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대륙의 기독교
(Christianity in the New World)

 조동호 목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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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교적인 자각

미국의 기독교

미국의 로마 천주교

미국의 개신교

결론

토의 주제들

신대륙의 발견과 정착으로 교회에도 많은 변화들(adaptations)이 있었다. 정착자들은 그들이 이민해 올 때, 카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그들이 믿고 있던 종교를 가져왔다. 모든 분야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환경들은 새로운 변화들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것은 이 아메리카 신대륙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대륙의 기독교는 네 다섯 가지 중요한 사건들 또는 운동들에 의해서 특별히 영향을 받았다. 첫째, 유럽에서 자각되고 발생한 인문주의는 기독교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준 중요한 공헌자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기존 교회들의 차이와 분열의 출범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개신교 개혁은 유럽과 미국 모두의 기독교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유럽개신교주의에는 크게 세 "분파", 즉 루터교 개혁, 스위스 개혁, 영국교회 개혁이 있었다. 비록 이들 세 개신교주의 "분파들" 모두가 많은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주된 성경 원칙들을 크고 작게 나누고 있었다. 이들 세 커다란 원칙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 성경말씀의 전적인 충분성들이었다. 개신교주의의 이들 세 분파들과 기독교의 원칙들에 관한 더 상세한 내용은 교회사 전반에 대한 다른 연구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우리가 언급한 다른 "사건들"이나 "운동들"은 그것들 모두가 어느 정도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나열할 것이다. 우리들은 발견과 민족주의와 산업화의 거센 물결을 언급한다. 이들 세 가지 발달은 신대륙이 갖게 될 특성에서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다. 인문주의의 발생은 새로운 세계들을 찾아 나서려는 당대의 많은 야심가들에게 고무적이었다. 도시들의 발생과 민족주의적 정체성에 대한 열망과 함께 이것은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냈다. 이것과 더불어, 인류의 사고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친, 산업혁명이 왔다. 이들 영향들은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교회들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비록 미국의 교회들이 더 빠르게 더 많은 교파들로 갈라졌지만, 기독교 안에서 "사도들의 전통"(ancient order of things)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신대륙에서 탄생하게 된 것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이 과와 다음 과에서 우리는 환원운동의 시작에 공헌했고, 원인이었던 몇 가지 미국 교파주의의 발달들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종교적인 자각

콜롬버스에 의해서 1492년에 시작된 미 대륙의 발견은 모든 미래의 세대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도록 되어있었다. 쿠알벤(Qualben)은 이들 발견들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결과들을 나열하였다.

첫째, 인간의 지리적 지식의 확장이 있었다. 다음, 일반적인 면에서 인류와 특별한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신대륙의 발견과 정착의 중요성이 있었다.<Lars P. Qualben,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New York: Thomas Nelson and Sons, 1958), p. 413.>

두 번째 결과는 우리들의 연구에 대한 좀더 독특한 흥미를 갖는다. 우리는 대부분의 주요 교파들이 유럽에 그들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대륙에 옮겨왔을 때, 그것들은 독특한 "미국식 취향들"을 따랐다. 워커(Walker)는 "미국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유럽대륙에서 수입한 것이다"<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d ed.(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0), p. 430.>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에서 우리는 주요한 유럽교회의 몇몇 교파들이 독특한 미국식 교회로 변모한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다음 과에서는 미국교회의 몇몇 교파들 또는 미대륙에서 그들의 역사를 시작한 교파들에서 발견되는 기본원칙들 몇 개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아메리카주의 식민지화는 교회에 지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제안한대로, 종교는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라의 "취향"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보여진다. 미주 대륙이 정착되었을 때, 신대륙 전체에 고루 퍼진 자유에 대한 커다란 느낌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자유가 종교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대륙의 백성과 설교에 스며들 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 위대한 자유는 그 위대한 개인주의의 발달을 위해 허락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차이점들이 극대화되면서 더 많은 분열들이 발생하였다.

대각성운동은 미국의 사회, 정치, 종교 생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대각성운동의 많은 요소들이 미국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충격을 주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신앙에 거슬려 실제로 반항하였다. 많은 "불경스런 클럽들"이 이러한 반항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깨어져 나갔다. 신앙인들이 격감하는 시기가 있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선교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복음의 열정을 더욱 불태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둘째, 대각성운동은 대부흥운동들을 야기했다. 천막집회들과 "유황이 타는 지옥불"에 관한 설교가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었고, 대단한 감정주의가 설교의 상당부분을 특징지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더불어 많은 수의 교육기관들이 시작되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상위권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들 상위권 대학교들 중에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이 포함되었다. 이들 대부분의 초기 대학교들은 종교적인 필요들에서 시작되었고, 크게는 복음을 전파할 젊은이들을 키울 사명을 갖고 있었다.

