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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를 끝으로, 교회사를 통과하는 우리의 여행을 마치려한다.
이 마지막 과에서 우리는 과거를 복습하면서 또 미래를 바라보면서 두 가지 주제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이 과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그간 다루었던 일련의 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복습할 기회를 줄 것이다.
이 과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는가?"의
주제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미리 말하는
것은 항상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뒤돌아볼 때, 아마도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일세기 교회의 시작은 로마제국 내에서 성장하여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박해의 불길과 교회내부의 이단들의 성행과 결국 로마카톨릭의 성직위계제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주교의 발달. 이 발달시기는
어떻게 교회가, 4세기까지, 박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인 4세기 초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교회의 정치유착들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신성로마카톨릭교회(Holy Roman Catholic
Church)로 발전되었고, 중세기의 상당한 세속적 정치적 권력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교회는 중세기에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중세기 말까지 교리의
발달이 진척되었다. 배교가 로마카톨릭교회로 귀착되었고, 11세기에는 로마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가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는 신약성경의 많은 가르침들에서
떠난 배교가 어떤 방법으로 일어났고, 시대사상과 혼합하는 교리들이 발전되었는가를
몇 가지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동서방교회들의 분리는 기독교의 주요 분열이었으며,
이후 이들 기독교 "교단들"(wings)은 결코 통합되지 않았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에 권좌를 두고 계속 지배하였고, 동방정교회는 중앙본부들을
갖지 아니한 개별 교단으로 남아있었다. 오히려 그리스정교회, 시리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
기타 많은 정교회들이 국가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간의 교리적 신념들은 동일하다.
다만 언어와 문화에서 다를 뿐이다.
종교개혁운동. 르네상스운동이후
교회 계층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교회에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살펴본
대로, "보상의"(work righteousness)가 발달되었고, 존 테쩰(John Tetzel)이
독일에 들어가 그곳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절정에 도달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보상의에 대항하였고, 비텐부르그(Wittenburg) 성당출입문에 토론을 위한
그의 명제들을 공고하였으며, 토론을 요청하면서 교회에 도전하였다.
개신교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운동이었고,
세 가지 주요 원칙들이 모든 종교개혁의 그룹들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 성경말씀의 전적-충분성(all-sufficiency of
the scriptures), 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다.
이들 원칙들은 루터(Luther), 쯔빙글리(Zwingli), 칼뱅(Calvin), 사보나롤라(Savonarola),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비록 종교개혁이 천주교회와 분리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분리로 귀착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가르침들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출교 당하였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세 가지로 크게 나뉘었는데, 그것들은
독일 종교개혁, 스위스 종교개혁, 그리고 영국 종교개혁이다. 독일 종교개혁에서
주도적인 인물은 물론 마르틴 루터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합류하였지만, 루터가
그 운동에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처음 존 칼뱅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스위스 종교개혁에
합류하였다. 영국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헨리 8세 영국
왕이 이혼을 정당화하고, 재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티칸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헨리 8세는 영국 주교들의 도움을 받아 영국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신세계는 유럽의 교파적인 경향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정착자들이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종교적 배경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들은 신세계의 자유와 문화와 혼합하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서 분열을 지속시키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환원을 향한 노력들. 18세기
말까지, 쪼개진 기독교계에 불만스런 감정이 지리적으로 나누어진 미국의 많은 지역들,
즉 북서부지방, 남부지방, 중서부지방, 및 기타 지방들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까지, 그 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 부자와 발톤 왈렌 스톤과 같은 이들이었다. 다른 것들과 더불어 신약성경에로
돌아가 기독교에 연합을 가져오려는 염원으로 신명이 난 사람들의 중요한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전반은 성장과 발전의 세기였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열렬히 연구하던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한 슬로건이 만들어졌고, 보게되겠지만, 그것은 환원운동을 연합시키기도
하고 갈라놓기도 하였다. 이 슬로건은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한다"는 것이었다. 이 19세기 전반기 동안에는
환원운동 전반에 걸쳐 연합이 이루어졌다.
세기 초까지, 많은 문제들이 "환원운동"을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북부와 남부간의 긴장들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이것들은 종종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철학적 갈등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앞 과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보신학은 미국에 숨어들었고, 지금은 스톤-캠벨 운동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비록 19세기 후반기에 분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념적인 분열은
대단히 컸다.
