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36: 물과 계약식사(창 2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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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36: 물과 계약식사(창 21:22-34)
본문말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물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계약식사에 관한 것입니다. 물은 침례와 깊은 연관이 있고, 계약식사는 성만찬과 연관이 깊습니다. 먼저 물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근동지방은 메마른 사막지역이어서 물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그래서 물로 인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근동지역에 진출해 있는 건설회사에 근무한 경험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사막이나 다름없는 광야라도 땅을 파면 물은 나온다고 합니다. 사막아래에 거대한 호수가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만, 근동지방은 조금만 파 들어가도 암반이 나오기 때문에 기계가 없던 옛날에는 샘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20세기가 석유분쟁의 시대라면 21세기는 '물 전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요르단 강을 둘러싼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사이의 물 분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1967년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 있었던 그 유명한 6일 전쟁도 물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려들자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의 수량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서 전쟁을 일으켰고 골란고원을 점령해버렸습니다.
흔히 종교전쟁으로 알려져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펀자브(Punjab)지방 분쟁을 비롯해서 터키와 시리아, 이라크와 쿠르드족간의 무장충돌, 그리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사이 분쟁의 원인도 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또 아프리카 북쪽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의 수단과 우간다를 상대로 댐 건설 등 치수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고, 서쪽의 세네갈은 수도 다카르에 물을 대려고 모리타니와 국경을 이루는 세네갈 강에 운하를 건설하려다 양국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자 결국 이를 포기했습니다. 이밖에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사이의 갠지스 강,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인더스 강,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그란데 강, 아프간과 이란 사이의 헬만드 강,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카롤 강에서도 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북한에서 남한으로 흐르는 강에 댐을 건설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남한으로 흐르는 물의 양이 줄어들게 되고, 유사시에는 댐의 물을 대량 방류하여 남한에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창세기에 언급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의 물 분쟁은 근동지방의 물 분쟁역사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이 유난히 귀한 곳이다 보니까, 성경에는 물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습니다. 물이 생명수와 구원 또는 구세주에 비유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거처를 떠나 광야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음에 직면했던 장면에서 보듯이, 박해시대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집을 떠나 광야에서 방황하며 물을 구하지 못해 목마름에 절망하던 선배 신앙인들에게 계시록 7장 15-17절은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물이 귀한 사막에서 겪는 고통을 모르고서는 왜 하나님께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믿음을 지킨 당신의 백성에게 금은보석이 가득 든 보물 상자를 선물하시지 않고, 그 흔한 물을 선사하시겠다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계약식사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 10장 1-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하신 말씀이 물과 계약식사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 우리 성도님들이 주목하셨으면 합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는 계약체결 후에는 반드시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습속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시내산 계약을 맺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출애굽기 2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이(창 31:54) 그러했고, 다윗과 아브넬이 그러했습니다(삼후 3:20).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창세기 26장 26-33절을 보면, 아비멜렉과 이삭이 서로 상대방을 해하지 않기로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러고 나서 잔치를 베풀고 먹고 마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브라함과 아베멜렉 사이의 맹세에도 계약식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26-33절의 말씀은 본문말씀 창세기 21장 22-34절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창세기 31장 43-55절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자기 아내들을 박대하거나 아내 이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지 않기로 언약하고 돌무더기를 쌓아 증거물로 삼습니다. 그러고 나서 산에 올라 제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떡을 먹습니다. 다윗과 아브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하서 3장 20절을 보면, 아브넬이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다윗이 잔치를 배설하여 함께 먹고 마심으로 이 언약을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계약의 백성으로 믿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은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야훼 한 분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그 제물을 나누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식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성령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구세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구약과 신약이란 말의 뜻은 다름 아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맺은 계약을 구약, 침례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신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계약 체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고 하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우물을 뜻하는 ‘브에르’와 ‘맹세’ 또는 일곱을 뜻하는 ‘쉐바’로 이뤄져 있습니다. 따라서 ‘브에르 쉐바’는 맹세의 우물 또는 일곱 우물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에셀나무’는 사철 푸르며 꽃이 피고 사막에서 좋은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잎에서 염분을 분비하며 이슬이 맺히면 햇살에 염분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햇볕에 수분이 증발되기 시작하면 나무 아래쪽으로 공기가 유입되는 기류가 형성되어 나무아래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제공합니다. 아브라함이 맹세의 우물 주변에 에셀나무를 심은 이유는 온 가족의 안식과 쉼을 위해서, 나그네들에게 음식과 쉼을 제공하기 위해서, 나그네들과 야훼 체험을 나누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평화의 조약을 맺은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고백한 말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로 ‘엘 올람’이란 말로 ‘엘’은 ‘하나님’을, ‘올람’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올람’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째, ‘올람’은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고대’(6:4), ‘끝이 없는 시간’(왕상 9:5), 또는 ‘항상’(시 119:98)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둘째, ‘올람’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본 절에서와 같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영원성’(대하 7:3) 등과 같은 표현에 쓰입니다.
아비멜렉과 조약을 체결한 후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속성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됩니다. 즉 14장 22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엘 엘르욘’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고백하였고, 17장 1절에 따르면,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과의 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자기 백성을 영원토록 돌봐주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엘 올람’ 곧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맺고, 계약식사를 통해서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인식에 있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셨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평생토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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