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석기 전도자와 그리스도의 교회
S. K. Dong and Korea Church of Christ 

이준행 목사


Ⅰ. 들어가는 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자 노력을 하였다. 이 말이 결코 바람직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회복해야 한다는 말은 이미 파괴가 되었거나, 변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신약의 표준에서 탈선될 때마다 새로운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교회는 신약교회적 면모를 새롭게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이런 개혁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517년을 계기로 일어난 북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이다.1) 당시에 교회는 부패했고2)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위클리프나 후스와 같은 개혁론자들의 영향이 있었다.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북부지방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던 때도 이 때 이다. 독일과 동부 유럽을 중심으로한 루터파, 쮜리히를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한 쯔빙글리파, 제네바를 중심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한 칼빈파, 그 외에도 영국 개혁파3), 예수회4)가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더욱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초대교회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재세례파5)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들6)과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반 삼위일체파들7)이었다. 이러한 혼탁과 분열가운데서 그래도 종교개혁의 주류는 도도히 흘러서 근세로 연결되어짐을 볼 수 있다.

개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공격을 받은 카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들을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더욱 폐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위에서 열거했던 내용으로서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든지 원래의 순수하였던 이념을 상실하고서 그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에 메이게 되면 내부적으로 썩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유대교의 전통과 제도에서 썩어버린 복음을 예수님께서 새롭게 개혁하셨듯이 언제나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서 제도 속에 살면서도 제도에 메이지 않고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종교가 참다운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미완의 개혁으로 끝나고 말았다. 성전을 짖는 것이 하나님을 성전 안에 매이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서도 역시 책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책 안에 매이지 않는다. 성서가 또한 매어서도 안 된다. 그 안에 담겨진 진리는 살아 역사 해야만 진정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인은 종교개혁을 감히 미완의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완의 개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성서로 하나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동석기 전도자의 삶과 그의 신앙회복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8)의 위치를 밝혀 보고자 한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개혁의 역사는 교리를 만드는 것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성서가 성서로서의 힘을 발휘하는데 방해받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Ⅱ.  환원운동을 위한 그의 성품

1.  모험심과 진취성

동석기는 1881년 4월 6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전통적 유교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총명하고 몸집이 켰던 그는 어려서부터 모험심과 진취성이 남달랐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북청에서 5백 리 길이나 되는 원산을 홀로 다녀와서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9)

열 일곱 살에 결혼을 하였어도, '더 넓은 세계'가 그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침내 열 아홉 살 때 그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 한양에 갔다. 그의 방랑벽은 노무자로서 하와이까지 가게 되었다.
하와이 노무자로 일하면서도 동석기는 남달랐다. 그는 성실하게 일하였다. 결국 그의 성실성을 높이 산 농장 주인은 동석기에게 소원을 묻게 되었고, 이 때 동석기는 '서양 학문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동석기는 서양학문을 배워 조국을 번영시키는 일에 일조했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농장 주인의 도움으로 동석기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서양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국민학교를 1년만에, 중학교도 1년만에, 고등학교까지 1년만에 마칠 수가 있었다. 농장 주인이 더욱 기뻐하였고, 대학까지 진학을 시켜 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이 때 동석기는 신학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동석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제게 이렇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주인님이 믿는 예수님의 마음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저고 그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하니, 허락된다면 신학을 하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인 주인이 쾌히 승낙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본토로 건너가 일리노이주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이어 개렛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당당히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기에 이르른다.

이제 그에게는 다음 진로를 정할 차례이다. 동석기는 미국의 좋은 교회에서도 목회 할 수 있었지만 조국을 생각하여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주인님의 호의에 의해서다. 계속 주인님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 교회에서 목회에 임한다면 목회자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근원은 한국이 아닌가. 우리 민족은 지금 예수님을 모른 채 도탄에 빠져있다. 가서 이들을 돌보며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이 참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부족한 나를 목사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리라.'

1913년 12월에 귀국, 감리교 원주지방 순행목사로 교역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첫 교회 중 하나로 꼽히는 인천 내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고향을 방문하였는데, 모든 동네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십 수년 동안 소식이 없어 집안에서 재가를 시켰는데, 새 남편마저 이내 병사하였다는 것이다.

