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7년 미국 바이올라대학에 다닐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를 받으면서 복음의 황무지와 같은 일본이나 선교지 뉴기니에 가서 복음을 전할까 생각도 했다. 남미 에콰도르에 기독교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방송국 담당자가 되어 달라는 말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당시 안수를 해주던 목사는 내게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고 얘기했다. 그것은 내가 켄터키성서대학에서 배운 것과 꼭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특정 교단에 소속돼 있지 않은 것도 조직이나 돈으로부터 독립해 마음껏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독립 복음전도자’인 내 신분이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다.
나는 페퍼다인대학을 거쳐 1961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늘 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조선인들을 보고 경험했던 일, 김오남씨와의 만남 등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마침 내가 아는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세복씨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테네시주의 한 교회에 요청해서 김씨를 미국 교회의 목회훈련생 자격으로 초청해 영주권을 얻게 한 적이 있다. 당시는 한국인의 외국 유학도 일본만큼이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를 초청했을 당시 김씨는 당시 서울 그리스도대 동문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씨는 나에게 ‘일본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공식 초청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안 가고 나 혼자만 가게 되었다.
김씨의 안내로 수양회도 참석하고, 또 청계천 빈민선교 현장도 탐방하게 되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제정구씨도 만났고, 김진홍(두레교회) 목사와도 교제하게 되었다. 청계천은 서울 도심 개발로 밀려난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청계천변에서 판잣집이나 땅굴을 파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끔찍하다’는 느낌과 함께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 이후로 1980년대 중반까지 50여 차례나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청계천 빈민사역을 돕고 해외에 알리는 사역을 했다.
한번은 청계천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찰도 교회도 자살한 사람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경기도 남양주 활빈교회 몇 사람들과 함께 대나무에 끈을 매서 겨우 시체를 끌어냈다. 시체는 며칠을 물속에 있었는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눈이 튀어나와 있고,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씻을 물도, 장사를 지낼 돈도 없다고 했다. 당시 물 20ℓ는 3주간의 임금과 맞먹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돈으로 물을 사서 몸을 씻겼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려고 화장터에 갔더니 사망진단서가 없다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병원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화장터로 달려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누군가가 ‘여권에다가 일본돈 1만엔을 넣어서 의사에게 건네주면 사망진단서를 특급편으로 보내준다’고 귀띔해줬다. 얘기대로 했더니 사망진단서는 바로 그 다음 날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돈과 사망진단서, 여권을 넣어서 경찰에 갖다 줬더니 곧바로 사망확인서를 떼어줬다. 다시 시체를 리어카에 태워서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했지만 이번엔 묘가 없었다. 청계천 다리 위에서 그 뼛가루를 뿌리며 나는 부르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8) 청계천은 내 신앙의 최고 스승이자 신학교
<2011.10.25 17:51,
국민일보>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다. 입국도 힘들었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쉽지 않았다. 그해 9월 나는 김진홍 목사의 안내로 겨우 청계천 빈민가를 심방할 수 있었다. 한 집을 찾았는데 실내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은 창문이 없어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방에서는 ‘우우우’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방에 조금 앉아 있으니 차츰 실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한 소녀가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엄마는 같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안돼 서 있어야 했다. 엄마는 무당집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갑자기 여자 아이의 치마를 확 들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안 보려 했지만 결국 그 끔찍한 장면은 기어이 내 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소녀의 옆구리 밑과 무릎 부근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리 떼가 까맣게 소녀의 하얀 뼈를 덮고 있었다. ‘우우우’는 다름 아닌 파리 떼가 소녀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파리 떼가 소녀의 다리에 알을 낳았고, 구더기가 생기고 그 구더기가 살을 파먹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난 이거야말로 생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김 목사는 자신의 손으로 구더기를 하나하나 다 잡아냈다.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손에 침을 바르기도 했다. 나도 그 광경을 눈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 손에 침을 바르고 김 목사가 하는 대로 구더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끄집어냈다. 잡으려고 할수록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소녀에게 영어로 “하우 아 유?”라고 물었지만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소녀의 허연 눈동자가 옆으로 쏠린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가련한 소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속으로 또 다시 울부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난 거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결국 두 달 뒤 죽고 말았다. 그 소녀의 죽음, 눈동자는 나에게 숱한 질문을 던졌다. 평생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인생인가. 예수님은 그 소녀의 눈을 통해 나를 보셨던 것이다. 그 소녀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진다.
사람들은 보통 날강도나 깡패, 매춘부를 싫어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들이다. 그 소녀가 나를 다른 각도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나는 힘없고 간절했던 그 소녀의 눈망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 신촌이나 서울역의 매춘부들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나의 스승이었다.
