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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 그리스도19: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5)(계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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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317 2020.04.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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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 그리스도19: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5)(계 2:20-23)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Sardis_synagogue.jpg.jpg솔로몬이 죽고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 50년쯤 지나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강력한 왕이 나타났는데, 그 이름이 오므리(885-874 BC)이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국제사회에 알릴만큼 뛰어난 왕이었다. 군사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의 통치기간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은 100년여 전 통일왕국시대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갔었다. 그러나 오므리가 아들 아합(874-853 BC)을 바알신 제사장 출신이자 레바논(시돈)의 왕 옛바알(Etbaal)의 딸 이세벨과 혼인시켜 결혼동맹을 맺게 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로 인해서 북 이스라엘에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세벨은 미색을 갖췄을 뿐 아니라, 사특한 여인이었다. 솔로몬의 부인 암몬 사람 나아마가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바치는 가증한 밀곰이란 이방신을 들여와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산당을 짓게 하고 그 예배에 참석케 한 것처럼 이세벨은 아합의 권세를 이용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토록 하였다. 그 결과 엘리야와 광야 굴에 숨은 칠천 명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바알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삼년 육개월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백성들은 극심한 가뭄과 배고픔까지 참아내야 했다.

열왕기상 22장 39절은 아합이 솔로몬 못지않은 건축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상아로 장식한 “상아궁”을 지었고, 많은 성읍들을 요새화시켰다. 오므리와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국제사회에 알린 국방외교면에서 뛰어난 왕들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서쪽으로 페니키아, 북동쪽으로 시리아, 동쪽으로 암몬, 남쪽으로 유다, 모압, 블레셋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합은 페니키아와 유다와는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고, 모압과 에돔으로부터는 조공을 받고 있었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 의하면, 아합은 주전 853년에 시리아를 포함한 인근 나라의 12명의 왕들과 연합하여 카르카르(Qarqar)에서 살만에셀 3세의 남서진을 막기 위해서 싸웠다. 그때 아합은 2천승의 병거와 1만 명의 보병을 이끌고 참가했을 정도로 강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국방외교에 공을 들였던 아합은 솔로몬처럼 외교차원에서 결혼동맹을 맺었고, 아합과 결혼한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은 아합을 조종하여 야훼신앙을 몰아내고 바알신앙을 굳건히 세우려 했다. 이 일을 저지하려고 목숨 걸고 나선 선지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엘-야훼’ 신앙(1)

Baal_golden_calf_sanctuaries.jpg가뜩이나 북왕국 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남왕국 유다의 관점에서 볼 때 불법적인) 성소를 만들고 법궤(야훼의 보좌 혹은 발등상)를 대신하여 황금송아지를 세웠으며,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또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조 여로보암 때부터 멸망 때까지(930-722 BC) ‘엘-야훼’ 곧 가나안의 신 엘과 야훼를 같다고 믿는 혼합신앙을 유지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국가의 운명(생사)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준행하느냐 준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굳게 믿었던 신명기 역사가로서는 아합뿐 아니라 불법적인 성소들과 제사장들을 세우고 제거하지 아니한 북왕국의 모든 왕들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또 신명기 역사가는 인물평가기준을 정치력 군사력 외교력에 두지 않고 야훼신앙의 충실도에 두었기 때문에 오므리와 아합의 태산만한 업적을 동산만큼만 기술하였다. 왕들이 국방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야훼신앙을 무너뜨리면 왕가가 진멸되는 응보를 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는 열왕기를 통해서 오므리와 아합이 야훼신앙에 충실했던 다윗을 추종하지 않고, 국방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국력을 키웠지만, 주변국들과 결혼동맹을 맺어 예루살렘 영내에 이방신들을 끌어들인 솔로몬의 전철을 밟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구약성경의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였기 때문에 그가 많은 이방여자들과 이방신들을 예루살렘 영내에 끌어들인 잘못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과도하게 토목공사를 벌림으로써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고, 젊은 부인들이 초청한 이방신 축제에까지 참가하곤 하였다. 그 결과가 왕국분열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야훼신앙을 위태롭게 만들고 회개하지 아니한 오므리-아합 왕가는 엘리사와 예후가 일으킨 쿠데타로 진멸되고 만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엘-야훼’ 신앙(2)

goddess_canaanan.jpg엘리사의 지지를 받았던 예후도 오므리처럼 군사쿠데타를 통해서 왕권을 쟁취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10대 왕이었다. 그는 제9대 왕인 아합의 아들 여호람(요람) 밑에서 시리아와 전쟁을 치를 당시 병거부대를 지휘한 장군이었다. 주전 841년경 시리아와의 전쟁 때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 여호람(요람) 왕이 부상을 입고 치료 차 이스르엘 성으로 돌아갔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도 사돈의 문병을 위해서 이스르엘에 내려와 있었다. 아하시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의 아들로서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여호람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틈을 타 엘리사는 예후를 왕으로 세웠고, 예후는 병거부대를 이끌고 이스르엘로 가서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요람)뿐 아니라, 유다의 왕 아하시야까지 죽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예후는 이세벨도 죽이고, 아합의 자손 70명과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자손 42명도 죽었다. 이뿐 아니라, 예후는 열왕기하 10장 16-17절,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한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에 단 한명의 바알숭배자도 남아 있지 않게 모조리 죽었다.

그러나 예후는 단과 벨엘의 황금송아지 성소들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남왕국 사람인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에서 볼 때, 예후는 황금송아지 성소들을 그대로 남겨둔 행위로 인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야훼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애쓴 공로가 아무리 컸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악한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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