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13강]제3장 자유권
본문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3장 자유권
자유!
자유하기를 바라는 욕망보다 인간의 마음에서 더 크게 불타는 욕망은 없다. 그렇지만 많은 종류의 자유가 있다. 어떤 것들은 죄스럽고 파괴적이며, 어떤 것들은 선하고 본질적이다.
모든 것 중에서 최상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과로써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바울은 덧붙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번 장(章)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以信稱義)의 복음진리에 근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1. 거짓 자유들
우리시대의 자유에 관한 큰 강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립되는 방식에서 자유를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들 중에서 최악은 절대자율의 추구이다(즉, 자기결정권).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포함해서 모든 외부적인 권위로부터 자유하려는 욕망이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의 기준들을 세우며, 그가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되는 권리를 요구한다.
A. 절대자유
이것은 사단이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브를 꼬드겼던 그런 종류의 자유이다(창 3:1ff). 이것은 펩시콜라가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로 판매를 촉진하는 그런 종류의 자유이다.
사방에 어떤 느낌이 있다.
그것은 미국의 소리이다,
펩시인들: 자유로운 느낌!
새 길을 택할 자유로운 느낌,
너는 너, 나는 나일 거라고
일어서 말할 자유로운 느낌.
특히 젊은 세대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도록 의도한 종류의 자유라고 자신들에게 확신시켜왔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자유로운 도덕적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다는 것을 오직 의미한다. 하나님 한분만이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계시다. 사람이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데 자유롭다고 생각하면, 그는 거짓 자유의 환영(幻影)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자유는 진실로 잘못되고 파괴적이다. 그것은 정말로 전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정말로 해방할 수 있다는 개념, 즉 거짓 개념의 속박이다. 그런 사이비 자유는 지옥에 떨어질 영원한 유죄판결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자들은 이 죄스런 자율을 틀림없이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조차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성격에 관하여 약간의 심각한 오해들이 있다.
B. 불복종할 자유
한 가지 거짓 개념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명령들에 복종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심각한 형태로써 이것은 순수한 도덕률 폐기론을 낳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율법들에도 복종할 의무가 전혀 없다고 가르쳐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이름으로 모든, 즉 모든 종류의 부끄러운 행동을 옹호해왔거나 허용해왔다. 결국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물론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거짓된 개념이다. (본서의 7-8장을 보시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 가장(假裝)한 그런 방종을 바르게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행하여지는 좀 더 미묘한 방종, 즉 절반 자율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 자비 정의와 같은 가장 중요한 것들에서 신실하다면, 우리가 더 작은 의무들과 더 사소한 규정들은 무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 같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회사의 임금대장을 결코 훔치지는 않겠지만, 집에서 쓸 목적으로 회사의 스크루드라이버 한 개나 종이클립 한 갑을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주의 만찬에 빠질 생각을 결코 하지 않겠지만, 주차법률들과 속도법률들을, 만약 그 같은 것들이 불편하다면, 복종할 어떤 의무감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걱정해야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군가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규정들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율법의 사소한 것들에 그들의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율법의 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을 무시한”(마 23:23) 바리새인들을 예수께서 정죄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이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할 사항이 아니며, 사람은 작고 큰 의무들 모두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즉시 보이신다. “너희들은 전자를 게을리 함이 없이 후자도 실천했어야 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마 23:23).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규정들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시정지 표시들, 저작권법들, 세법들 모두를 그리스도인은 따라야한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종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바르게 되기 위해서 율법준수에 의존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거짓된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단순히 구약율법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큰 부분에 있어서 사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다. 만약에 누군가가 이것을 초점으로 삼는다면, 그는 십중팔구 율법에서의 자유가 갖는 실제적인 요점을 놓치게 될 것이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자유 속에 핵심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해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그것은 율법에 복종할 의무로부터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구약형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자유는 이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
A. 유죄판결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몇 가지 면에서 율법으로부터 정말 자유하다.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유죄판결로부터 자유하다.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2장을 보시오) 율법을 깬 결과, 이를테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죄인(우리들 모두)은 율법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유죄판결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즉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유죄판결을 받으셨다는 이 진술은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은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이 위대한 자유가 다음의 찬송가에서 표현되고 있다.