지난 30∼40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뜻을 계속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건지 조금씩 알게 됐다. 누운 채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매춘부들의 눈을 통해, 깡패들의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성경 교사들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신학교는 청계천이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9)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그리고 불편한 진실들
입력:2011-10-26 19:10
1970년대 당시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꽤 친분이 두터워져 있었다. 청계천 빈민운동에 관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제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부 진보 성향 목회자들은 신촌의 술집에 갈 때 꼭 나를 데려갔다. 내가 항상 돈을 냈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계산은 거의 내가 했다. 아마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일본은 잘 살았으니까 한국 사람들 생각에 내가 돈이 많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부담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했다.
그런데 이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 옷 속에 손을 넣는 등 목사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술집에서 놀았다. 처음엔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아주 긴장해 있으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했지만 그 후 몇 차례 그런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다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문제는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그런 장면들이 사진에 찍히고, 결국 민주화운동은 물론 생활에도 커다란 족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당시 H씨도 안기부 요원들이 쳐놓은 그 그물에 걸려 사진이 찍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H씨는 정부에 대해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
술집의 여자들은 주로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보니 그중에는 전라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술도 마실 줄 몰랐고, 더군다나 여자를 데리고 노는 법도 몰랐다. 그중 한 여자에게 서툰 한국어로 고향이 어디이고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 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고향과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까지 소상히 들려줬다. 뭐가 갖고 싶은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신발, 옷, 크림(로션)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음에 일본에 갔다 올 때 그 물건들을 사서 다시 신촌 술집에서 그 여자를 만나 전해줬다. 그 여자는 무척 기뻐했다. 나는 한국어가 서툴었기에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반드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라. 그리고 하루빨리 이 직업을 버리고 보람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해줬다.
내가 매춘부 여성들을 노리개로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대할 수 있었던 데는 청계천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청계천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그곳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희망이 있고, 오순도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정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천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서울의 대형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봤고, 빌리 그레이엄 집회에도 참석했었다. 물론 그곳도 천국의 한 모형이다. 하지만 청계천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훌륭한 천국의 모형이었다. 그것은 매춘부, 깡패들마저 위대한 천국 시민들로 보게 했다.
교회는 건물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안아주고 도와준다면 그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사랑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돼 있다. 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청계천에서 본 교회, 청계천에서 목격한 천국의 모형이다. 천국의 지상(地上) 샘플이 바로 청계천이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0) 남산 안기부 요원들 “당신, 간첩 아닙니까?”
입력:2011-10-27 20:46
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간첩으로 오인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메라와 필름을 잔뜩 가지고 입국한 뒤 청계천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마구 찍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국에 카메라도 필름도 흔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인지 내 뒤에는 항상 ‘남산 사람’(중앙정보부 요원)이 따라붙었다. 필름 소유 상한선은 10통이었다. 10통이 넘으면 남산 사람이 뺏어갔다. 그러면서 남산 사람은 내가 입국할 때마다 위스키, 크림 등을 달라고 했다. 때로는 TV까지 갖다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예전 일본 경찰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일제의 속죄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돕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남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기에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의구심은 버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군목 중에 동경신학대 대학원 출신이 한 명 있었다. 한국의 육군 보안사는 그 사람이 북한 공작원 여자에게 넘어갔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보안사는 그 사람과 관련해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목사에겐 부인과 딸이 2명 있었다. 나는 보안사 요원들을 만나 한 호텔에서 24시간 꼬박 조사를 받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족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사를 받으며 엄청난 협박 속에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한국을 계속 도울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밀려왔다. 