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19: 인류가족과 약속의 후손(창 1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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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19: 인류가족과 약속의 후손(창 10:1-32)
창세기 10장은 성도님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는 장입니다. 낯설고 친숙치 못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영적 교훈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0장은 나름대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창세기 10장은 약속의 후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였는데, 창세기에서도 이 약속의 자녀의 개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의 족보는 세속적인 족보나 혈통에 제한된 족보가 아니라, 영적인 족보 혹은 언약에 바탕을 둔 족보 혹은 약속의 자녀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문자적인 정확성이나 혈통의 공유를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공유를 중요시하는 폭넓은 의미의 족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서는 “누가 과연 유대인인가?”를 판단할 때, 혈통보다는 유대교 신앙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혈통을 뛰어넘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을 동족으로 보는 큰 틀에서 생각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계보는 아담, 셋, 에노스,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솔로몬,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로 이어집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의 제사를 바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고, 신앙세계와 종교문화를 대표하는 자들이며,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하심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포상을 받기에 합당하게 살뿐 아니라, 이 땅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하나님의 통치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약속의 자녀들의 영적인 혈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 오셨고, 지금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켜가고 계십니다.
둘째, 창세기 10장은 인류가족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큰 틀에서 보면, 인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써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로 나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 곧 예루살렘 성전이 지상에 하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지상의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은 교회이며, 지상의 하나님의 집은 한 집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집이 하나면, 가족도 하나뿐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지만, 불행하게도 ‘하늘에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솥밥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한솥밥은 한 식탁에서 나누는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집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자들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들 ‘세상에 속한 자들’을 일컬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란 말은 쟝 칼뱅이 주장한 것처럼,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축복과 영생을 예정하시고 복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들을 대신해서 저주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류는 다 한 형제요 자매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자녀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세속문명을 시작한 가인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탕자처럼 세속문화와 세속인본주의문화를 앞세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혈통은 영적인 의미에서 전쟁과 사냥과 살인과 같은 전사의 피가 흐르는 가인, 라멕, 야발, 유발, 니므롯, 함으로 이어집니다.
인류의 시작이 아담 한 사람에 의해서 된 것처럼, 홍수 이후에는 노아 한 사람에 의해서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한 가족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은 온 인류가 노아의 세 아들을 각각의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온 인류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한 형제요 자매임을 일깨워 줍니다.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회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들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1-5절은 야벳의 후손들, 6-20절은 함의 후손들, 그리고 21-32절은 약속의 백성들인 셈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땅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되었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민족배타가 짙은 지역감정, 민족감정, 잘못된 인습과 문화의 틀을 벗어 버리고 참된 평화와 화합의 신앙을 이루어 갈수 있습니다(계 7:9).
셋째, 창세기 10장에는 민족의 계보를 설명함에 있어서 몇 가지 독특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의 족보는 다른 족보들에 비해서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가계 중심의 족보라기보다는 민족중심의 족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를 새로운 인류의 나무뿌리로 제시해 놓고, 그 나무의 세 가지를 노아의 세 아들 셈과 야벳과 함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들 세 가지로부터 70개의 종족의 명단을 언급하였습니다. 야벳의 계보에서 14종족, 함의 계보에서 30종족, 셈의 계보에서 26종족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완전수라는 유대인의 개념에 따른 것으로써 문자적인 역사기술이기 보다는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해석으로써의 역사기술입니다. 성경에서 애급에 들어간 야곱의 가족을 70명으로 설명한 것도 그렇고,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40세대로 설명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삶을 신앙적 의미로 풀이하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기술방법을 ‘해석으로써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 해석의 역사를 요리사의 맛난 요리와 화가의 그림에 비교하였고, 이런 식의 역사가를 요리사와 화가에 비교하였습니다. 역사라는 재료를 잘 배합하여 깊은 의미를 담아낸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해석이 없는 역사기술은 밥그릇에 익히지도 아니한 쌀을 담고, 무 파 배추 등을 조리도 하지 아니한 채 상에 차려 내놓고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는 무정한 요리사와 같다고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0장의 족보가 민족의 개념과 지리적 개념을 포함한 족보로 기술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족보들에 비해서 창세기 10장의 족보에는 종족과 지역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또 하나님의 큰 은혜의 경륜을 통해서, 노아의 세 아들들이 많은 종족들을 퍼뜨렸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지상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한 조상에서 비롯된 한 가족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을 통해서 종족이 퍼져나갔듯이, 홍수이후에도 노아를 통해서 다양한 종족들이 퍼져나갔지만, 또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는 지역이 다르다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가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뿌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수천 년의 세월과 고립된 문화로 인해서 또는 기후와 계절의 차이로 인해서 피부색이 달라지고, 달라진 것이 유전되고, 언어와 문화와 문명의 격차를 가져오게는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분의 자녀들인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단 하나 불행한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께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아직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한 그리움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들은 탕자의 형처럼 마음을 악완하게 먹지 말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인도하는 선한 일군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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