율법에서 자유롭다. 오, 행복한 상태,
예수께서 피 흘리셨다. 거기에 죄 사함이 있다.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쓰러져 상처를 입으셨다.
은혜가 우리를 단번에 구속하였다.
이제 우리는 자유하다 - 어떤 정죄도 없다,
예수께서 완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내게로 오라,” 오 그분의 부드러운 부르심을 들으라.
오라.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단번에 구원하신다.
B. 율법준수의존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유가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의롭다하심의 수단으로써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율법의 대안으로써 은혜의 방법을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 구원이 우리가 얼마나 잘 율법에 복종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자신의 나날의 복종이 자기가 하나님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기나 절망의 희생물이다. 만약에 자기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데 충분히 선하다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율법주의자는 자기를 하나님께 바르게 유지하려고 자신의 율법준수에 의존하는 그런 사람이다.
반면에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선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는 아직 자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복음의 영광(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은 그것이 자기기만과 좌절 모두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바르게 됨의 수단으로써의 율법(즉, 율법준수)으로부터 자유롭다. 로마서 10장 4절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KJV).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선할 수 없지만, 그것을 또한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C. 율법주의의 동기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최종적인 측면은 우리들에게 복종하도록 - 그러지 않았다간 혼난다. - 강요하는 엄한 주인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단순히 하고 싶기 때문에 율법에 복종할 수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종에 대한 율법주의의 동기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위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종종 큰 노력을 요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멍에를 메는 것으로,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수하는 것으로, 전투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밖에 지루한 운동으로써 기술한다.
왜 누구나 그렇게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는가? 왜 우리는 선행을 견인(堅忍)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에게 동기를 주는가?
율법 아래서 생활할 때 사람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갈망이란 두 가지 동기들에 의해서 쫓긴다. 모든 것이 개인적인 복종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 복종해야만 하거나 보상을 얻기 위해서 복종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에게 행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을 실제로는 싫어할 테지만, 마치 무뚝뚝한 노예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를 피하려고 그것들을 행한다.
그 같은 동기는 자기중심적이다.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고 묻는다. 그것은 돈을 보고하는 결혼과 같다. 그렇게 동기화된 사람은 구세주보다는 오히려 구원을 사랑한다.
선행에 대한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감사가 담긴 사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요 14:15).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에 자극된 수고”이다(살전 1:3). 문제가 되는 단 한 가지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KJV)뿐이라고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그것 전부를 요약해서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람은 믿음 즉 역사하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왜 그것은 역사하는가? 사랑 때문에 즉 가장 강한 가능한 동기, 사심이 전혀 없는 동기, 그리스도 중심과 이웃 중심의 동기 때문이다.
요점은 은혜와 은혜만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여 오로지 사랑으로 복종하게 한다는 것이다. 은혜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하여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지불하셨으므로 그분께서 지불하신 것에다 우리가 덧붙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은혜 아래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8). 그러므로 우리의 의롭다하심(稱義)이 믿음으로 보증된다면, 우리는 사심이 없고 감사가 넘치는 사랑으로 행하고 복종하는데 자유롭다.
3. 선행: 그것들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순종행위의 성격을 이해하기에 이르면, 우리는 참 자유를 경험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권고하시고 요구하시는 일종의 지불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신 구세주께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표시하는 방법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행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고, 행위에 대한 거짓 견해, 즉 믿음으로 의롭다하심(以信稱義)이 행위로 획득된다는 어리석은 추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믿음은 우리의 양심을 구원하고, 고치며, 그리고 보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행위가 없을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 되지만, 의로움이 행위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Christian Liberty, Fortress Press, 1967, pp.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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