그 위협과 회의감 앞에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에 대한 속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있는 동안 주로 호텔에 머물렀다. 당시는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었다. 자정이 약간 지났을 때 누군가 호텔 방문을 노크했다. 누군가 싶어 문을 여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방으로 쑥 들어왔다. 당시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 ‘기생파티’가 유행이었다. 한 번에 수백명씩 대한항공을 타고 한국으로 와서 술집 여자들과 놀고 가는 게 유행이었다. 아마 그 여자는 나도 그런 일본인 중의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깜짝 놀라 호텔 1층 프런트로 내려갔다. 모르는 여자가 내 방에 왔으니 당장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호텔 직원은 웃으면서 “그 여자는 당신의 한국어회화 선생이다”라고 얘기했다. 기가 막혔다. 밤 12시가 넘었으니 쫓아낼 수도 없었다. 여자는 샤워를 하고 나더니 “안녕”이라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돈과 여권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여자 문제로 발목이 잡힌 민주화 인사들 생각도 났다. 그 여자는 나중에 내게 “당신, 남자 맞습니까?”라고 화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호텔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자는 동안 그 여자는 큰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나는 그 여자에게 돈을 주기에 앞서 붙잡고 몇 마디 했다. “나는 당신을 꾸짖을 수가 없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라.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실 것이다.” 이런 일은 나중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그러면서 나는 그것이 남한 정보기관의 올가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악마의 유혹은 계속됐지만 나는 그 유혹에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1) 미국 추방… 그리고 태평양 건너까지 온 감시의 눈길
입력:2011-10-30 19:05

나의 고난은 엉뚱한 데서 시작됐다. 어머니 가츠코는 소비자운동을 하며 미국과 중국, 소련의 초청을 받아 갈 만큼 이름이 알려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우리 가족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미국 입장에서는 나를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미국 유학 시절, 어느 날부터 기숙사 뒷문 입구에 자동차가 멈춰서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어김이 없었다. 어느 날은 이민국에서 나를 불렀다. 외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며 나를 ‘위험인물’이라고 했다. 추방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FBI 요원이 찾아와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추방되는 게 불쌍하다. 만약 원한다면 일본으로 잘 보내주겠다”고 했다. 난 거절했다. 그리고 내 돈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그리고 11년이나 나를 기다려준 아내 요리코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날인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쳤다. 모르는 백인이었다. “네 친구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하는 그 말뜻을 그때는 몰랐다.
그 후부터 내게는 당근과 채찍이 번갈아 기다렸다. 매일같이 편지가 왔다. 하지만 상대방 주소가 없었다. 편지 내용은 ‘요코하마역 북쪽 출구에서 구두를 닦고 있으세요’라고 되어 있었다. 요리코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친구가 있어서 다녀와야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편지대로 그 위치에서 구두를 닦고 있으니 옆에 앉은 사람이 ‘앞에 커피숍으로’라고 얘기한 뒤 사라졌다. 커피숍에 들어가면 누군가 ‘호텔 몇 호실’ 하고 말을 건넨 뒤 나갔다. 완전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호텔에서 사람을 만나 나눈 이야기는 별 내용이 없었다. 그것은 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 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은 반복됐다. 어느 날은 ‘만약 우리에게 협력해준다면 J F 케네디의 이름으로 미국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명서를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 신세와 같았다. 나는 당시 바닷가 어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한 요원이 이렇게 말했다. “이 바다는 참 조용하고 깨끗하군요. 그런데 만약 이 잔잔한 바다에 노무라씨의 시체가 떠 있는 것을 부인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가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968년 7월경,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여름수양회 강의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쿄 근처에서 갑자기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내 차 옆을 치고 도망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교통사고였다. 그때 당한 중상으로 지금도 옆구리에서 등까지 꿰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병원에 있었는데 또 다시 편지가 왔다. 가마쿠라 역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도쿄에 입원해 있던 나는 도저히 차로 4시간 거리의 가마쿠라까지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요리코를 보냈다. 손에다가는 영어로 된 큰 글씨를 들려줬다. ‘I am Nomura's wife. Nomura is at a hospital now(나는 노무라의 부인입니다. 노무라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요리코는 그 종이를 든 채 가마쿠라역 앞에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더 이상 어떤 연락도 없었고,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미국은 나를 베트남전 스파이로 보내기 위해 무지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1970년대 이후엔 한국의 국군 보안사령부가 나를 감시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2) 손님 7만5000명에 음식 대접한 아내 요리코
<2011.10.31 17:54,
국민일보>