대각성운동은 결과적으로 그것에서 환원운동이 일어난 대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이 두 가지 현상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이 둘 사이에 간접적인 연관성은 확실히 있었다. 제임스 드포레스트 멀치(James DeForest Murch)는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종 "제2의 각성"이라 불린 미국의 대부흥운동이, 몇몇 사람들이 환원운동의 출현시기를 앞당기고, 환원운동의 주요 추진력의 영예를 스톤에게 돌리려는 그들의 충정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미국의 환원운동의 시작을 알리지는 않았다. 이 운동은 환원운동의 특징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도적인 환원운동가들에게 어떤 생각의 반응들을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부흥운동은 환원운동의 진보를 크게 촉진시킨 기독교 신앙에 유리하든 불리하든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냈다.<James DeForest Murch, Christians Only(Cincinnati, Ohio: Standard Publishing, 1962), pp. 30-31.>

따라서 독자는 당대의 종교사회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

기독교는 다양한 개척자들을 따라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신대륙에 들어왔다. 로마 천주교는 로마 천주교 국가들에 의해서 옮겨왔고, 개신교는 개신교 지도자들과 더불어 개척지로 옮겨왔다.

미국의 로마 천주교. 로마 천주교는 유럽에서 상당히 힘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비록 완벽한 미국 천주교 역사를 약술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간략한 논의만으로도 천주교가 가졌던 영향력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리라 본다.

초기 천주교 이민들로 인해서 천주교 선교 본부들이 산재된 스페인 정착지들이 만들어졌다. 이것에 관한 한 예로,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서부터 북부까지 모든 곳에 천주교 사제들이 세운 다양한 "선교 본부들"이 흩어져 있었다. 좀더 유명한 도시들 가운데 몇 곳만 언급한다면, 산타 카타리나, 산타 발바라, 산타 로사들이 있다. 그 도시들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모든 곳에 하루길 거리마다 세워져 있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페르디난드(Ferdinand)왕은 식민지 개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 후 1513년, 폰세 데 레온(Ponce De Leon)이 플로리다를 발견하였고, 1565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성 어거스틴(플로리다)의 토대들이 놓이게 되었다."<Qualben, p. 416.> 스페인 선교 본부들은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주에 세워졌다.

불란서 정착지들 또한 일부 로마 천주교 선교사들의 활동의 결과였다. 불란서 천주교인들은 북에서 내려와 1608년에 쿼백(Quebec)을 세웠다. 불란서인들은 "캐나다, 루이지애나, 뉴욕의 절반, 매인의 절반, 버몬트의 절반 등을 포함하여. . . . '북미주에서 소유권 청구'를 하였다. 북미주는 균일한 로마 천주교 인구를 갖도록 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Ibid., pp. 416-417.> 라르즈 쿠알벤(Lars Qualben)은 매우 훌륭하면서도 간략한, 독자가 보고 싶어할, 그 이후의 발전들에 대해서 약술하고 있다.

미국의 로마 천주교가 누렸던 성장은 다음의 수치를 보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 천주교 교인의 수는 19,000명에서 24,000명 정도였으나, 1808년에는 대략 150,000명으로 늘었고, 1850년에는 1,726,000명으로, 1870년에는 10,626,000명으로, 1958년에는 35,846,000명으로 성장하였다. 1986년 세계연감에 의하면, 1985년 미국의 로마 천주교 교인들의 수는 52,392,000명 이상이었다.

미국 천주교의 이런 놀라운 성장은 두 가지 주요 원인들에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많은 수의 천주교인들이 유럽 국가들에서 이민을 해왔고, 그들이 미국에 들어올 때 그들의 천주교 신앙도 함께 가져왔다. 둘째, 높은 출생률 덕분에, 천주교인 가족들의 수가 거의 줄지 않았고, 교회성장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것이 "불신자들"이나 다른 교파들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천주교회는 복음전도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특히 핵심적인 선교사 단체였던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그러했다. 천주교회는 목적을 이룰 매우 성공적인 수단들을 많이 이용하였다. 이것들 가운데는 복지사업, 사립 교구학교들, 문서사업, 그리고 미사 축제로 모아지는 구심성이 포함된다. 비록 천주교회가 가장 잘 연합하고 있는 모든 기독교 교파들의 전면들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교회 안에는 불만을 품은 분열된 그룹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적인 전통신학과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는 (사제들은 물론 평신도들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인들의 시도들에서 발생하는 차이점들에서 유래한다.

