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41: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창 2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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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41: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창 25:19-34)
창세기 25장을 통해서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동시에 나온 쌍둥이 형제이면서도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서로에게 이질적인 형제란 점에서 매우 특이한 쌍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형제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싸웠고, 또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우다가 뒤진 쪽의 놈이 앞서 나가는 놈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두 형제간의 싸움이 장차 두 민족간의 싸움이 되고, 그 싸움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와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끈질긴 악연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싸움은 생존권의 싸움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놓고 생사를 거는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이들이 생사를 걸었던 땅들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란 것이고, 그 땅들이 수천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는 검은 황금 곧 석유를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에 이토록 질긴 악연이 멈추질 않는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면적으로 볼 때,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힘과 지혜의 겨룸이었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에서와 야곱의 겨룸은 힘(Muscle)과 정신(Mind)의 싸움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다툼은 무(武)와 문(文)의 싸움이었습니다. 칼과 펜의 싸움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 때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에게 무(武)의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토라’라 일컫는 ‘모세오경’이란 문(文)의 힘 혹은 종교의 힘이 있었습니다. 칼을 손에 쥔 자들의 횡포가 펜을 손에 쥔 자들을 떡주무르듯해왔지만, 역사는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칼로써 기독교를 탄압했던 로마제국은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지만, 힘없이 당하기만 하던 기독교는 과거 2천년 동안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 전쟁이 영적인 싸움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힘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에서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는 용사요 사냥꾼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여성스런 면이 강했습니다. 에서에게는 타고난 힘이 있는 반면에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힘이 약한 반면에 슬기로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보다 먼저 나온 것은 먼저 나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돼서가 아니라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서 야곱보다 앞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것은 성격이 다릅니다. 야곱은 비록 힘이 없어 에서를 뒤따라 나올망정 먼저 나옴의 가치와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소중한 가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가치나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는 있는 것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반드시 붙들어야할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붙들어야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 갖는 올바른 생각입니다. 그러나 에서의 혈통을 이어받은 현대인들은 무엇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까? 과연 그들이 붙들어야할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붙들지 말아야할 허망한 것들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옛날에 농사짓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매우 악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생전에 선한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행한 것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그 여자를 잡아서 지옥의 불바다 속에 집어 던져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보호하는 천사는 서서 그 여자가 한 일 중에서 무언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선한 것이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천사는 그 악한 여인이 언젠가 그녀의 농지에서 파를 한대 뽑아서 그것을 어떤 거지 여자에게 준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천사더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저기 있는 저 파 한대를 가져다 불바다 속에 있는 저 악녀에게 내밀어주고 그것을 붙잡게 하고 그녀를 끌어 당겨서 구출해 보아라. 그리고 만일 네가 그 팟대로 그 악녀를 불바다로부터 끌어내는데 성공한다면 그녀를 천당에 가게해도 좋다. 그러나 그 팟대가 부러진다면 그녀는 지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천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팟대를 불바다 속에서 신음하는 그 악한 여자에게 내밀면서 "이봐요, 이 팟대를 꼭 잡아요, 내가 끌어당길 터이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조심스럽게 그 악녀가 매달린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살려고 그 악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고약하고 악한 여자인지라 그 악녀는 다른 죄인들이 함께 매달리지 못하게 발길로 차냈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구원의 팟대이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 팟대이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팟대는 그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악녀는 불바다 속에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붙들만한 것을 붙들지 못한 악한 여인은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토록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서가 장자권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잘살고 못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가 가치의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그것을 짓밟듯이, 가치를 모른다면 무시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지혜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걸어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쉽게 포기한 것이나 야곱이 장자권에 목을 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에 관한 비유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우리나라 여의도와 같은 섬인 미국 경제의 메카인 뉴욕 맨해튼 섬을 양주 한 병과 맞바꿨다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1700년경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맨해튼 섬에 이주할 당시만 해도 그 섬의 주인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의 소중한 가치를 알고 그 섬을 인디언들로부터 사고 싶어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섬은 사실 별로 쓸모도 없는 땅인데 저 백인들은 참 애처롭게 목을 매는구나. 우리한테야 뭐 있으나 마나 한 땅인데, 이번 기회에 아예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아버리는 것도 괜찮겠다.”고 했습니다. 흥정의 결과 인디언들이 받은 그 엄청나게 소중한 땅에 대한 값은 양주 한 병이었다고 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팔아치운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벌린 장자권의 다툼은 재산상속이란 세속적인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축복 곧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하게 된 것은 그의 관심대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에서가 속한 사냥의 세계에서는 힘 있는 자만이 평안을 누릴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힘없는 자는 언제나 남이 잡아 놓은 사냥감을 얻기 위해 아첨해야하는 비굴한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반면에 힘 있는 자는 언제든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장자의 명분보다는 실제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때문에 에서는 팥죽을 먹고 힘을 얻어 다시 사냥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여긴 장자권을 포기하고 야곱에게 양도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의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것을 인생의 본분으로 여기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전적으로 참여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장자권의 문제는 재산상속이란 문제보다는 과연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업을 이어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이삭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는 에서이지 야곱이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서 20년 가깝게 멀리 도망을 갔어야했기 때문에 이삭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특권을 상속받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고,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뤘습니다.
이처럼 장자권은 재산상속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계승하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창대케 해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과 그를 통해서 전 인류가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될 것이란 암시도 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가문의 장자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이 모든 약속들을 이어받는 놀랍고도 엄청난 축복을 이어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장자권의 가치를 바로 인식했으며 마침내 이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의 풍요나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야곱은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짐승을 좇는 사냥꾼 에서처럼 세상적인 것, 곧 돈과 명예와 권세를 붙잡으려고 골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처럼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서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할 영원한 축복을 붙잡는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다.
