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17: 광야는 믿음을 키우는 훈련장소(출 17:1-16)
본문
17. 광야는 믿음을 키우는 훈련장소(출 17:1-16)
본문
17장에서
이스라엘 회중은 사막에서 흔히 겪는 일이지만 물 문제에 부딪쳤다(1-3절).
물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아말렉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8-16절).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이스라엘 회중은 그들을 사막으로 이끌어내어 죽게 만든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였다(16:3;
17:3). 그러나
실상은 맞닥뜨리는 위기들을 통해서 그들을 연단시켜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위기들을 조성하신 것은 아니다.
위기란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에게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기들을 피해가게 하시거나 위기들을 만나지 않도록 돕지 않으시고 자주 그 위기들을 겪게 하시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했고,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벧전 1:7)고 하였다. 둘째는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고 했다. 위기나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육체의 가시’요 ‘사단의 사자’일 수 있다. 시험을 치른 후나 시합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제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다. 시험에 불합격했거나 시합에서 졌을 때 겪는 아픔이 꼭 가시에 찔린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그로 인해서 분발하게 하고, 더 노력하여 발전시키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위기나 시련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낮추게 만드는 가시요 채찍이다.
하나님은 위기나 시련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같은 것들을 통제하실 수 있고 막으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녀들이 이기지 못할 시련을 허락지는 않으신다.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고
말씀하셨다.
사막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 위기를 해결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달게 하셨고(15:25),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으며(16:13-15),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17:6).
그리고
아말렉 족속과 싸워 이기도록 도우셨다(17:11-16).
다만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게”
하셨다(17:11).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은 것처럼, 이스라엘 회중도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았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교회에 입문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지금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광야는 이스라엘 회중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훈련장이자 약속성취를 위한 준비 장소였다. 공생애 시작 전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듯이(마 4장), 광야는 약속의 땅 가나안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믿음을 연단 받는 장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훈련을 아무나 받는 것은 아니다. 뽑힌 사람만 받는 것이다. 선수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발전에 나가 뽑혀야 한다. 선수촌에 들어가면 이전보다 훨씬 고된 훈련을 감내해야 한다. 훈련을 잘 소화한 사람만이 시합에 나가 메달을 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켜 굳건히 세우려는 데 있었다.
또 광야는 희망과 약속과 보증이 있는 장소이자 믿음이 있고 없음을 증명하는 시험장이었다. 광야 건너편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져 있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며 그것을 맛보고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다. 이스라엘 회중은 언제나 현실에 통하는 것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하늘의 복을 놓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에 집착하여 유용성과 실용성에만 매달리게 되면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하여 늘 불평과 원망 속에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며 충만한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사는 믿음생활이다.
광야는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언급되었듯이 이집트란 세상에서 구별되어 홍해라는 침례를 받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물을
먹고 마시면서 믿음과 인내로써 요단강 넘어 가나안 복지를 향해서 행군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광야생활은 신앙생활을 상징한다.
광야가
삭막하고 척박하며 배고프고 고달프고 모래바람을 견뎌야 하는 장소이듯이,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도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만이 아니다.
고난과
시련을 잘 참고 견딘 다음에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가나안 복지란 금메달이요 금빛 찬란한
월계관이요
금양모피이다.
이스라엘 회중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 받을 때마다 모세와 아론을 찾아와 원망과 불평을 털어났다(16:3; 17:3). 모세가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털어놓은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었다(16:8; 17:2).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의 원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의 잘못을 수수방관하지도 않으셨지만, 또한 그들을 버리지도 않으셨다.
이스라엘 회중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언제나 보채고 때를 쓰고 씩씩거린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회중은 내버려뒀으면 이집트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텐데, 왜 우리를 이 사막에 끌어내어 개죽음시키려 하느냐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마실 물을 달라, 먹을 양식을 달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바꿔 말하면, 헬리콥터 부모처럼 알아서 척척 해주시지 않고, 꼭 보채야 주시고 믿음을 시험하느냐며 오만불손한 자식이 부모에게 대드는 꼴이었다. 그러나 자식이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자식을 엄하게 교육할 것이다. 자식의 기를 꺾지 않겠다고 자식을 통제 불능으로 내버려두는 부모는 자식을 망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어려움 없이 돌보시는 헬리콥터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는 새 출애굽기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영웅적으로 가나안 복지를 쟁취한 여호수아를 본받자. 험난한 원정길에 나서 기필코 금양모피를 손에 넣은 이아손을 본받자, 지상의 모든 고뇌와 지상의 모든 수고를 짊어진 채 운명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가 끝내는 자신을 그토록 증오했던 헤라로부터 영광을 쟁취한 헤라클레스를 본받자, 절망의 미궁에 갇혔으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테세우스를 본받자.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순교의 길을 걸었으나 끝내는 이기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본받자.
- 이전글 출애굽기1801: 광야 연단과 원시 국가체제(1)(출 18:1-12) 06.09.27
- 다음글 출애굽기16: 만나와 메추라기(출 16:1-36) 06.09.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