동석기 목사는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이후 그는 아내를 전문학교까지 다니게 해 신식교육을 받게 해주었다.
이처럼 동석기 목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모험심이라든지, 성실성이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국을 사랑하였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2.  3.1운동 전후로 펼쳐진 그의 독립운동과 애국심

인천 내리교회에서 3년간 성공적 목회를 거둔 동석기 목사는 서울 마포교회를 거쳐 1918년 수원지방의 남양교회로 부임한다. 여기서 그는 3.1운동의 도화선을 지피게 된다.

평소 그는 민족주의자인 박희도10)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또한 수원지방의 독립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과도 빈번한 내왕을 갖곤 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조선독립에 관한 논의를 자주 하였고, 특히 동석기 목사는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관계로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과 친분이 깊었고 세계정세에도 밝아 모임을 이끌어가곤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 등을 남보다 빨리 간파하고, 이러한 소식들을 민족 진영에 전달해 주곤 하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정책적인 방해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남양·사강·비봉 등지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한 활동 이외에도 민족 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력을 기울여, 그의 목회 지역이 수원지방 3.1운동의 성역이 되도록 하였다. 그런 그는 3.1운동 민족대표로 서명하였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3월 1일이 되자 그는 직접 상경하여 오후 2시에 회집된 파고다 공원의 학생대열에 참가하고, 선언식을 마친 다음에는 민중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으로부터 의주로, 정동 미국 영사관 앞, 대한문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 총독관저 등을 다니며 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는 미국 총영사관을 찾아가 한국민족의 민족자결운동의 정황을 파리 강화회의에 타전해줄 것을 의뢰하다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그 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개월을 언도 받고 옥중생활을 치른 그는, 이 3.1운동 참가에 따른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부득이 담임하던 남양교회마저 사임해야 했다. 이후 충남 청양교회로 내려가 3년간 시무한 뒤 다시 자유로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서 그곳 봉천의 영고탑교회에서 목회에 임했다.

3.  진리 앞에 겸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가되다.

세상적인 독립운동에만 몰두했던 그의 영혼도 어느새 지쳐있었다. 일본으로의 물리적인 독립보다 영혼의 독립을 더욱 절감하고, 1927년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도착 즉시 오하이오주에 있는 신시내티 성경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은 미국 환원운동(還元運動)의 중심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다. 환원운동이란 사분오열된 오늘의 교회가 각자의 주장과 교리를 버리고 성경의 교훈과 교육 원리대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이 신시내티 성경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는 마침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본을 깨닫고서 침수세례11)를 받은 뒤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으로 새로 태어난다. 1929년에는 아예 감리교에 목사 자퇴원까지 내고(당시 그는 정동교회 소속 목사였음),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12)가 된다.

한국에 돌아가 환원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한 그는 귀국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남부를 순회하던 중 알리바마주에 있는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인 톰프슨(T.B. Thompson) 씨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톰프슨 씨 가족과 교인들의, "생활이 곧 신앙이요, 신앙이 곧 생활"인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과 성경을 자기고 토론하던 중에, 예배시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13) 결국, 신시내티 성경 신학대학원에서 얻은 그의 환원운동에 비로소 구체적 방향이 설정된 것이다.

한편 이곳의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14) 웨이볼리 벨몬트 교회는 동석기 전도자에게 귀국 여비를 지급하고, 그가 한국에서 복음을 원활히 전파할 수 있도록 매월 보조금을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1930년 11월 초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 서울에서부터 환원운동을 시작하고자 했으나, 3.1운동의 여파로 아직 그가 일경15)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됨에 따라 부득불 그 대상을 고향인 함경도 북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었다. 때묻지 않은 심성을 가진 북청 사람들이야말로 환원운동의 표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복음의 진수16)를 자기 아내의 가슴에 심어주었고, 이어 이웃에 있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차례로 그 불길을 점화시켜갔다. 성령의 은혜로 북청에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져 11월 말에는 약 20명에게 구원의 세례를 주게 되었다. 교인들은 단단히 얼어버린 개울을 깨치고 찬 물속으로 들어가 침수세례를 받아야 했지만, 그들을 감싸는 성령의 열기는 오히려 뜨겁기만 했다.