창세기 25장을 통해서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동시에 나온 쌍둥이 형제이면서도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서로에게 이질적인 형제란 점에서 매우 특이한 쌍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형제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싸웠고, 또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우다가 뒤진 쪽의 놈이 앞서 나가는 놈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두 형제간의 싸움이 장차 두 민족간의 싸움이 되고, 그 싸움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와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끈질긴 악연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싸움은 생존권의 싸움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놓고 생사를 거는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이들이 생사를 걸었던 땅들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란 것이고, 그 땅들이 수천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는 검은 황금 곧 석유를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에 이토록 질긴 악연이 멈추질 않는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면적으로 볼 때,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힘과 지혜의 겨룸이었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에서와 야곱의 겨룸은 힘(Muscle)과 정신(Mind)의 싸움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다툼은 무(武)와 문(文)의 싸움이었습니다. 칼과 펜의 싸움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 때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에게 무(武)의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토라’라 일컫는 ‘모세오경’이란 문(文)의 힘 혹은 종교의 힘이 있었습니다. 칼을 손에 쥔 자들의 횡포가 펜을 손에 쥔 자들을 떡주무르듯해왔지만, 역사는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칼로써 기독교를 탄압했던 로마제국은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지만, 힘없이 당하기만 하던 기독교는 과거 2천년 동안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 전쟁이 영적인 싸움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힘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에서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는 용사요 사냥꾼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여성스런 면이 강했습니다. 에서에게는 타고난 힘이 있는 반면에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힘이 약한 반면에 슬기로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보다 먼저 나온 것은 먼저 나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돼서가 아니라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서 야곱보다 앞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것은 성격이 다릅니다. 야곱은 비록 힘이 없어 에서를 뒤따라 나올망정 먼저 나옴의 가치와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소중한 가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가치나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는 있는 것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반드시 붙들어야할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붙들어야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 갖는 올바른 생각입니다. 그러나 에서의 혈통을 이어받은 현대인들은 무엇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까? 과연 그들이 붙들어야할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붙들지 말아야할 허망한 것들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옛날에 농사짓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매우 악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생전에 선한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행한 것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그 여자를 잡아서 지옥의 불바다 속에 집어 던져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보호하는 천사는 서서 그 여자가 한 일 중에서 무언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선한 것이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천사는 그 악한 여인이 언젠가 그녀의 농지에서 파를 한대 뽑아서 그것을 어떤 거지 여자에게 준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천사더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저기 있는 저 파 한대를 가져다 불바다 속에 있는 저 악녀에게 내밀어주고 그것을 붙잡게 하고 그녀를 끌어 당겨서 구출해 보아라. 그리고 만일 네가 그 팟대로 그 악녀를 불바다로부터 끌어내는데 성공한다면 그녀를 천당에 가게해도 좋다. 그러나 그 팟대가 부러진다면 그녀는 지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천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팟대를 불바다 속에서 신음하는 그 악한 여자에게 내밀면서 "이봐요, 이 팟대를 꼭 잡아요, 내가 끌어당길 터이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조심스럽게 그 악녀가 매달린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살려고 그 악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고약하고 악한 여자인지라 그 악녀는 다른 죄인들이 함께 매달리지 못하게 발길로 차냈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구원의 팟대이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 팟대이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팟대는 그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악녀는 불바다 속에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붙들만한 것을 붙들지 못한 악한 여인은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토록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서가 장자권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잘살고 못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가 가치의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그것을 짓밟듯이, 가치를 모른다면 무시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지혜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걸어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쉽게 포기한 것이나 야곱이 장자권에 목을 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에 관한 비유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우리나라 여의도와 같은 섬인 미국 경제의 메카인 뉴욕 맨해튼 섬을 양주 한 병과 맞바꿨다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1700년경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맨해튼 섬에 이주할 당시만 해도 그 섬의 주인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의 소중한 가치를 알고 그 섬을 인디언들로부터 사고 싶어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섬은 사실 별로 쓸모도 없는 땅인데 저 백인들은 참 애처롭게 목을 매는구나. 우리한테야 뭐 있으나 마나 한 땅인데, 이번 기회에 아예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아버리는 것도 괜찮겠다.”고 했습니다. 흥정의 결과 인디언들이 받은 그 엄청나게 소중한 땅에 대한 값은 양주 한 병이었다고 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팔아치운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벌린 장자권의 다툼은 재산상속이란 세속적인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축복 곧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하게 된 것은 그의 관심대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에서가 속한 사냥의 세계에서는 힘 있는 자만이 평안을 누릴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힘없는 자는 언제나 남이 잡아 놓은 사냥감을 얻기 위해 아첨해야하는 비굴한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반면에 힘 있는 자는 언제든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장자의 명분보다는 실제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때문에 에서는 팥죽을 먹고 힘을 얻어 다시 사냥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여긴 장자권을 포기하고 야곱에게 양도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의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것을 인생의 본분으로 여기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전적으로 참여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장자권의 문제는 재산상속이란 문제보다는 과연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업을 이어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이삭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는 에서이지 야곱이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서 20년 가깝게 멀리 도망을 갔어야했기 때문에 이삭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특권을 상속받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고,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뤘습니다.
이처럼 장자권은 재산상속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계승하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창대케 해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과 그를 통해서 전 인류가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될 것이란 암시도 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가문의 장자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이 모든 약속들을 이어받는 놀랍고도 엄청난 축복을 이어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장자권의 가치를 바로 인식했으며 마침내 이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의 풍요나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야곱은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짐승을 좇는 사냥꾼 에서처럼 세상적인 것, 곧 돈과 명예와 권세를 붙잡으려고 골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처럼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서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할 영원한 축복을 붙잡는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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