 힐 선교사가 1971년 귀국하면서 그 후계자인, 미국 존슨 성서대학에서 수학한 김찬영 목사에 의해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장성만 목사가 미국 신시내티 성서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64년 귀국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동서실업학교'를 경영하여 전도자 양성과 기술 교육을 시행하더니 지금은 발전하여 '경남 공업 전문대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에서는 1961년 미국 산호세 성서대학(San Jose Bible College)과 링컨 기독교 신학교(Lincoln Christian Seminary)를 마치고 귀국한 최윤권 목사가 한동안 '서울 성서 신학교'에서 테일러 선교사와 같이 일하더니 서울의 도원동 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의 교역자들과 같이 처음 서울 원효로에 집을 얻어(구 오산학교 자리) '대한 기독교 신학교'를 1965년에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또 {환원}이라는 신앙지를 발간하였다. 미국 링컨 기독교 신학교와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Vanderbilt University, Divinity School)에서 수학한 최순국 목사는 1966년에 일시 귀국하여 필운동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대한 기독교 신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다가 다시 도미하였다. 1970년에 미국 링컨 기독교 신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안재관 목사는 대한 기독교 신학교에서 교수하다가 다시 1973년 도미하였다. 이 무렵의 교회의 수는 100여 개에 불과하였다.

