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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38: 아브라함의 감화력(창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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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231 2005.07.0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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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38: 아브라함의 감화력(창 23:1-20)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있어서 인격만큼 중요한 것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격에서 친화력과 감화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의 인격과 거기서 나오는 친화력과 감화력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족속의 땅인 헤브론에 임시 체류하는 신세였지만, 헷족속에게 끼쳤던 감동과 감화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아브라함이 누렸던 이런 큰 감화력을 갖게 되기를 바라면서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서 수면에 오른 아브라함의 감화력과 처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헤브론과 헷족속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30km 지점에 있는 해발 1,013미터의 고도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포도의 특산지로써 모세가 보낸 정탐꾼이 이곳 에스골 골짜기에서 커다란 포도송이를 따서 두 사람이 메고 돌아온 곳(민 13:23)이기도 합니다. 또 헤브론은 도피성 가운데 하나였고, 다윗이 즉위하여 수도로 정했던 곳(삼하 2:11)이며,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의 봉화를 치켜들었던 곳(삼하 15:7)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살았던 헷족속은 철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 족속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바벨론을 침략하고 아모리 족속까지 수중에 넣어 이집트에 버금가는 세력을 떨쳤고, 모세시대에는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민족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헤브론에 거주했던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으로 매장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감화력과 처세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감화력은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우리는 이 글에서 사라의 남편으로써 한평생 나그네의 길을 함께 걸었던 부인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애통해했습니다. 몇 차례나 자기를 누이라고 속이고 왕들의 후처가 되는 것을 바라만 봤던 아브라함이었는데도, 사라가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을 전혀 의심치 않았던 이유와 사라가 아브라함을 믿고 굳세게 따랐던 이유를 이 글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향한 아브라함의 감화력은 그의 진심어린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진심으로 슬퍼하며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복된 일입니다. 처숙부님이신 이태평 목사께서 소천 하셔서 지난주 수목 양일간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을 통해서 그분의 소천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보면서 가신 분의 인격과 감화력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먼저 떠난 우리를 진심으로 애도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조문객의 숫자에서 판가름 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크게 호곡하는가에서 판가름 나는 것도 아니고, 가장 가까운 친지와 이웃들이 과연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는가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1998년 12월 12일(토)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됐던 “조선판, 사랑과 영혼 - 400년 전의 편지”에 진한 부부의 사랑이 묻어있어서 소개합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모를 무덤 한기의 이장작업이 있었는데요, 여기서 발견된 전혀 썩지 아니한 419년 전 관에서 당대의 사회상을 말해주는 여러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띤 것은 한지에 빼곡하게 쓴 한글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젊은 아내가 남편 이응태가 죽자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동안에 쓴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이 사무치게 배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이야기가 다 그렀겠습니다만 수백 년의 세월동안 남편의 무덤을 지켜온 이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제가 편지의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이 편지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현대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부부사이의 평등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 편지와 당대의 다른 증거들은 이응태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1580년대 조선시대는 법적 제도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산의 균분상속 그리고 제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바탕으로 이 시기의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부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감정표현에 솔직할 수 있는 토대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평등한 남녀 관계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 존중할 수 있었던 시대, 이것이 이응태 부부가 살았던 조선중기의 모습입니다.

강력한 감화력은 이렇듯 진심어린 사랑과 바른 인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응태가 죽은 후 두 차례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리학이념이 강화되면서 여성들은 점차 권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결국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감화력은 그의 겸손한 처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5절부터 11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사라의 매장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상대방에게 취한 행동은 자신을 한껏 낮춘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무시하지 않고 존경하며 6절에서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라고 말했던 감화력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방백’은 지파의 ‘우두머리’나 ‘왕’을 뜻하며, ‘하나님의 방백’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높은 자리에 임명하신 자’란 뜻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로 표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아브라함은 실제로 여러 족속들로부터 왕족과 같은 인정과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사라의 장지를 구하기 위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최대의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7절과 12절의 “몸을 굽히고”와 8절과 9절의 겸손한 태도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우리는 자칭 ‘선민’ 우월주의자들의 폐쇄성이나 교만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당한 재력가요 명망가였을 뿐 아니라 그 땅 거민조차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일컬어 “내 주여”(6, 11, 15절)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6절)이라고 호칭한 데서 그런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 거민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혔습니다(7절). 약자가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그 인격과 덕망이 갖춰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겸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본받아야할 삶의 태도입니다. 높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의 겸손은 겸손의 극치요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겸손한 자를 우습게 여기고, 그를 밟고 올라서려하는 세상의 방법과는 달리, 겸손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그를 더욱 높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켜 세워 하늘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만주의 주와 만왕의 왕으로 칭송을 받게 하시고, 모든 이들의 무릎을 그분 앞에 꿇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감화력은 그의 공정한 거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2절부터 20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족속의 듣는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구입할 때 분위기로 보아서 거저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거의 강권적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그 굴을 자신의 정당한 소유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공정한 삶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아브라함은 헷족속의 규례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마므레 앞 막벨라 굴과 밭을 아내의 매장지로 팔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 제의에 헷족속은 아브라함에게 그곳을 거저 주겠다고 화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6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적지 않은 정치경제적 이익을 그동안 베풀었고, 헷족속 또한 그 보답으로 기꺼이 그 땅을 주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상대방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고 당시 시세대로 땅값을 치렀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또 한번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바른 모범을 보였고, 헷족속 중에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었고, 세상에 대하여 감화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라고 한 6절의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실하고 겸손하고 공정한 모습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헷족속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생활과 실제생활이 표리부동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암시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고 성별된 모습을 불신세계에 보여주었고, 또 하나님이 그를 축복함으로써 헷족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명백히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아브라함처럼 진실하고 겸손한 인격과 공정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권위를 세상에 들어내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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