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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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요 6:1-15)
예수님은 찾아오는 민중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느라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습니다. 음식도 드시고 잠시 쉬기 위해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사람들이 알고 몰려왔습니다. 그 때는 시기적으로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을 겪다가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다가오는 3월 말경이었습니다. 유대지방의 기후로 봐서 늦은 비가 뿌릴 수도 있는 조금은 서늘한 때어서 봄나들이에 알맞은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말은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평지를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의 해면보다 약 210미터 정도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호수여서 배에서 내리면 계속 오르막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름은 지역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부 갈릴리 지방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 수도인 디베랴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 호수, 북부 게네사렛 지방의 이름을 따서 게네사렛 호수라 불리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지만, 민중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나라 잃고 지도자 없이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말씀을 가르쳤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공관복음서에 보도된 내용들을 보면,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또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해가 저물도록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권위 있고 은혜로운 또 시원한 생수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 어치 이상의 떡이 필요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하루 품삯을 6만원으로 계산했을 때, 적어도 1,200만 원어치 이상의 떡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액수면 6천명에게 2,000원어치의 음식을 돌릴 수 있는 돈입니다.
여기서 떡은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나올 당시에만 해도 서양음식인 빵이 없었던 때라 떡으로 번역한 줄로 압니다. 아무튼 예수님에게는 그 많은 돈이 없었습니다. 또 있다고 해도 그 많은 빵을 구해올 공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이 도시락을 먹지 않고 있다가 시장해 하실 예수님께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도시락을 혼자 먹지 아니하시고,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도록 하셨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때 신기한 것은,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로 인해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다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한 것처럼, 빵과 물고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엘리야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실린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었고, 그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 기적이야기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에서도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기적이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생명’이 주제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기적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요 6:40)이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민중을 먹이신 것은 오로지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이 있고 난 직후에 행한 설교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요 6:48-51).
또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 자기들끼리 다투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까지 하셨습니다(요 6:53-58).
요한복음 6장 14-15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라는 모세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고, 그 선지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했던 것처럼 민중을 먹이는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여호수아서 5장 10-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는데,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지낸 지 만 40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그 후로는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렇게 모세 때에 내렸던 만나가 유월절을 기하여 그쳤기 때문에 모세와 같은 선지가가 나타나면, 유월절에 만나의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는 표적을 보였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한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요 6:26).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대 속에 사는 방식은 낡은 시대의 존재 방식입니다. 조상들이 먹고도 영원히 살지 못했던 것은 육신의 양식인 만나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영생의 떡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새 시대에는 새 시대에 적합한 사고와 생활방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육신의 만나가 아니라 영생하는 떡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가가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오는 민중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느라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습니다. 음식도 드시고 잠시 쉬기 위해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사람들이 알고 몰려왔습니다. 그 때는 시기적으로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을 겪다가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다가오는 3월 말경이었습니다. 유대지방의 기후로 봐서 늦은 비가 뿌릴 수도 있는 조금은 서늘한 때어서 봄나들이에 알맞은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말은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평지를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의 해면보다 약 210미터 정도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호수여서 배에서 내리면 계속 오르막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름은 지역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부 갈릴리 지방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 수도인 디베랴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 호수, 북부 게네사렛 지방의 이름을 따서 게네사렛 호수라 불리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지만, 민중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나라 잃고 지도자 없이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말씀을 가르쳤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공관복음서에 보도된 내용들을 보면,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또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해가 저물도록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권위 있고 은혜로운 또 시원한 생수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 어치 이상의 떡이 필요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하루 품삯을 6만원으로 계산했을 때, 적어도 1,200만 원어치 이상의 떡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액수면 6천명에게 2,000원어치의 음식을 돌릴 수 있는 돈입니다.
여기서 떡은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나올 당시에만 해도 서양음식인 빵이 없었던 때라 떡으로 번역한 줄로 압니다. 아무튼 예수님에게는 그 많은 돈이 없었습니다. 또 있다고 해도 그 많은 빵을 구해올 공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이 도시락을 먹지 않고 있다가 시장해 하실 예수님께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도시락을 혼자 먹지 아니하시고,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도록 하셨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때 신기한 것은,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로 인해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다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한 것처럼, 빵과 물고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엘리야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실린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었고, 그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 기적이야기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에서도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기적이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생명’이 주제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기적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요 6:40)이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민중을 먹이신 것은 오로지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이 있고 난 직후에 행한 설교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요 6:48-51).
또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 자기들끼리 다투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까지 하셨습니다(요 6:53-58).
요한복음 6장 14-15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라는 모세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고, 그 선지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했던 것처럼 민중을 먹이는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여호수아서 5장 10-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는데,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지낸 지 만 40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그 후로는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렇게 모세 때에 내렸던 만나가 유월절을 기하여 그쳤기 때문에 모세와 같은 선지가가 나타나면, 유월절에 만나의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는 표적을 보였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한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요 6:26).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대 속에 사는 방식은 낡은 시대의 존재 방식입니다. 조상들이 먹고도 영원히 살지 못했던 것은 육신의 양식인 만나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영생의 떡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새 시대에는 새 시대에 적합한 사고와 생활방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육신의 만나가 아니라 영생하는 떡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가가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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