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와 주인 간에 존비의 구분도 없고(마 12: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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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주인 간에 존비의 구분도 없고(마 12:46-50)
다산 정약용은 1795년 7월 주문모 신부 건으로 금정찰방으로 좌천된바가 있습니다(29일 금정에 도착). 이 무렵 청양군 금정은 물론이고 홍성군과 예산군 일대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다음은 <수기(隨記)>(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이 1791년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 모음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99) 1792년 1월 3일자 별지의 실린 내용입니다.
대저 이 술법을 하는 자는 서로 교중(交中)이라 부르며 노비와 주인 간에 존비의 구분도 없고 멀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 친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양반가의 규수는 언문으로 풀이하여 읽고, 상천(常賤, 상인과 천인)의 어리석은 부녀자는 입으로 전해 외웁니다. 늙고 젊거나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일단 이 술법에 빠지면 미혹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시험 삼아 양반가의 규수로 말하자면, 가령 길 가는 사람이 제 입으로 그 학문을 하는 자라고 말하면 그의 성명과 거주지를 묻지 않고 그가 양반인지 상한(常漢, 상놈)인지 따지지 않고 모두 안방에서 만나보기를 허락하며 중요한 손님처럼 공경하고 가까운 친척처럼 아낍니다. 거처와 음식도 달건 쓰건 함께하는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를 줍니다.
이 같은 증언은 인간을 구원하는 지혜와 능력이 그리스도교 복음에 있음을 웅변(雄辯)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찢기신 것은 ‘휘장’으로 상징된 모든 장벽이 허물어진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조선 가톨릭신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삶에서 인종의 벽, 남녀의 벽, 신분의 벽, 계급의 벽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렸고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뜻을 제대로 실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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