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사귐13: 하나님은 사랑(2)(요일 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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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사귐13: 하나님은 사랑(2)(요일 4:11-21)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에서 “이같이”는 9절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서 “이렇게”에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와 “이같이”에는
9-10절에서 언급된 네 가지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을 말한다. 첫 번째 특징은 9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자기 제한의 사랑
곧 당신의 권리와 자유를 우리를 위해서 제한하시는 사랑을 말한다. 두 번째 특징은 9절 독생자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신” 헌신적 사랑을
말한다. 세 번째 특징은 10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먼저 사랑 혹은 내리 사랑을 말한다. 네 번째
특징은 10절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희생적 사랑을 말한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는 조건적인 사랑 또는 타율적 사랑으로 오독되기 쉬운 구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하고 서로 사랑해야한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감동되면 하고, 감동이 없으면 안 해도 되는 조건적인 또는 타율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하는 계명이다. 조건에 상관없이, 감동이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진해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억지로라도 반드시 지켜야하는 하나님의 규범이다. 이 하나님의 규범을 무조건으로 따르는 것이, 철학자 칸트의 의견을 빌리자면, 순수한 것이고, 자율적인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정언적(categorical)인 것이다. 반면에 조건적인 사랑은 불순한 것이고, 조건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율적인 것이다. 조건적으로 계산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언적(hypothetic)인 것이다. 정언적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값없이, 은혜로, 먼저,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우리를 당신의 나라의 백성 삼으시려고,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제한으로, 자발적 희생으로, 자발적 헌신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시고 목적으로 삼으신다는 뜻이고, 정언적 사랑이란 뜻이다. 반면에 가언적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이용하며 착취하는 ‘사랑하는 척하는’ 가짜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하나님이신 것은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인들에 따르면, 이 사랑은 ‘감춰진 일자’ ‘아인 소프’(En Sof)이신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발산)된 열 가지 ‘세피롯’(Sefirot) 곧 하나님의 ‘쉐키나’(Shekhinah)들 혹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네 번째 것인 ‘헤세드’(Hesed)에 해당된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아인 소프가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속성 혹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라 말할 수 있는 열 개의 세피롯을 담는 그릇이었다고 말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이 열 개의 세피롯을 아담과 이브가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세피롯의 상위 세 개 곧 왕관(Keter 케테르), 지혜(Chokhmah, 호크마), 이해(Binah, 비나)는 부분적으로 깨졌고, 나머지 일곱 개 곧 사랑(Chesed, 헤세드), 능력(Geburah, 게브라), 영광(Tiferet, 티페레트), 승리(Netzach, 네짜흐), 존귀(Hod, 호드), 기초(Yesod, 예소드) 그리고 나라(Malkut, 말쿠트)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고 말한다(대상 29:11). 유대인들은 이를 원상회복시키는 일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책무를 완수하여 세피롯 곧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보지를 못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세피롯 곧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회복되어 우리 안에 있게 되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세피롯 곧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가 된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속성이 곧 성령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들(고전 12:7-11)과 성령의 열매들(갈 5:22-23)이 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세피롯과도 피차 연결된다. 그러므로 14-15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고린도전서 2장 10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와 12장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와 연결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16-21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앞서 말한 사랑에 관한 말씀들의 요약이자 반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 이렇게 되면, 그는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고, 오히려 담대함을 갖게 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신뢰와 믿음이 있고,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이나 불안이나 의심이나 미움이나 질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시는데,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사람을 미워하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19-21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의 뜻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에서 사람은 이런 저런 근심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음으로써 살아간다고 하였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일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뿔뿔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려 주시지 않았고, 인간이 하나로 뭉쳐 사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지, 정말은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으며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 속에 사는 사람 곧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을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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