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일치11: 말씀을 들음과 행함(3)(약 2:1-7)
본문
신행일치11: 말씀을 들음과 행함(3)(약 2:1-7)
“영광의 주”
야고보서 2장 1절에서 “영광의 주”란 표현은 당대의 그리스-로마의 사회상에 잇대어져 있다.
첫째는 주인과 노예의 개념인데, 당대에는 대다수의 노예들이 전쟁터에서 사로잡힌 자들이었거나 그 노예들의 자녀들이었다. 스스로 된 노예든, 강제에 의한 노예든 노예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은 주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노예들은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가정의 가장은 남편이자 아버지이었고, 부인과 자녀들은 가장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가장의 주도권에 얽매어있었다. 따라서 가장은 부인과 자녀들의 주인이었다.
셋째는 황제가 백성의 주인이었다. 신성을 주장했던 황제들은 ‘신(神)과 주(主)’(Deo et Domino) 혹은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이란 표현을 자신들의 두상이 새겨진 주화에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제국에서뿐 아니라, 고대 근동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신성이나 숭배가 가능했던 것은 당대에는 다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까 황제신이 하나 더 추가됐다고 해서 문제가 될게 없었다. 당대에 발행된 주화들에 새겨진 문구들을 볼 때, 황제들은 국가와 시민의 보호자(PR VINDEX), 대중의 희망(SPES PVBLICA), 영원한 왕(PRINC PERP), 공정한 통치자(AEQUITAS AVG), 행복(FELICITAS)과 자유(LIBERTAS)와 풍요와 행운(TYCH)과 운명(FORTVNAE)과 평화(PAX, PACI)와 승리(NIKE)를 가져다주는 자, 국가와 백성의 수호신(THEOS, DEUS), 만왕의 왕(BASILEUS BASILEON), 만주의 주(KYRIOS KYRION), 평화의 왕(BASILEUS EIRENES), 신의 아들(DIVI FILIUS), 신의 현현(THEOU EPIPHANOUS)이었다.
이런 준엄한 시기에 “신은 한분뿐이요, 주도 한분뿐이다.”를 주장했고, 각종 신상들과 신전들 및 제단들을 부정할 뿐 아니라,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당국의 대접이 어떠했겠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본문에 표현된 “영광의 주”란 당대의 신들과 황제들에게 적용됐던 말인데, 야고보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당국의 박해를 무릅쓰고 이 표현을 오직 성삼위 하나님 성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성자와 성령께만 적용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권면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민족성별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음을 강조한 복음정신과 동일한 맥락에서 야고보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하나님 한 분외에는 모두가 동등한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의 가족이며 형제자매이다. 야고보가 그리스도인들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한 형제요 자매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동일한 가족이요, 약속의 유업을 이를 자들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형제애와 평등사상으로 대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등사상은 바로 이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후 69년에 주조된 로마황제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 69년 4-12월)의 데나리온을 보면, 전면에 월계관을 쓴 아우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황제 호민관(VITELLIVS GERM IMP TR P)의 두상을 새겼고, 뒷면에 권좌에 좌정한 승리자 유피테르(IVPPITER VICTOR)가 오른손에 여신 승리를, 왼손에 홀(권력의 상징)을 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이 1세기 그리스-로마인들의 지존에 대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비잔틴시대의 주화(AD 976-1025, 콘스탄티노플)를 보면, 전면에 복음서를 가슴에 품고 계신 그리스도의 상반신을 새겼고, 두상 배후에 십자가 후광을, 좌우 어깨 위쪽에 예수 그리스도(IC XC)라고 새겼으며, 뒷면에는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IhSUS XRISTUS bASILEU BASILE)이라고 새겼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과 복음으로 만왕의 왕 승리자가 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지존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주”가 되신 것은 세속적 권력과 권세로 된 것이 아니고, 자기희생과 자기권한의 제한과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동일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고 성취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었으므로 피차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2-7절은 헬라인들의 교회 분위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교회 분위기를 보여준다. 복음서의 정황에 비춰볼 때, 2절의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또는 부유한 유대인들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금가락지는 부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낀 사람의 인장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람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눅 20:46) 사람들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지목해서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며 “멀리하라”고 권면하셨다(막 12:39, 눅 11:43).
3-4절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에서 “눈여겨보고”는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우러러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에 “내 발등상 아래에”는 무시와 무관심으로 경멸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에서 “가난한 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장로였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갈 2:10)고 특별히 부탁했는데 예루살렘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교회에 에비온파(Ebionites)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문자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말씀은 상황적으로 혹은 문맥적으로 이들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최우선순위로 지칭한 말이다.
6절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에서 법정은 회당 또는 교회를 말한 것일 수 있다. 1세기 교회들은 유대교 회당의 전통에 따라 세 명의 장로들을 장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교 회당에는 세 명의 장로들이 있었고, 그들은 회당장과 지방공회원(지방재판장)을 담당했는데, 1세기 그리스도의 교회들도 이런 유대교 전통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7절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에서 “그 아름다운 이름”은 ‘예슈아’ 혹은 예슈아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 1장 4절은 예수님께서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고 했고, 이사야 62장 2절은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 예언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도행전 11장 26절의 말씀에서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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