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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04: 믿음과 인내(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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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675 2020.12.2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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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04: 믿음과 인내(약 1:1-4)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miniscule_319_james.jpg“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란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야고보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신성이시고 영이시며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되셨다면, 예수님 또한 신성이시고 영이시며 창조주이시다. 둘째, 야고보는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친형제이면서도 스스로를 낮춰 예수님의 종으로 취급하였다. 야고보는 예수님을 육신의 형님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독생자 하나님으로 성육신하신 분으로 여겼다. 이점에 있어서 야고보는 자기를 추종했던 에비온파(Ebionites)와 달랐다. 에비온파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다른 예수’란 신성을 빼버린 예수를 말하고, ‘다른 복음’이란 할례를 포함한 토라를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말한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난 친 동생이었다. 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을 뿐 아니라, 세 명의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15:13, 행 21:18).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지상은 사는 곳이 어디이든지 본향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향인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 순례하는 떠돌이들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스데반의 순교직후 박해로 인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행 8:1).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란 문자적으로 유대인들을 말한다. 떠돌이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나라와 영토를 희망하였고, 그의 희망은 최소 430년에서 최고 645년 만에 이뤄졌으나 아브라함이후 4000년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대략 3000년을 유대인들은 남의 나라들에서 떠돌이와 노예로 살았다. 그들이 노래하는 그토록 오랜 희망(Ha-Tikvah)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야고보가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지상 가나안땅에 대한 희망과 떠돌이와 노예의 삶이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후 본향인 하늘 ‘시온에로의 오름(aliyah to Zion)의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ha-tikvah1.jpg2절 “내 형제들아”는 야고보서에서 15번 쓰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한분 아버지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들이기 때문에 육신의 혈통을 떠나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다. 예수님은 본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셨으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셨다”(롬 8:29, 히 1:6). 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상속자)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갈 4:6) 자들이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깨뜨림으로써 지상의 모든 담 곧 민족의 담, 성별의 담, 신분의 담, 계급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자매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님,” “자매님”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2절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에서 “시험” (peirasmois)은 밖에서 오는 시련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형태의 시련을 겪지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박해에 직면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의 크기를 테스트 받게 된다.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실한 믿음과 인내를 권면하는 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련은 도전이요 기회이다. 시련을 통해서 발전하고 성장하며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3-4절에서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바울도 로마서 5장 3-4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이나 시련이나 환난을 슬퍼하기보다는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다”고 하였다. 계시록의 저자도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을 삼년 반으로 묘사한바가 있다. 삼년 반이란 숫자는 ‘마흔 두 달’ 혹은 ‘일천 이백 육십일’ 혹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단어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악의 세력에게 당하는 고난의 기간이요 악의 세력이 가하는 탄압의 기간이다. 따라서 삼년 반은 문자적인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이다. 삼년 반은 ‘시련의 기간이 짧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영광을 천년으로 표현한다. 천년은 축복의 기간으로써 복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James_JrCC2.jpg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가 노예와 떠돌이란 시련에서 태동했고, 그리스도의 나라도 박해 가운데에서 태동하였다. 그러나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부활승천하신 후 월계관을 받아쓰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신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시련은 짧지만 그 영광은 영원하므로, 시련은 많아도 결코 실패는 없으므로, 시련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불과하므로, 시련은 축복을 기약하는 연단이므로, 시련이 무한정 지속되지 않으므로, 막힘의 위기 속에 반드시 트임이 있으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고 하였고,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다."(고후 4:17)고 하셨다. 욥이 시련 후에 전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고난은 축복에 대한 시샘과 같은 것이며, 햇살이 있기 위해서 한바탕의 비바람과 천둥이 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소나기를 맞은 식물은 더욱 푸르게 자란다. 우리는 시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시련은 소나기처럼 지나가기 때문이다. 소나기 몇 번 맞고 나면 시들어 죽어가던 것조차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시련은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은 잠시 살다가는 장막이요, 영원한 처소가 예비 되어있다는 소망을 저버리지 않게 되며, 시련을 통해서 이웃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서로 돕고 의존하는 이웃사랑의 필요성을 깨우치게 된다.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이 사랑을 알게 되고, 강퍅한 사람이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며,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남을 인식하는 새 삶을 찾게 되기도 한다. 특히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식어 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분의 한없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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