20세기 초까지, 분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악기음악과 선교사
공회와의 연계가 환원운동의 큰 그룹에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1906년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악기음악과 선교사 공회에 반대하여 환원운동의 다른 그룹들과 분리하였다.
마지막 세 과들에서 우리는 이 부분의 문제들을 추적하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많은 일들이 발전되었다. 환원운동은
이제 세 가지 주요 그룹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들,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구성되어있다. 연합시키려는 시도로써 시작되었던 운동이 그룹을
찢어놓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 과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질문을 살펴보기를 원하며, 몇 가지 제안들을 하고자 한다. 이
제안들은 조심스럽게 제시되었고, 그것들이 우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들과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연구는 아마 우리들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는가?
이 책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환원운동에서 우리 모두, 즉 그리스도의
교회들,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생각을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필자의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열심히 해답을 궁구(窮究)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제안하려고 한다. (1) 우리는 환원의 뿌리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2) 우리는 신약성경에로 복귀해야 한다. (3) 우리는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방법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4) 우리는 대화의 채널들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1. 우리는 환원의 뿌리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환원은 작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필자는 그것이 작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비록 그것이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신약성경 기독교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에, 졸업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한 분으로부터
"신약성경에 교회를 위한 어떤 패턴이 있다는 것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질문하신 분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예"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한 패턴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해야 하며, 우리의 운동에 그것을 복귀시켜야 한다. 신약성경
기독교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일단을 인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작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다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세대에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God's mission)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확실히
그 일을 할 수 있고, 또 할 누군가를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일, 즉 하나님의
방법은 꺾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실 것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다.
2. 우리는 신약성경에로 복귀해야 한다.
신약성경으로 복귀한다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결정할 때,
성경말씀의 중요성을 재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는 쉽고, 우리들의 신앙원천을 살피는 것은 잊기가 쉽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신약성경에 뿌려진 씨가 그것을 따랐던 자들의 삶에서 일정한 특성을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오늘날 동일한 씨를 심는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동일한 결과들을 가져올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사람들이 이집트의 투트(Tut)
왕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여전히 "살아" 있고, 싹을 띄울 수 있는 밀
알을 몇 개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가 그 씨들을 주어서 심는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종류의 밀을 그 씨들이 생산하겠는가? 오늘날의 농장주들이 생산하는
최근 품종의 밀들을 일부 생산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투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씨앗들이 동일품종의 밀을 생산하겠는가? 대답은 분명하지 않는가? 동일한
원리가 "왕국의 씨"(Seed of the Kingdom)의 경우에서도 적용된다. 만약
그 씨가 오늘날 심겨진다면, 그것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품종"의
그리스도인들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지속적으로 매 세대가 신약성경에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3. 우리의 해석학을 재검토해야 한다.
앞 과들에서 "해석학"이란 단어를 언급하였다. 웹스터 사전은 "해석학"을
"해석방법의 원리들의 연구"로 정의한다. 아마 우리는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우리의 원리들을 개선할 수 있는 많은 분야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원운동과
관련해서, 우리는 세 가지 규칙들 또는 사용해왔던 세 가지 해석의 원리들에 특별히
주의를 집중시켜왔다. 우리는 이것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환원운동역사에서 다음의 세
가지 방법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 승인된 사도의 모범, 그리고 필요한 추론이
제시되었다. 이 세 가지 방법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Direct Command of God).
이 해석의 원리는 우리들 모두에게 아무런 문제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면, 하나님은 그것을 진심으로 할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한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우리가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라(행 2:38)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날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놓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들은 명령들이다. 환원운동에서 우리들
모두는 성경말씀의 이 해석의 원리에 아무런 문제를 갖지 않는다.
승인된 사도의 모범(Approved apostolic example).
사도들이 남겨놓았고, 우리들을 위한 모범들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이 신약성경에
있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사도행전 20장 7절이다. 이 성구는 우리들에게
초기 제자들이 주의 만찬 또는 성만찬을 지켰을 때의 모범을 보여준다. 신약성경에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을 지킨 때를 명확하게 밝히는 어떠한 직접적인 명령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인된 사도의 모범에 의존해야한다. 또 다른 예는 세족에
관한 것이다. 초기 제자들은 그들이 세족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승인된 사도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환원운동 내의 우리 모두는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우리들에게 몇 가지 해석학적 문제들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모범이 승인된 것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구를 계속해야할 종류의 일이다.
필요한 추론(Necessary Inference).