4.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한국적 자각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외국인의 선교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진리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열의와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려는 진실성이 그 선각자들로 하여금 성서적인 초대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접하게 했으며, 이들이 이러한 신앙을 이 땅에 심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외국의 선교사와 외국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접한 다음부터는 성서해석과 기독교 이해를 무비판적으로 묵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환원운동자들의 주장을 아무런 반성없이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도입하기에 힘썼다. 초기 한국 지도자들 가운데는 어느 선교사가 가르친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바른 성서적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교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오늘날 외국의 학자들 가운데는 초기의 미국 환원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초기 환원운동자들 가운데는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의 한 사람인 존 로크(John Locke)의 영향하에서 "말씀과 논의 이외에 신자들 속에 실제적으로 성령의 내적 임재를 불신하거나"(to disbelieve the Holy Spirit in Believers)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든지 인도하심이나 기도의 효능 등을 부정하는"(to deny special providence and guiding and the efficacy of prayer)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환원운동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성서적 근거에서 그 순수성과 단일성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고 교회의 초대 교회의 원형으로의 환원을 부르짖은 데는 공헌했으나, 역시 기독교 신앙의 영감적인 면이나 성령으로 인한 현재적인 역사 등에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미국적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그런 기독교 이해를 그대로 한국에 이식시키려는 초기의 한국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고 기도 생활에 주력하면서 성령의 영감적인 면을 추구하는 전도자들이 지방 교회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김은석, 신현창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성서연구회'에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한국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1974년 3월 25일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을 선포한 때부터 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네브라스카 기독교 대학(Nebraska Christian College)과 드레이크 대학교(Drake University) 그리고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Vanderbilt University, Divinity School)에서 수학하고 1971년에 귀국한 이신 박사가 1973년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회장이 되면서 뜻 있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규합해서(김태수, 김정만, 김철수, 김용웅, 김길홍 등)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의견을 모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 선언문에는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래 짧은 한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갖는 어떤 특이성의 양상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정말 이것이 한국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모습이 신학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적 자각 밑에서 복음이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외국 교회가 자기네들의 성서 해석과 신앙 양식을 한국 교회에 이식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한국 교회는 우리 나름의 자각으로 복음의 씨를 우리의 풍토에 심고 특이한 신앙 형태로 발전한 것 같지 않다. 다만 외국 교회의 흉내 아니면 무자각한 외국 교회의 전통과 성서 해석의 묵수 이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한민족의 역사가 정치적으로 외세에 의해서 억압과 침략을 당하는 동안 이 민족의 정신적 자세가 무자각한 사대주의에 기울어져 그 시정책이 국민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신앙마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극단의 반발로 무조건 외국의 것은 나쁘다고 하는 배타주의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지마는 우리는 과거에 한국 교회가 걸어온 무자각한 외국 것의 모방이나 묵수 등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발전 과정에 필요한 것들이었으나 상당히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에 와서도 한국 교회가 지속해야 할 태도로 우리는 보지 않는다"라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체교회의 독립성(local church autonomy)을 지나치게 고조한 나머지 전체적 조직체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타교회 또는 전체 한국 그리스도 교회간의 유기적인 관계나 질서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일에 지장이 있다고 보았으며, 또 이것은 초대교회가 "교리와 신앙상 문제가 생겼을 때 전체 교회의 신앙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공의회를 열고 이를 논의했던" 것이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교회의 유기적 통일성을 기하는 성서적 조직체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미국 환원운동자들이 성서의 자구적 해석을 고집한 나머지 메마른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는데, 그 한 예로 기사 이적이나 성령 세례는 사도시대에 국한되는 것이지 오늘날은 종식된 것으로 믿는다든지, 또 세례나 성만찬 예식을 행함으로써 그 예전 자체가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 인양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는 "초대 교회에로의 환원은 세례와 성만찬과 교회 이름 등의 외면적인 환원에만 주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내적인 역사가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이 선언문은 덧붙이기를 "그렇다고 우리는 어느 주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앙의 형식적인 면을 포기하고 그 내면적인 면만을 주장하자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 교파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위적인 명칭이나 성례전의 간편주의를 채택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보는 겸전(兼全)한 신앙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의 독자적인 해석 아래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질서 있는 교회로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유기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연합적인 조직체의 형성과 성례전의 재인식 그리고 신앙 내용의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을 절감하는 바이다. 그래서 명실공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그리고 성서적 신앙이 이 땅에 확립되기를 바란다"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에 선교사들과 외국의 교리적인 영향 때문에 그 주체적인 자리가 흔들리는 듯 하는 시기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것을 극복하고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각 있는 성서 이해로써 성서의 영감적인 말씀을 믿으며 오늘날도 초대 교회와 같이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교회 발전에 주동적인 힘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유기적인 관계와 신앙의 순결과 질서 있는 운영을 도모하는 전체 교회의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의 후신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인 것이다. 여기서 성직자의 임직과 선교 방책의 협의 및 재정적인 뒷받침 또는 교육 사업과 구호 사업 등 제반 교회의 필요한 문제들을 협의하며 집행하고 있다. 이런 전체 교회의 유기적인 활동에 의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오늘날은 전국적으로 교회 수가 2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대학이 둘이요(그리스도 신학 대학, 경남 공업 전문대학), 신학교가 셋이 있는데(대학 기독교 신학교, 서울 성서 신학교, 한국 성서 신학교) 이 기관에서 4천 여명의 학생들이 장차 한국의 '환원운동'을 위한 일꾼으로 양성되고 있다. 

참고도서

1. [기독교 연감] 1964년도.
2. [종교편람] 1979년도 문공부 간행.
3. [조선の종교급형축요람] 소화(昭和) 16년도 조선총독부 간행.
4.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1967년, 김세복 저(연대 연합신학대학원 논문).
5.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사] 1979년 안병호 저(베뢰안 대학원 논문).
6. [기독의 교회 선언문] 1946년, 경성 사직 공원 내 그리스도의 교회 간행.
7.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간행.
8. 'Christian Baptism'(Bethany V.A. 1851) by Alexander Campbell.
9. 'Christians Only : A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Standard Publishing Co., 1962) by James DeForst Murch.
10. 'Holy Spirit in the Thought and Life of Disciple of Christ'(an Article in Panel Scholars Vol. Ⅱ. 1959) by Stephen J. England.
11. 'A History of the Church of Korea'(Korean Literature Co., Seoul) by A. D. Clark.
12. 'The Church of Christ'(Funk & Wagnalls Co., 1907) by A. La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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