이것을 계기로 단 몇 주일만에 북청을 중심으로 북청군 이곡면 초리·함전교회를 비롯해 덕성면 서홍리·수동리·수서리 교회, 하거서면 임자동·맹경리·증산리 교회 등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었다. 가히 그리스도의 교회 열풍이 춥기로 유명한 북청 겨울을 녹인 것이다.

당시 북청에서 동석기 전도자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양석문 목사(과천 운화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회고담에서 우리는 동석기 전도자의 삶과 목회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동 목사님의 복음전파는 언제나 열정적이었지요. 큼직하신 분이 우렁찬 목소리로 늘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환원운동을 주창하셨죠. 워낙 성격 자체도 대담하고 쾌활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을 일일이 다독거려가며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지요. 전도여행을 다니느라 교인 집에 묵었다가 떠날 적엔 반드시 '먹이고 재워줘서 고맙다'며 얼마간의 돈을 내놓곤 했습니다. 가난한 농촌 살림을 누구보다 걱정하신 목사님이셨죠. 그리고 그분은 대단히 남성적이면서도 자상한 데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그분껜 연세 많으신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어디 같이 갈 때면 꼭 누님을 단단히 부축하고서 평소의 그 큼직한 걸음과는 달리 누님의 보조에 맞춰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시곤 했죠. 동 목사님은 특히 힘이 약한 노인이나 어린이, 부녀자들을 더욱 자상히 보살피곤 하셨습니다. 늘 솔선해서 사랑을 실천하셨던 분이시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이 따로 없었습니다. 북청 교회들엔 언제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났습니다.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기성 교회들이 생명력 없이 시름시름 앓는 데 반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했고 생명력이 넘쳐났지요. 그야말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도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뜨뜻미지근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옛날 동 목사님 계시던 그 북청교회가 그립습니다."

동석기 전도자의 헌신적인 복음 사업은 북청 교회들을 2천년 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게 했다.

4.  굴하지 않는 그의 성품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고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을 1942년 일제의 대동아전쟁이 한창일 때 동석기 전도자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검거된 적이 있었다. 간첩죄를 씌울 만한 증거가 없게 되자 풀어주면서 대신 일제의 '성전'(聖戰)17)을 위해 헌금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평소 미국을 쉽게 오가는 걸 봐서 돈이 퍽 많은 것 같은데 대일본제국을 위해 헌금을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석방해 주기가 어렵소!"
그러나 이에 굴할 동석기 전도자가 아니었다.

"돈요? 아, 나한텐 돈이 많소, 그러나 그것은 내 돈이 아니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선교회의 돈이오, 내 맘대로 기부할 돈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네가 그렇게 궁하다면 대 돈, 약소하나마 지금 내 호주머니에 있는 얼마 정도는 기꺼이 드릴 수 있소. 그러니 그렇게 알고 나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다시 투옥시키든지 당신네 맘대로 하시오!"

기가 질린 건 오히려 저들이었다. 그의 담대함과 기백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5.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품

감격의 해방 후 그는 다시 태어난 조국의 미래를 위해 청년운동을 전개한다. '청년복음대회'등을 자주 개최했는데, 그는 행사 때마다 청년들에게 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길',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의 길', 일본 사람보다 더욱 위대한 민족이 되는 '민족의 길'을 달려갈 것을 역설하곤 했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이북에 개척했던 교회를 모두 상실하게 되자 이후 그는 남한에서 다시금 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에 진력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미 1939년에 서울 선교를 위해 종로구 내수동에 개척해 두었던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6.25 사변 이후 한동안은 부산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 밖의 지역에도 많은 개척교회를 설립해 나갔다.