우리는 모두 추론이 무엇인지를 안다. 우리는 결론이
무엇일지를 메시지의 두 개나 그 이상의 요소들로부터 추론한다. 환원운동 내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으로 드러난 몇 가지 추론들이 있는가하면, 추론들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던 한 가지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물에서 나오셨다고 우리는 읽는다.
만약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셨다면, 그분은 분명히 물로 내려가셨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하나의 필요한 추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의 원리는 환원운동의
보다더 보수적인 그룹들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고, 모든 이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해석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추론이 "필요한" 때를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를 이유로 들어
반대입장을 설명한다.
따라서, 독자는 우리가 해석학의 원리들을 지속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우리의 마음을 완전하게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이해하는
원리들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할 때, 한 형제인 우리를 갈라놓는 간격을 좁힐
수 있을 것이다.
환원운동의 초기의 슬로건은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한다."는 것이었다. 이
슬로건은 지속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환원운동의
보수적인 두 그룹들 사이에서조차도 이 슬로건의 의미에 관한 견해를 달리한다. 슬로건의
앞 부분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뒷부분,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한다."의
해석에서는 견해의 차가 훨씬 크다. 그러나 앞 과들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리가 해석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 슬로건의 의미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는 점을 단순히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날과 관계가 있는가? 아니면, 이것을
외친 초기 지도자들에게 잘못이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4. 우리는 대화의 채널들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지난 30-40년 동안, 서로간의 확신들을 검토하고, 간격을 좁히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초기 시도들 가운데 한 가지는 위티와 멀치 운동(Witty-Murch Movement)으로
언급되어져 왔다. 1940년대 초에 미시간주 디트로이트(Detroit)의 클라우드 위티(Claude
F. Witty)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제임스 드포레스트 멀치가 두 그룹들간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2-3년 간, 그들은 {연합 계간지}(The
Unity Quarterly)를 출판하였다. 마스터헤드(masthead)에
밝힌 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The unity of
the people of God on the Word of God)을 위한 것이었다. 위티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소속이었고, 멀치는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의 소속이었다. 비록 유익한 일들이
상당히 진척되었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게 뒤따랐다. 그 운동은 그것의 지도자들이
바랬던 성공을 얻지 못했다.
과거 수년 동안, 전체 일곱 번에 걸쳐 연합운동 집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두 형제지간에 다양한 장소들에서
소집되었다. 비록 필자는 이들 세미나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참석하는 특권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독립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 모두로부터 그 모임들에 관해서
많은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던
옵서버들 이외에 이들 모임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들 모임들을
검토하는 것이 이 글에서의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분열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 대화의 채널들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들과 확신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계획들과 예상들
필자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관해서 감지하고 있는 것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새롭게 이루어진 대화들이, 특히 우리들 독립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를 얼마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개선해왔다는
것은 분명하게 사실이다. 그것들은 또한 우리들에게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들과 감정들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켰다. 이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운동이다.
필자는 두 그룹들, 즉 독립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처럼 완전하게 통합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가까운 장래에는 더더욱 아니다.
아마 그 두 그룹사이에 더 큰 사랑의 감정과 계속된 연구와 검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들이 가까운 장래에 연합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결론
이제 결론으로, 이 전체연구가 기초했던 원리들의 한 가지,
즉 하나님의 백성은 장기간동안 신실함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독자의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게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연구를 통해서 이것을 여러 번
보았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연구하겠다는 결단을 기억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는
것이 본질이다. 만일에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한 믿음과 실천을 위한 규범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위해서 "시련을 불태웠던"
자들을 위해 큰 감탄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연구에 접근하도록 촉구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지도력과 그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더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공부를 끝내면서,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의
삶의 지배적인 관심을 기꺼이 바치기만 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대단히 큰 일들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당신을 천거한다(엡 3:20-21 비교). 영원은 너무 길고, 천국은
너무 값진 것이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분께서 모든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토의 문제들
1. 무엇이 기독교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의 발달에 대한 주된
이유들이었는가?
2. 가까운 과거에 이루어졌던 "환원"시도들의 몇
가지를 논의하시오. 기독교 역사의 다른 시기들에 교회를 회복하려는 시도들의 몇
가지를 논의하는 것은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3. 무엇이 환원운동 내에서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행하여 질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믿는가? 연합이 달성될 것이라고 믿는가?
4.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원하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세우실 것이다."는 진술의 함의들을 논의하시오.
Morris M. Womack, Thirteen
Lessons on Restoration History(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 1988), pp. 14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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