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자 그리스도17: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3)(계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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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 그리스도17: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3)(계 2:8-17)
서머나 교회
에베소 교회는 행위의 수고가 있었고, 고난을 잘 참고 잘 견뎠으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용납하지
아니하고 배척하였다. 또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첫 사랑을 버린 일은 생사가 걸린 반드시 회개해야만 되는 일이었다. 음식준비에
분주했던 언니 마르다보다 주님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던 동생 마리아가 오히려 칭찬을 받았던 것에서 보듯이(눅 10:38-42), 행위의 수고와
인내도 소중하고 칭찬받을만하지만, 첫 사랑을 간직하는 일이 더 소중하고 모든 일에 우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부가 아무리 서로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고 최선을 다해 가정을 돌본다 해도, 피차 사랑이 식어버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무로 사는 부부이지 행복한 부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도 부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성도의 본분을 다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한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은 책망이 없고, 칭찬과 격려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2:10)고 당부하셨다. 여기서 ‘충성’은 ‘신실’을 말하고, 신실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기까지 신실하라’ 또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행한 서약을 지키라’ 또는 ‘목숨 바쳐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고 하셨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님의 특징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2:8)으로 서머나 교회에 소개한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이 당시 소아시아에는 유대인들이 최소 한 세기 전부터(64 BC)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마다 유대교 회당들이 있었고, 유대교에 대한 헬라인들의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로부터 유대교의 아류로 취급되는 신흥종교였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핍박한 이유는, 첫째, AD 30년에 십자가 못 박혀 죽은 ‘예슈아’가 ‘오실 자’ 메시아였다는 주장 때문이었고;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유대교 회당에 출입했던 다수의 헬라인들을 그리스도교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셋째,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토라와 규례를 폄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39대의 곤장을 다섯 번 이상 맞았고, 투석형도 받았으며, 자주 옥에 갇히곤 했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에 대한 경고는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진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버가모는 사탄이 살고 있고, 그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한 곳이라고도 했다. 강진 후에 더 강한 여진을 맞듯이, 그야말로 위기에 위기를 맞고 있는 곳이었다. 이토록 위험하고 살벌한 곳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놓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을 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감춰둔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흰 돌은 경주에서의 승리자와 재판에서 무죄를 선언 받은 자들에게 주던 돌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법정에서는 흰 돌과 검은 돌을 사용해서 유무죄를 결정했다고 전한다. 흰 돌은 무죄를 의미하였고, 검정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다. 또 노예가 해방될 때 그에게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새로운 이름이 그 돌 위에 새겨졌다고 한다. 또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다. 이렇듯 흰 돌은 자유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흰 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세상을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
또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에봇 위에 패용하는 판결흉패 주머니에 흰 돌과 검은 돌 두 개를 넣고 다녔는데, 이를 ‘우림’과 ‘둠밈’이라고 불렸다. ‘우림’(Urim)은 빛(lights)을 뜻하는 흰 돌이고, ‘둠밈’(Thummim)은 완전함(Perfections)을 뜻하는 검은 돌이었다(출 28장). 대제사장은 판결할 때 흉패 주머니에서 돌을 한 개만 꺼냈다. 그 돌이 흰 돌이면 긍정(yes)이고, 검은 돌이면 부정(No)이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판결흉패를 가지고 물었을 때, ‘우림’ 곧 빛이 나오면 ‘둠밈’ 곧 완전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림’이 ‘둠밈’이요, 빛이 완전함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흰 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그 돌을 받는 자는 구원의 완전함에 이른 자란 뜻이다.
니골라당(1)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두 번
사용되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배척하였으나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는 교권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니골라당에서 ‘니콜라오스’의 어원은 '니코'(niko)와 ‘라오스’(laos)의 합성어이다. ‘니코’(niko) 즉 ‘우세하다’는 뜻이고, ‘라오스’(laos)는 ‘백성’이란 뜻이다. ‘백성에 우세하다,’ 즉 ‘백성을 지배하다’라는 뜻이 니골라당의 의미란 것이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은 교권주의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니골라당이 영지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주후 180년경에 프랑스 리옹의 이래내우스(Irenaeus, <Against Heresies> 1.26.3; 3.10.6)와 주후 200년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Miscellanies> 3.4.25f)는 안디옥의 니콜라오스(Nicolas of Antioch)가 니골라당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이단의 창시자로 보았다. 이래내우스의 제자로서 로마의 감독이 된 히폴리투스(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7.24)도 니콜라오스가 “건전한 교리를 버리고, 삶과 음식 모두에 무관심할 것을 습관적으로 가르쳤다.”고 하였다. 또 클레멘트는 니콜라오스가 금욕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후에 그의 가르침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에로 변질시켜 니골라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은 육체와 율법을 악하게 보고, 악한 육신을 다스리기 위한 금욕주의 또는 육신을 함부로 다루는 방탕주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던 해 받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할 뿐 아니라 음행을 부추겼다.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을 뿐 아니라, 발람의 교훈을 좇는 무리도 있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위하여 여리고성 맞는 편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에 진을 친다.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을 초대하여 바알의 신전이 있는 브올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였다. 싯딤이란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바알브올을 섬기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염병을 퍼트려 2만 4천명이 죽는 엄한 벌을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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