이후에도 동석기 전도자는 은퇴할 때까지 계속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장을 위해 백발을 휘날리는 노구의 몸으로 미국의 각 지역을 돌며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선 'S. K. Tong'하면 '정직과 성실의 전도자'로 통했기 때문에 늘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이 호응은 그대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밖에도 한국에 미국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설교본부를 설치케 하고, 후진 양성을 위해 강서구 등촌동에 그리스도 신학대학을 설립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등 하나님 사업을 위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Ⅲ.  환원운동

그러면 동석기 전도자를 한국 교회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이끌었던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환원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환원 운동의 원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환원운동의 배경

역사는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원운동도 정치.사회.문화.종교의 상호관계성을 갖고 시작되었다. 본인은 성경대로 살고자 했던 모든 신앙인들을 환원운동가라 지칭하고 싶다.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모든 사상들보다도 하나님 중심의 방법과 삶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모든 사람은 다 환원운동가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재세례파들과 울리히 쯔빙글리(Uirich Zwingli)와 같은 개혁자들은 루터나 칼빈이 도모했던 것보다도 신약에 더욱 가깝게 되돌아 갈 것을 원했다.

17세기 죤 록크(John Locke)의 계약사상에 의해 교회에 대한 정부의 관계에 혁명이 일어났다. 아이작 뉴톤(Isaac Newton)에 의한 근대 물리학의 혁명도 이 시기에 일어났고, 기독교에도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성서가 말하는 교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고해 성사와 전통주의를 버리기 시작하였다.

제 1 차 대각성(Great Awakening)운동은 뉴우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났다.
19세기초기에 일어난 제 2 차 대각성 운동은 초기의 청교도로부터 깨달은 새로운 감리교 유형을 구별하였다. 발톤 W.스톤, 알렉산더 캠블, 토마스 캠플, 월터 스코트 그리고 몇몇의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벗어나서 그들 자신들의 길을 모색하였다.

미국의 기독교는 정부로부터 분리되었고, 교회의 제의식 및 행정적 방법론이 실질적으로 변하였다. 많은 교파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교회일치(Unity)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의 분열은 죄악이고, 그 치유는 오직 초대 교회로의 환원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미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823년 알렉산더 캠블은 당시의 분파주의(교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크리스챤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를 출판하였다. 그는 침례교 사상(Baptist Thought)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18)

남북전쟁은 환원운동에 있어서 대변혁을 초래케 하였다.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 톨버트 패닝(Tolbert Fanning) 그리고 데이빗 립스콤(David Lipscomb)등은 예배시의 악기 사용 및 선교회의 조직, 그리고 성서를 다만 권위적인 침묵에 이르게 하는 또 다른 시험적인 경우들과 같은 비성서적 요소의 침입에 대항하여 교회를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도시화(Urbanism)나 산업주의 및 분파주의가 성행하면서 종교적 자유주의도 또한 널리 유행하였다.  부쉬넬(Horace Bushnell)이 매우 일찍이 성서에 대한 고등 비평을 가하고 전형적인 다윈이즘의 진화론과 급진사상들을 다룸으로 미국의 신학계에 영향을 끼쳐왔다.

칼 막스와 몇몇 다른 학자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가설을 사회이론에 적용하였다. 어떤 교회들은 사회 복음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대전은 교회건물을 파괴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전쟁에 대한 환멸은 전후(戰後) 고립주의를 낳았으며 이상주의를 쇠퇴시키고 민족주의를 발흥케 하였다. 이 당시 교회는 자율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으며, 연합운동이 가속화되었다.

2.  성서에 입각한 환원원리

환원의 테마는 신.구약 성서에 모두 담겨져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진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유효한 원리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모든 계약을 지켰다면 타락도 없었을 것이고 환원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렸을 때부터 환원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은 환원의 길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다.

아벨은 참된 예배를 드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에녹을 하늘로부터 죽음 없이 옮기시고 노아를 방주에 보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당신의 축복을 명백히 보이셨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노아는 의인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약을 맺으신다. 이 계약을 통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도 하나님과의 계약을 충실하고자 노력하였다. 사사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며, 다윗이나 솔로몬, 히스기야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약속(계약)들을 성실히 지키고자 하였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을 떠난 하나님의 섬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시야 제위 18년 제사장 힐가야가 모세 율법의 사본을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이 젊은 왕을 향해 이 사본을 읽자, 요시야 왕은 그의 옷을 찢으며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지적한다.19) 그리고는 종교 개혁을 시작한다.