미국 천주교의 "인격"에 관련된 다른 두 가지 단면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첫째, 교구학교들은 더 나아가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들과 원칙들에 이용되었고, 여전히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학교들은 늘어나는 비용으로 인해서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징은 로마 천주교의 계층들이 "새나가는" 양을 줄이는데 공헌하였다. 둘째, 미국 천주교 안에 좀 더 진보적인 요소가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미국의 "민주적인" 삶의 양식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확실하게 교황 요한 23세와 같은 최근의 교황들을 특별히 상기시키는 것으로써 천주교 고위직이 실시한 좀더 진보적인 정책들의 영향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개신교. 개신교는 미주에서 가장 큰 자유를 발견하였다. 미국 정착 아주 초기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몇몇 종파들은 종교의 자유를 다른 종파들에서 배제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단지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개신교의 시작과 미국 식민지화의 시작은 동시 발생적인 사건들이었다."<Ibid., p. 413.>고 쿠알벤이 관찰한 미국의 종교적 풍토는 건강하였다.

미국에서 누린 자유는 새로운 교파들의 출범을 더 수월케 하였으나, 대부분의 가장 오랜 미국의 교파들은 유럽의 교파들의 단지 미국식 변형들이었을 뿐이다. 로날드 오스본은, 그의 저술, {미국 기독교의 정신}<Ronald O. Osborne, The Spirit of American Christianity(New York: Harpers, 1958).에서 이 현상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하였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미국에 있는 유럽교파주의의 중요성에 관련된 몇몇 중요한 사실들에 관한 한 간략한 조사에 돌릴 것이다.

영국 교회는 월터 래라이 경(Sir Walter Raleigh)이 버지니아 주를 식민지화 한 직후, 미국에 세워졌다. 여왕에 대한 세금지원이나 충성과 같은 일들을 위해서 이민자들 위에 군림했던 영국 교회는 혁명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영국교회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식민지들이 독립을 얻게 되었을 때에, 모든 실제적 목적들을 위한 영국 교회는 미국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1789년 설립된 개신교 감독 교회(Protestant Episcopal Church)가 영국 교회를 승계하였다. "이 교단은 모교회의 신앙과 예전과 영적 전통들을 영속시켰으나, 조직만큼은 미국인들의 필요에 따라 조심스럽게 맞춰 나갔다."<Qualben, p. 503.>

회중 교회는 1609년 존 로빈슨(John Robinson)에 의해서 영국 게인즈보로우(Gainsborough)에서 세워졌다. 쿠알벤은 세 가지 기본 원칙들, 이를테면, 전국 규모를 가진 교회의 위상, 외부 권위로부터의 자유, 자체 조직의 창설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Ibid., p. 419.> 미드(Mead)에 의하면, 회중 교회의 일부 전통유산은 단일신론자들(Unitarians)의 진보적인 배경에서 유래한 것이다.<Frank S. Mead, Handbook of Denominations in the United States 8th ed., revised by Samuel S. Hill(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p. 240.> 그러나 더 초기의 회중 교회는 유럽에서 유래하였다. 1620년 11월 9일, "청교도들"(Pilgrim Fathers)이 상륙하자, 그들은 플리머스,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그리고 뉴 해이븐에 이주지들을 세웠고, 법으로 회중 교회를 세웠으며, 하버드와 예일대학을 1636년과 1701년에 각각 세웠다.