나에겐 고난도 있었지만 감사한 일이 훨씬 많았다.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신앙과 사회적 실천을 전수받은 것, 한국 친구를 통해 한국을 알고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내 요리코를 만난 것이다. 요리코가 없었다면 청계천 빈민운동이나 지금의 사역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내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떠한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는 법 없이 항상 긍정적이었다. 아내가 가진 내면의 힘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요리코는 지금까지 1973년과 75년, 2006년, 2010년 모두 네 번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어떤 상대든지 따뜻하게 맞았다. 비판하거나 편견이 일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서는 분개해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요리코 때문이다. 그녀의 포용력 때문에 나 역시 다양한 한국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됐다. 지금 나는 빚도 없고 저금한 것도 없지만 매일매일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개해주신 아내 때문이다. 아내의 지원과 기도가 있었기에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 수 있었고, 피곤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요리코는 1933년 4월 16일 태어났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 교회에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점령군 대장이었던 맥아더의 요청으로 2000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왔다. 나는 그때 학생으로서 그 선교사를 도와 집집마다 교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돌렸다. 그때 요리코의 가정을 방문하게 됐다. 요리코도 교회에 나왔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됐다. 요리코는 어릴 적부터 인내심이 많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나의 미국 유학 기간인 11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요리에 재주가 많았다. 어렴풋이 계산해보니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온 손님 7만5000명에게 그녀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내가 비올라대학에 있을 때 도쿄의 요리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아내는 곧이곧대로 내 말을 따랐다. 그 뒤로 그녀는 어느 누가 우리 집을 방문하더라도, 또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우리 형편에 맞게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고 긍정적이었다. 내가 일본과 한국에서 사역할 때도 결코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할지라도 그녀는 전심으로 내가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뭐가 이상한가’라는 반응이다. 남편이 바늘이고 아내는 재봉실이니까 남편이 하는 일을 따르는 게 뭐가 대수냐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졌을 때 도쿄의 많은 초등학생들이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종의 피난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나도 그때 지금 살고 있는 야마나시현으로 강제 이주 조치됐다. 야마나시현은 쌀 생산이 적은 고장이었다. 당연히 굶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농가의 젊은 부부가 자기 집 그늘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와 요리코의 마음속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텄던 것 같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3) “예수의 방식을 좇자” 50여년 가정교회 고집 <2011.11.01 17:49,
국민일보>

1961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나는 너무나 미국화돼 있는 일본교회에 크게 실망했다. 나중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교회나 일본교회의 모델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정교회 형태로 목회하고 있다.
내가 해발 1050m의 야마나시현 산골로 오게 된 이유는 이렇다. 난 50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요청에 한번도 ‘No’라고 한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의 눈물, 그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사기도 당했지만 차마 ‘No’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다. 1980년대 중반, 난 도쿄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다. 나는 ‘빚이 있는데 어머니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선뜻 허락하셨다. 막상 어머니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나니 내가 살 집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도쿄의 집값은 너무나 비쌌다. 앞길이 막막해 한숨만 나왔다. 한 선배 목사가 ‘야마나시현에 땅을 팔려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했다. 도쿄와 비교해보니 너무나 저렴했다. 집회할 수 있는 장소와 게스트룸, 지하엔 세례용 풀장도 만들었다. 건축 중에 돈이 모자라 아내가 할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려 충당했다. 나는 ‘비록 산골이긴 하지만 요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집을 짓고 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교인은 매주 10명 미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여기서 25년 가정교회를 해오는 동안 3000여명이 다녀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교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도쿄의 가정교회에서 목회할 때 3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다. 비록 조그만 집이었지만 지하엔 세례 장(場)을 갖추고 있었다. 1960년대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직업을 찾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YMCA 야간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그들을 우리 가정교회에 초청했고, 아내 요리코는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이 모여들면서 우리 집은 마치 벌집 모양의 젊은이 쉼터로 바뀌었다.
1985년, 이곳으로 이전한 뒤에도 우린 가정교회를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이 동네엔 외딴 산악지역이기에 크리스천이 많지 않다. 겨울엔 한두 명 오는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여름엔 10∼15명 정도 참석하는 ‘대규모’ 예배가 된다. 우리 부부는 가정교회에 오는 그 어떤 사람도 배척하지 않는다.
주일예배는 이렇게 드린다. 처음 30분간은 찬양을 부른다. 나는 매주 한두 곡의 새 찬송가를 그 배경과 함께 소개한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에 가기 전에 적어도 500곡 이상의 찬송을 가르치는 게 목표다. 30분간은 성경공부를 한다. 성경공부는 질문하고 답변하는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모임인지 모른다. 우리는 또 매주 성만찬 교제를 나눈다.
