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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12: 말씀을 들음과 행함(4)(약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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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734 2020.12.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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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12: 말씀을 들음과 행함(4)(약 2:8-13)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james_ch2v1.jpg8-9절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야고보는 최고의 법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도 최고의 법을 ‘사랑’이라고 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셨다(마 22:35-40, 막 12:28-31).

십계명은 두 개의 계명으로 압축 된다. 제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제5-10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것을 ‘죄’라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한 것을 ‘허물’이라 일컫는다. 대체로 속죄제(贖罪祭)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바쳤고, 속건제(贖愆祭, 愆=허물)는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한 허물을 사함받기 위해서 바쳤다.

유대교인들은 모세오경에 613개의 계명이 담겼다고 말한다. 이들 중 248개는 ‘~하라’는 계명들이고, 나머지 365개는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라고 한다. ‘~하라’는 248개(유대교인들은 남성의 뼈마디 숫자가 248개라고 말한다.)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죄’이고, ‘~하지 말라’는 365개(한 해의 총 날 수)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허물’이다. 그리고 이들 613개의 계명들을 압축한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결국 하나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안 된다는 점이다. 또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점은 신구약성경이 동일하다.

james_ch2v1-4.jpg시편 41장 1절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실 것이다.”고 했고, 113장 7-8절은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신다.”(삼상 2:8)고 했으며, 잠언 17장 5절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라고 하였다. 반면에 잠언 19장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롬 2:11, 고후 5:12, 갈 2:6, 엡 6:9, 골 3:25, 벧전 1:17).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동을 하면 허물이 된다. 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허물이 된다. 잠언 17장 5절과 19장 17절의 말씀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10-13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에 잇대어진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에 아무도 도달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롬 1:18, 3:20). 유대교인들은 율법과 규례 곧 613개의 계명들과 그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수많은 울타리법들(Gezairoth)까지 지켜야하는데, 아무리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한다할지라도,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들 계명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완전하신 분이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고 마침이 되실 필요가 있었다(롬 10:4). 그래야 그분을 믿고 신뢰함으로 의(義)에 이를 수 있고(롬 10:4, 9-13),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

death_clip.jpg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했고, 바울도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폭 7미터의 깊은 계곡을 뛰어 넘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8미터 정도까지 멀리 뛸 수 있어야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고 부족한 존재라서 그 같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멀리 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6미터를 뛰었다 해도 살아남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6미터를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6미터를 율법의 행위로 간주할 때, 그 율법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모든 율법과 규례의 최고의 법인 사랑(긍휼)을 실천하라고 권면하였고,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을 강조하였다.

위에서 숫자 6(혹은 666=사람의 수)은 영적인 피조물(천사, 마귀, 사람) 혹은 율법을 상징하고, 숫자 7(혹은 777)은 완전하신 성삼위 하나님을 상징하며, 숫자 8(혹은 888=‘예수’의 수치)은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는(혹은 넘치는) 십자가의 도(케뤼그마=복음)와 예수님을 상징한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해서 아무 선행도 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7중에 최고로 6까지도 가능하지만, 그 하나의 부족 곧 마이너스 1(-1)이 결국 가능했던 6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야고보와 바울의 권면은 모든 율법과 규례를 100퍼센트 완벽하게 지켜야한다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법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바울은 로마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은 로마서 8장 4절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다.”고 하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義)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야고보의 사랑(긍휼)의 행위와 바울의 믿음의 의는 모두가 하나님사랑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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