루터 교회는, 물론, 독일 종교개혁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후에 그들은 한 그룹으로써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1623-1624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후에 뉴욕으로 알려진 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미드는 열 개의 다른 분파들을 가진 루터교의 대략적인 교인 수를 거의 9,000,000명으로 추산하였다.<Ibid., pp. 142-153.> 가장 큰 두 개의 루터 교회 분파들은 2,500,000명 교인을 가진 미주리 총회(Missouri Synod)와 3,000,000명 이상의 교인을 가진 미주 루터교(American Lutheran)이다. 이들 두 그룹들은 교리적인 차이로 갈라섰는데, 미주리 총회는 보수적이고, 미주 루터교는 매우 진보적이다. 루터교의 여러 다른 분파들을 하나의 커다란 교파로 통합시키려는 노력들이 최근에 있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나 신학적인 격차가 너무 커서 통합이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침례교회는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프로비덴스(Providence) 시에 로저 윌리암즈(Roger Williams)에 의해서 1639년 미국에 세워졌다. 침례교회의 성장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파들 가운데 하나로 발전할 만큼 빠르고 지속적이었다. "침례교인들은 미국에서 주요 개신교 세력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한다. 27개 침례교 교파들은 1983년 대략적인 교인 수를 29,000,000명으로 보고하였다. 약 95,000개의 교회들이 있고, 개교회 중심이다."<Ibid., p. 34이하.>고 미드는 기록한다. 미드가 기술하는 대로, 상당한 분열이 침례교회들 안에 존재한다. 1845년 북침례교와 남침례교가 노예문제로 갈라섰다. 그 때 이후로, 다른 분파들이 발생하였다. 침례교인들은 미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텍사스로부터 동해안과 플로리다로부터 걸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남동부에서 더 강성하다. 침례교회들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 근본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가장 큰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장로교회는 1611년 버지니아에 정착한 알렉산더 휘테이커(Alexander Whitaker)의 노력들 덕분에 미국 기원을 갖고 있다. 유럽대륙의 장로교회는 모든 교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깔뱅주의적인 교단 가운데 하나였으며, 상당부분 깔뱅과 존 낙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미국 최초의 장로교회는 롱아일랜드에서 1640년에 시작되었다. 장로교회에는 대략 12개 정도의 다른 분파들이 있다. 가장 큰 그룹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U.S.A.)이다. 1958년 그들의 수는 6,933,189명이었다. 장로교는 그들의 모든 분파들과 더불어 확실히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퀘이커교도들(Quakers) 혹은 프렌드들(Friends)은 1656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앞서 우리는 유럽에서의 그들의 시작을 논하였다. 그들은 처음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 그리고 뉴욕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적어도 20년 동안을 "주류" 교회들로부터 크게 탄압을 받았다. 윌리엄 펜(William Penn)은 퀘이커교도 운동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펜실베니아주는 그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펜은 탄압 받는 퀘이커교도들을 위해서 1681년 피난처를 세웠다. 프렌드들의 수는 100,000명을 넘는다. 그들은 예배의 내적 영적 측면들을 깊게 강조하는 일단의 정적주의자(quietist)들이다.

감리교회 역시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1958년 그들의 수는 11,917,286명이었고, 최근 그들은 15-16개의 분파에 총 13,000,000명의 교인 수를 주장한다. 감리교인들은 독특한 감리교인 그룹으로 미국에 처음 오지 않고, 기존 영국교회의 교인들로 웨슬리의 추종자들로써 왔다. 미국 감리교회를 이끈 몇몇 인물들은 토마스 코크(Thomas Coke)과 프란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였다. 1784년 12월 24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회의 때에 "방법론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란 이름을 그들의 이름으로 선택하였다. 회의 기간동안, 프란시스 애즈버리가 그들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참고: 통계는 백과사전 브리탄니카에서 인용하였다.>

결론

이 간략한 조사는 신대륙에 가한 기독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주교회와 주요 개신교 교단들 모두가 유럽에서 시작하였고, 미주로 건너와 성장하였다. 이들 기독교 교단들에 관한 좀더 상세한 자료는 미국의 종교발전들을 다룬 역사 서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이 학과에서 살펴본 모든 교단들은 유럽에서 시작하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다음 과에서 우리는 몇몇 독특한 미국의 교파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시작하였는가를 공부할 것이다.

토의 주제들

1. 어떻게 개신교 종교개혁이 기독교가 미주대륙에 이식되는데 영향을 끼쳤는가?

2. "기독교 정신"이란 말을 토의하시오. 무슨 영향을 이 정신이 미주 기독교에 끼쳤는가?

3. "대각성"이란 말과 그것이 미국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을 토의하시오.

4. 무슨 영향을 미주 기독교가 초기 미주 교육에 끼쳤는가?

5. 미주에서의 천주교운동과 개신교운동 모두를 토의하시오. 어떻게 그것들이 전도 형태들에서 달랐는가?

6. 이 학과에서 논의된 각개의 기독교 교파들의 특성을 토의하시오. 어떻게 그것들이 새로운 미주 환경에서 영향을 받았는가를 설명하시오. 각 교파들에 기여한 중요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Morris M. Womack, Thirteen Lessons on Restoration History(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 1988), pp.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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