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강해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강해설교 KCCS Digital Archive

창세기 045: 은혜와 응보의 함수(창 29:1-35)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8,911 2005.08.04 16:13

본문

창세기 045: 은혜와 응보의 함수(창 29:1-35)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속성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는 정의와 사랑이 절묘하게 혼합된 사랑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컬어 ‘정의로운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정의와 사랑은 두 가닥의 철로처럼 피차 만나려야 만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울면 정의가 웃고, 정의가 울면 사랑이 웃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수없는 것이 정의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영영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정의와 사랑이 만나진 곳, 정의와 사랑이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아가페란 바로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절묘한 실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요, 또한 무한한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덮어질 때는 죄의 삯인 죽음이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실현될 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응보는 피차 함수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희생도 큰 법입니다. 그 희생을 은혜를 베푸는 쪽에서 감당하면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희생이 무엇입니까? 그 희생이 바로 응보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물질과 반물질, 예를 들면, 빛과 어둠처럼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쾌락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고, 승리에는 피나는 훈련이 따르게 되어 있듯이, 혹은 그 반대로 피나는 훈련 후에 승리의 기쁨이 따르고, 고통이 있는 후에 쾌락이 있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쟁취한 축복의 언덕에는 응보라는 골짜기도 있었다는 것을 본문 창세기 29장을 통해서 우리는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와 응보가 함수관계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야곱은 은혜라는 곶감만 빼먹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입기 위해서 과감히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가’란 것은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보면, ‘연단’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일반적인 개념에서 보면, ‘응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창세기 29장을 통해서 야곱이 몇 가지 연단을 잘 통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 야곱은 외로움이란 정신적인 연단을 통과 했습니다(1-13절). 야곱은 자신의 잘못으로 부모와 형제를 떠나 머나먼 타향 낯선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조용한 사람으로서 장막에 머물기를 즐겨하는 자였습니다(25:27). 이것은 그의 성격이 다소 내성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보다 외로움을 더 많이 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피해 먼 타향에 머물러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분명 외로움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야곱이 외사촌 누이인 라헬을 처음 만났을 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11절) 자신을 소개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이 오히려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속임수의 삶을 청산하고, 진솔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둘째, 야곱은 노동이란 육체적인 연단을 통과했습니다(15-30절). 야곱은 외삼촌 집에 얹혀사는 이상 편안히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야곱은 후에 31장 40절에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극심한 육체노동에 시달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은 야곱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제 손으로 하는 수고를 통해서 입에 풀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힘든 육체노동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였고(31:42),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을(28:13-15)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평탄한 시절에는 제 힘과 제 자랑으로 살았지만,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면서는 제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셋째, 야곱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응보라는 연단을 통과했습니다(15-30절). 이삭의 예를 볼 때, 야곱은 하지 않아도 좋았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삭은 집에서 평온히 지내면서도 리브가를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수고는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대신해 주었고, 신랑의 지참금 또한 아버지 아브라함이 다 챙겨주었습니다. 손가락하나 까닥치 않고 아내를 얻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야곱은 자매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면서 14년간 무보수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짧지 아니한 고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 데는 그만한 피땀의 대가가 필요할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만큼 그들에 대한 사랑도 깊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야곱은 14년의 무보수 노동의 대가로 2명의 부인과 2명의 여종을 얻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12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디나)을 얻었습니다.

이삭이 평탄한 여생을 보냈다면, 그의 아들 야곱은 파란만장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고 창세기 47장 9절에서 고백했습니다.

일백삼십 년의 “험악한 세월”은 야곱이 에서와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과 그에 따른 축복을 가로챈 대가였을 것입니다. 세월이 험악했다고 해서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평탄한 세월을 보낸 이삭보다는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 더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삶은 이미 받은 것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맨주먹으로 쟁취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평탄한 삶의 배후에도 늘 계셨지만, 야곱의 험악한 삶의 배후에도 늘 계셨습니다. 조용하고 착한 아이에게보다는 천방지축인 아이에게 부모가 더 긴장할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 더 큰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셨을 것 입니다.

넷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연단은 오랜 고통도 한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처녀에게는 없는 힘이 아이를 가진 어머니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오는 힘입니다. 사랑은 진정 상식으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봉사하겠다고 말합니다(18절).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애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오히려 수고하는 것마저도 기쁘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억지로 일하게 됩니다. 일이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자기 아이를 등에 업으면 가볍지만, 남의 아이를 업으면 무겁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다거나 억지로 하는듯한 느낌을 받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식은 증거일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일의 경중을 탓하지 말고 사랑이 식은 내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말합니다(20절).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봉사는 세월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그 감격이 세월의 고통을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라반이 야곱을 속이고 라헬 대신 레아를 주고 또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할 것을 요구합니다(27절).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7년을 봉사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불합리한 조건조차 초월합니다. 인간들의 모임인 우리의 교회에도 또는 가정에도 불합리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런 것들을 다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라는 그 엄청난 불합리를 초월하시지 않았습니까? 은혜가 크면, 그에 대한 대가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야곱이 더위를 무릅쓰고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험악한 세월은 역설적이지만 축복의 세월이었습니다. 저지른 과오도 많았고, 받은바 은혜가 컸던 만큼, 그에 대한 대가도 컸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캠벨의 두 번째 부인 셀리나 헌팅턴 캠벨(Selina Huntington Bakewell Campbell, 1802-1897)은 <알렉산더 캠벨의 가정생활과 회상>(Home Life and Reminiscences of Alexander Campbell, 188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과 성경으로만 돌아가고, 인위적인 신조와 전통과 교리를 버리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모든 종파적 정당과 분열을 버리고, 우리의 종교적 실천과 예배에서 “사도시대의 복음”을 준수하자는 호소(plea, 呼訴)는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의 샘에서 나온 알렉산더 캠벨의 노고와 가르침에 기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가장 겸손하면서도 위대한 사람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별세하기 얼마 전, 차분하게 생각에 잠긴 채로 앉아 있었고, 나는 그분 옆에 혼자 있었는데,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했습니다.”(Well, I had a work to do, and I did it.)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이 주님의 일군이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애빌린(Abilene)기독대학교의 교회사 교수 더글러스 포스터(Douglas A. Foster)가 저술한 A Life of Alexander Campbell의 끝부분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캠벨은 기독교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복잡하고 영리하며 지칠 줄 모르고 오만(거만)하고 인종 차별적이며 공격적이고 다작을 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이 징계(단련)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캠벨의 마지막 말과 “그는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이 징계(단련)하신 사람이었습니다.”는 포스터 교수의 말은 야곱의 삶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삶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 19:30)와 맥을 같이 합니다. 야곱, 알렉산더 캠벨,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삶의 성공과 실패, 빛과 그림자 곧 은혜와 응보의 함수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