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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 산 돌09: 교회(4)(벧전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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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424 2021.01.29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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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 산 돌09: 교회(4)(벧전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gallic_captives.jpg베드로는 18-25절에서 이사야 53장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Daily Study Bible> 베드로전서 2장 18-25절 부분에서 로마시대의 노예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놓고 있다. 필자도 로마시대의 노예들에 대해서 여러 차례 소개한바가 있는데, 그 내용들과 같은 것도 있고 약간 다른 것도 있어서 그의 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왔다. 다음은 그의 글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로마제국에는 *육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고(*필자 주: 전체인구가 6천만 명이었고, 노예는 15퍼센트인 9백만 명이었다), 노예제도는 로마의 정복전쟁들에서 시작되었다. 노예들은 원래 주로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이었다. 로마 초기에는 노예가 거의 없었으나, 신약시대에는 백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노예가 단순히 천한 직종에만 종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의사들, 교사들, 음악가들, 배우들, 비서들, 청지기들이 노예들이었다. 실제로 로마에서의 일들은 모두 노예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로마인들의 태도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일을 하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노예들에게나 맡기고 시민들은 욕망이 지시하는 대로 느긋하게 살게 하라는 태도였다. 노예공급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노예들에게 결혼이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동거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었다. 그것은 마치 새끼 양이 자기를 낳은 어미양의 것이 되지 못하고 양떼의 주인의 것이 되는 것과 같았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judaea_capta2.jpg노예들의 운명이 항상 비참했고 불행했다거나 항상 잔인하게 취급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 수 있다. 상당수의 노예들이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의 중대하고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전체 상황을 지배하였다. 로마법에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노예에게는 그 어떤 법적 권리도 결단코 없었다. 그 같은 이유 때문에 노예에 관한한 공정과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무 생명체를 향한 우정이나 정의가 있을 수 없다. 진실로 말이나 소를 향한 것도 그렇고, 심지어 노예로서 노예를 향한 것에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주인과 노예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무 생명체인 도구가 그렇듯이 노예도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기술하였다. 바로(Varro)는 농기구들을 세 종류 곧 말이 분명한 것들, 말이 불분명한 것들, 말을 못하는 것들로 분류하면서 “말이 분명한 것들에는 노예들이 포함되고, 말이 불분명한 것들에는 가축이 포함된다. 그리고 말을 못하는 것들에는 농기구들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노예와 가축과 농기구사이에 유일하게 다른 점은 노예가 우연찮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페테르 크뤼솔로구스(Peter Chrysologus)는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주인이 노예에 대하여 부당하게 행하든, 화가 나서 행하든, 의도적으로 행하든, 의도치 않게 행하든, 잊어버리고 행하든, 심사숙고 후 행하든, 알고서 행하든, 모르고서 행하든, 그것은 심판이고, 정의이며, 법이다.” 노예에 관한한 주인의 뜻은 심지어 주인의 변덕까지도 유일무이한 법이었다.

노예의 삶에서 불변의 진실은, 비록 노예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노예는 여전히 하나의 물건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의 기본권들조차 갖지 못했고, 노예에게는 정의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그리스도교가 이 상황 속으로 들어왔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는 사회적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다. 가장 초기의 로마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칼리스투스(Callistus)는 노예였다. 또 귀족이었던 페르페투아(Perpetua, *필자 주: 젖먹이와 함께 수감됐던 20대 북아프리카의 귀족여성, AD 202)와 노예 소녀였던 펠리키타스(Felicitas *옥중에서 딸을 출산)가 손을 잡고 순교를 당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대다수는 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다수가 노예였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회중의 회장이 되고, 주인이 그 회중의 교인이 되는 것이 꽤 가능했다. 이것은 새롭고 혁명적인 상황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는 영광도 있었고, 위험도 있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노예에게 착하고 충실한 노예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두 가지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judaea_capta3.jpg첫째,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노예가 이 새로운 관계를 이용하거나 자기와 자기 주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일을 태만히 한 것을 변명할 위험이 생겼다. 그 상황이 결코 끝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주인의 선의를 기회로 삼거나 그들과 그들의 고용주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징계와 처벌을 면해줄 권리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주 분명하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사이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철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다른 누구보다 더 훌륭한 일군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교는 징계 면제 요구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자기-수양을 쌓게 할 뿐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둘째, 그리스도교가 노예에게 가져다 준 새로운 존엄성 때문에 노예가 반역하거나 노예제도를 철폐시키려할 위험이 있었다. 학생들 중에는 신약성경저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거나 심지어 그 많은 말들 가운데서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해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노예들이 주인에 대항하여 분기하도록 장려했다면 재앙은 빠르게 닥쳤을 것이다. 이전에 그 같은 반란들이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신속하고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어쨌든 그 같은 가르침은 단지 그리스도교가 전복(뒤엎어버리는) 종교라는 평판을 얻게 했을 것이다. 일들에는 신속히 이뤄질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상황들에는 마치 누룩이 퍼지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듯이 서두름이 오히려 원하는 성취를 가장 확실히 지연시키는 상황들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누룩은 노예제도 철폐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지기까지 수 세대에 걸쳐 세상 속에서 작용해야 했다. 베드로의 관심은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자신들을 불만을 품은 반역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직하게 매일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영감을 얻은 노동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줘야한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가끔씩 일어나곤 하지만, 당장 바뀔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할 때,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것이고, 누룩이 다 퍼질 때까지 바뀔 수없는 상황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상은 윌리엄 바클레이의 <Daily Study Bible> 베드로전서 2장 18-25절의 주석 가운데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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