신약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도의 가르침도 예수 그리스도 이었으며, 기도도 주님의 이름으로 드렸고20), 성찬식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주일21)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죄의 속성이 없는- 순수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들은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은 없다.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22). 아울러 성경의 말씀을 덧붙인다거나 빼어서도 안될 것이다23). 환원운동은 말씀 회복 운동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4)명하셨다.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Ⅳ.  맺는 말

환원운동은 성서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개념이다. 이는 근본적인 것과 최상의 것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다. 때때로 최선의 진보는 이전의 옛것으로 되돌아감으로서 성취될 수 있다. 성경이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며,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최상의 것임을 신앙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거짓 길을 인식시키고 이에 대항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25). 우리는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아울러 완전한 주의 말씀으로서 신약성서가 신적(神的) 모형을 말해주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의 모형도 신약성서에서 찾아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동석기 전도자는 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하여 환원운동의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그의 대쪽같은 성격이 환원운동의 대열로 내몰았던 것이다.

동석기 전도자는 모험심과 진취성이 있었고, 애국심이 남달랐으며, 진리 앞에 겸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골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세계를 그의 가슴에 품을 수 있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도 포기하고 환원운동의 기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신앙은 변증과 논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음과 순종만 있을 따름이다. 불의 앞에 굴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진리로 더욱 뜨겁게 타올랐던 것이다.

동석기 전도자는 유능하고 열성적인 독립운동가 이었으며, 환원운동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하도록 적극 유도했다. 동석기 전도자는 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후진들을 양성한 전도자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언제나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은퇴 후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그리스도의 교회 양로원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쳤지만 지금도 동석기 전도자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26)가 하나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실 것이다.

각주

1)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박을 때에 교회당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더불어 중세 카톨릭 교회는 서서히 사라지고 되었다. 지금까지 교황의 일방적인 독재아래 미신적인 신앙으로 시달림을 받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된 사건을 말한다.
2) 교직 매매, 고급 성직자의 부도덕한 생활, 음행.
3) 영어를 사용하는 민족.
4) 구교 운동으로 반종교 개혁운동을 펴나감.
5)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쯔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회를 조직하여 사람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 보니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파들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6)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 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 있게 보았다. 자연적으로 반-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7)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 만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 였다. 흔히 유니테리안이라고 부른다.
8) 환원운동은 초대교회의 순수했던 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며, 교회 일치 운동이다.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본질에는 일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는 잠잠하며-비본질에는 자유, 매사에는 사랑으로 행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운동이라 함은 우리의 완전하지 못함을 시인하며, 그리스도를 푯대로 날마다 나아가자는 데 그 의미가 있다.
9) 윤세민, {신앙의 그루터기} 도서출판 두란노, p.171-172.
10)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
11)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요한에게 받은 세례가 바로 침수세례이다. 세례란 말은 밥티죠(βαπτιζω, baptism, 물에 잠긴다)로서 침례로 표기해야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된다.
12)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목사라는 말 대신에 전도자라는 칭호를 쓴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형제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권위적인 명칭을 지양하는 것이다. 엡4:11에 나오는 목사는 '목자'이다. 성경에는 목사라는 칭호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감독, 장로라는 칭호가 지금의 목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양육하고 가르친다는 의미로서의 목사로 우리는 이해한다.
13) 예배시 악기 사용에 관하여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는다. 다만 영혼이 없는 악기가 예배를 직접 간접적으로 주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악기로 우리들의 음성을 허락해 주셨다. 초대교회는 악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악기가 예배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악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방신을 섬기며 제의에 사용되던 악기가 예배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칼뱅이나 쯔빙글리, 웨슬레, 제임스 맥가비 등이 악기 사용을 반대하였다.
14)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15) '순사'.
16) 말씀 중심의 그리스도의 교회.
17) 2차세계대전.
18) 김익진, {환원운동의 역사}, 태광 출판사(서울,1987) P.53.
19) 왕하22: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20)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21)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초대교회는 매일 성찬식을 행하다가 안식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날 모여서 성찬식을 행하였다. 헌금도 이날에 행하였다. (고전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22) 갈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23) 계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4) 마28:20.
25) 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한 모든 식물마다 뽑혀질 것이다.(마15:13).
26)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모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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