예배가 끝나면 요리코가 맛난 음식을 내온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우리는 크리스천의 사랑과 희망을 주제로 삶을 나눈다. 나는 매주 성경공부를 위해 6∼8쪽 소식지를 만든다. 이 소식지는 일본 내 친구들한테도 보낸다. 발송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난 이 소식지를 보낼 때마다 마치 성경을 보내는 것처럼 행복해진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4) ‘별종’ 목사, 절대 가까이 해선 안될 이를 품다
<2011.11.02 18:00,
국민일보>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 산골 마을은 700년 전에 형성된 곳이다. 외지 사람에 대해 무척 배타적인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공회당 같은 곳에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기독교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어린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 등교를 시키고 사탕도 나눠 줬다. 매주 노인들을 초청해 서양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동네에서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거나, 먹이가 없어 산에서
내려오는 너구리, 사슴, 여우에게도 먹을 것을 줬다. 사람들은 차츰 나를 ‘별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기요토시 사카모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을 외딴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데다가 영양실조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배회했다. 마을 사람들은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하지만 난 직관적으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 기요토시는 성경의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초등학교 때 사별했다. 어릴 적부터
홀로 돼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왕따를 당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나는
기요토시에게 다가갔다. 의사에게 데려가 그의 피부병을 진단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식사도 함께했다. 아내와 나는 피부병이 옮아 심한
고생도 해야 했다. 그렇게 7년간 교제를 해오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술을 끊었다. 몇 년 후엔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갖다 버리는 냉장고나 TV, 세탁기 등을 가져와서 부품을 떼어다 팔았다. 기요토시와 함께 내 차에 부품을 싣고 팔러
다녔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엔 TV, 냉장고 등이 마당에 산더미를 이룰 정도였다. 이 사람도 처음엔 나를 ‘별종’이라고 여겼다. 호칭이
‘사장님’ ‘선생님’으로 차츰 바뀌더니 나중엔 ‘어이’ 하는 사이가 됐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친구는 내 권유로 저금도 하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다. 교회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차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4월 중순, 아침 6시에 일어나 개를 데리고 골목 입구에 신문을 가지러 갔을 때다. 기요토시가 판잣집 옆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어이’
하고 부르며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기척이 없었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26년간 나와 가장 친밀했던
최고의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온 기요토시가 자신의 몸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피부병으로 온몸이 벌겋게 돼
있었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온몸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끔찍했다. 나는 청계천 빈민가에서도 그런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요토시가 항상 지옥 같은 곳에서 혼자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늘 기요토시 옆에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요토시가 틀림없이 지금쯤 예수님 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리라 믿는다. 거기서 알코올이 아닌
포도주를 마시며 자신이 겪은 고생을 위로받고 있으리라.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건 가난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 사회의 다수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 편에 서 계셨다. 내가 평생 섬겨온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나는 평생 그런 예수님을 섬기는 특권을 누려왔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5·끝) 한국교회 향한 두가지 기도 ‘日 사죄’ ‘초심으로…’ <2011.11.03 17:26,
국민일보>

내가 살고 있는 야마나시현 고후시(市)의 하늘은 일본과 한국을 왕복하는 비행기 항로다. 나는 매일 서울행 비행기를 바라보며 남북한을 그리워한다. 북한을 생각하는 이유는 북한 내 어린이들이 굶주림이라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한번도 갖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다면 독일의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찾아가 당장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우라고 하고 싶다. 그들은 1970∼80년대 20년간 남한의 어린이 2000명에게 매일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후원했던 신실한 친구들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나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제목은 두 가지다. 우선 과거 일본 정부의 범죄를 용서해 달라고 겸손히 요청하고 싶다. 용서 없이는 화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범한 국가적 범죄,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잔학한 행위였다. 일본의 역대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국가 범죄에 대해 한번도 진지한 자세로 사죄한 적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한국인의 분노를 촉발했다. 나와 아내가, 그리고 자식들이 지난 수십년간 한국인을 위해 봉사했고, 또 봉사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남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이 일본을 용서해주기 바라는 염원에서다. 화해는 사죄와 용서가 정당하게 만날 때만 가능하다. 아직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사죄가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또 하나의 바람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찾았던 1960∼70년대 청계천은 비록 교회 건물도 없고, 조직도 없지만 성령이 살아서 역사했다. 목사는 평신도와 구분 없이 그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 나갔다. 사람들은 가난이나 핍박을 겁내지 않았다. 서로 간에 정과 사랑이 흘러넘쳤다. 그곳은 나에게 살아 있는 신학교였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가능한 큰 교회당을 지으려고 한다. 가운을 입은 목사가 큰 설교단에서 목에 힘을 준 채 설교하는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게 현실이다. 유교의 잘못된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의 게토화를 초래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건물을 짓는 데 믿음과 기도, 재정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교적인 자기만족일 뿐이다. 오히려 그 믿음과 재정을 이용해 파키스탄이나 아프리카처럼 전쟁과 질병 속에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한국교회 모습대로 가지 않으려는 상식 있는 크리스천들이 한국 내에 많다는 것을 보며 나는 한국교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갖고 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지만 반대로 보면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다. 이것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오늘날 동북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어서 한국에 뼈를 묻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이 한국에 기반을 둬왔고, 한국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어디라도 좋다. 한국 땅에 묻힐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나 같은 시골의 무명 노인을 한국의 국민일보에서 자세하게 소개해준 데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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