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사귐14: 하나님은 사랑(3)(요일 5:1-8)
본문
하나님과의 사귐14: 하나님은 사랑(3)(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에서 “난 자” 혹은 “낳으신”은 헬라어 ‘gegenn?tai’(has been born, “난
자”), ‘genn?santa’(having begotten, “낳으신”), ‘gegenn?menon’(having been begotten,
“난 자”)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낳은”(begotten)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성이 잉태하여 낳은 자녀를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나온 자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독생자’(only begotten Son, 요 3:16)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드셨다’(created)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다’(God became the Father of Jesus)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에는 자연(육체)적 출산의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영적 출산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출현을 ‘발생’(generation), 성령님의 출현을 ‘발출’(process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시작된 적이 없고 끝도 없으시다. 따라서 발생의 의미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난 자” 곧 ‘하나님이 영원히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이다. 또 발출의 의미는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proceeding) 분이시다는 뜻이다(요 15:26).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다”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님으로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들이란 뜻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29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에 연결된다. 또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에 연결된다.
‘외아들’과 ‘맏아들’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외아들’은 아버지가 낳으신 자식이 하나뿐이란 뜻이고, ‘맏아들’은 아버지가 낳으신 자식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첫 소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엄청난 선언을 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대 선언이다. 로마서 8장 15-16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했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였다. 또 갈라디아서 3장 26절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였고, 에베소서 1장 5절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본문 1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고 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가족애를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가족이 그러하듯이, 아버지가 낳으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안다.”는 세 가지 사랑의 일체를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라”(요 13:34, 15:12)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일체임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같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같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계명들을 억지로
지키면 짐이 되지만, 사랑으로 지키면 짐이 되지 않는다.
4절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는 요한복음 16장 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에 연결된다. 이런 이유로 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기는 것은 그분의 군대가 이기는 것이고,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군사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이기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이기신, 무덤을 이기신,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적장과 적군을 모두 무너뜨리시고 개선장군이 되셨고, 월계관을 받아쓰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군사들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분과 함께 최후의 승리자가 되고, 월계관을 받아쓰게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전투를 앞두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였고, 꿈에 “이 표식<그리스도의 첫 두 글자 X(Ch)와 P(r)를 겹쳐놓은 표식>으로 너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는 환상을 보았으며, 이 표식을 자기 군대의 군기(라바룸)와 병사들의 방패에 새긴 후 전투에 임함으로써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정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리스도 때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 표식으로 승리자가 될 것이다”라는 문구는 주후 350년 베트라니오 황제의 주화에 새겨짐으로써 로마제국내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에도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성령과 물과 피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과 복음으로 만왕의 왕(Ihsus Xristus
Basileus Basile?n) 승리자(Nika)가 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지존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주가 되신
것은 세속적 권력과 권세로 된 것이 아니고, 자기희생과 자기권한의 제한과 사람들과 같이 되신 동일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고 성취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가 되었으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6-8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다.”는 요한복음 19장 34-35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에 연결된다.
요한은 복음서와 서신에서 적그리스도요 거짓 교사들인 영지주의 경향을 띤 유대인 에비온파의 ‘다른 교훈’ 곧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려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 성육신, 동정녀 탄생 등을 부인하였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창 찔림으로 “물과 피”를 쏟으셨고(요 19:34-35),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셨으며”(요 19:26),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하셨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셨다.”(요 19:30)는 점을 부각시켰다. 또 요한은 이를 본 자의 증언이 참이라고 하였는데, 그 증언은 진리이신 성령님의 증언과 일치하였다. 이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때부터 오늘날의 가톨릭미사에 이르기까지 주의 만찬 때 포도주에 물을 섞어왔다.
또 물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받으신 침례에, 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에 연결된다. 침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임직한 기름부음이었고, 피 흘리심은 인류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는 대제사장직 수행이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셨고,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님이 임하셨으며 동거하셨다(막 1:9-12). 이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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