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35: 하갈을 권념하신 하나님(창 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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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35: 하갈을 권념하신 하나님(창 21:8-21)
고사성어에 ‘새옹지마’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변화무쌍(變轉無常)하므로,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요, 길흉화복의 덧없음을 설명한 비유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갈 인생의 부침(浮沈)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음으로써 일개 여종의 신분에서 일약 후계자의 어미로 변신하였고, 본부인을 멸시할 정도로 위풍당당하더니, 본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자라 젖을 떼자, 자기 아들과 함께 쫓겨난 파란만장한 생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갈 인생의 부침은 하갈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인 사라의 마음에 쏙 들었던 하갈은 젊고 건강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일도 잘해내고, 마음씨도 착하고, 순종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하갈의 행동거지를 눈여겨보았을 것이고,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애라면 아브라함에게 날 대신해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아주되, 교만 떨지 아니하고 속 썩일 일 없을 거야.”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 것입니까? 처음엔 감히 안방을 기웃거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하갈이었을 테지만, 일단 안방에 한발을 집어넣게 되자, 두발 다 집어넣고 싶어졌을 것이고, 두발을 집어넣은 후에는 아랫목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종국에는 마님을 몰아내고 자신이 안방마님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릅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이삭이 태어나기까지는 가족들로부터 온갖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이삭에게 빼앗겼으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모든 상황을 눈치챌만한 나이까지 들었으니, 이삭이 그저 밉기만 했을 것입니다. 하갈이 지혜로운 여인이었더라면, 이스마엘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고 맙니다. 그 일차적인 책임이 하갈에게 있었다고 봅니다. 좀 더 자중하여 제 위치를 지켰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이스마엘이 장성한 후에 제몫의 기업을 얻고 나서 분가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갈은 이집트 여인이었습니다. 갈데아 출신의 사라와는 민족적 충돌도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갈데아 출신의 조상을 둔 이스라엘이 최초 조상들의 고향인 이라크인들과 원한관계에 있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아브라함의 근심이 깊어갔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근심도 아브라함이 자초한 일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연약한 믿음이 만들어낸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던 자식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이스마엘의 출생까지도 미리 알고는 계셨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꾸민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근심을 덜어주시고,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어 한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많은 실수와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우리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목적이 달랐을 뿐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마엘을 통해서 아랍민족을 이룰 목적이 달랐을 뿐이지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둥지를 떠날 수밖에 없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하갈과 이스마엘 자신들입니다.
둥지를 떠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닥친 시련은 열대의 더위와 갈증이었습니다. 사막이나 다름없는 광야에서 한 가죽부대의 물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닙니다. 그들은 집에서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이미 길을 잃었고 사막에서 방황하였으며 가죽부대의 물은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기진한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그늘아래 눕히고,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보지 못하겠다.”며 화살 날아갈 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이스마엘 쪽을 마주보고 앉아 방성대곡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기도와 이스마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하갈을 돕게 하셨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열어 샘물을 보게 하셨고, 하갈은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고,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성대곡하는 절망에 빠진 하갈을 도우셨습니다. 한 때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의기양양해 하던 하갈이었습니다. 자기를 키워준 여주인을 비웃던(16:4) 건방지고 배은망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처량하고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하갈의 그런 모습 속에 임하셨습니다. 자기주제를 잊고 교만에 빠졌던 하갈에게 임하신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울부짖는 하갈의 바닥으로 떨어진 그 모습 속에 임하신 것입니다. 하갈의 처지와 같은 낮은 자세의 마음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낮은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귀한 마음입니다. 또 이런 처지에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 평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들은 권력과 안전의 상징이었습니다. 근친강간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두 딸이 친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나 다말이 시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가 그렇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은 형을 위해서 아우들이나 가장 가까운 친족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기까지 남편노릇을 해줘야했던 이유가 그렇고, 또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를 통해서 아들을 얻고자 했던 이유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이 불륜을 저질은 부도덕한 행위이기에 앞서 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한 충정에서 비롯된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여성들은 하갈을 포함해서 모두가 다 불가피한 씨받이들이던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전에 둔 하갈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것이었겠는가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성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사라의 여종 이집트인 하갈을 씨받이로 맞아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한 탓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갈등과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실부인과 첩과의 갈등, 적자와 서자의 지위문제 등으로 가정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게 됩니다.
하갈이 집밖으로 쫓겨난 것이 반드시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은 내쫓김으로써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에 '리피트 이쉬타르 법전'(the Lipit Ishtar Code)이 발굴되었는데, 고대 수메르의 작은 왕국 이신(Isin)의 5대 왕인 리피트 이쉬타르는 그의 왕국을 다스리기 위한 법전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미 존재했던 수메르의 풍습들로부터 대부분의 법률을 이끌어냈을 것입니다. 그 법전은 노예들에 대한 대우, 상속, 결혼 같은 일들을 다루는 38개의 법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종을 취하여 그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고, 또 그 아내에게서도 자녀를 얻을 경우 그 여종과 여종의 자녀에게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종의 자녀는 그 아버지의 기업을 본 아들과 나눌 수 없다.
기업을 얻지 못하는 대신에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집에서 내쫓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갈 모자(母子)가 자유를 얻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라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삭은 택하고 이스마엘은 버린 것처럼 설명합니다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을 택한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기 때문이며, 그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민족의 조상이지 이스라엘 민족만의 조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기 위한 것이며, 이는 곧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적자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이스마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어머니가 이집트인이며, 그의 아내도 이집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데아인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요르단복음주의신학교 신학대학원 부원장으로 있는 토니 마을루프 교수는 레바논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시절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댈러스신학교에서 9년간 신학을 공부한 후에 쓴 성경역사에서의 아랍인이란 박사학위논문에서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이 구약의 여러 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으며, 욥과 잠언 30-31장의 아굴과 르무엘이 이스마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이삭만을 택하고 이스마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행불행만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민족보다 더 불행한 민족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민족이 위대한 것이고,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기독교가 나왔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지, 그들이 차지한 나라는 보좔 것 없는 사막지대요, 인구라고 해봐야 전 세계에 흩여진 유대인을 다 합해봐야 우리 민족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하갈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입니다. 온갖 교만과 방종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제 절망과 좌절에 빠져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진 하갈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말씀은 아브라함(15:1)과 이삭(26:24)과 다니엘(단 10:12)에게도 들려주셨던 동일한 말씀인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도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시 81:7), 삼손도 죽음을 앞두고 부르짖었습니다(삿 16:28). 신앙의 열조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다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하갈의 부르짖음은 감춰진 샘물을 밝히 보게 한 능력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갈을 권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사성어에 ‘새옹지마’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변화무쌍(變轉無常)하므로,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요, 길흉화복의 덧없음을 설명한 비유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갈 인생의 부침(浮沈)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음으로써 일개 여종의 신분에서 일약 후계자의 어미로 변신하였고, 본부인을 멸시할 정도로 위풍당당하더니, 본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자라 젖을 떼자, 자기 아들과 함께 쫓겨난 파란만장한 생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갈 인생의 부침은 하갈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인 사라의 마음에 쏙 들었던 하갈은 젊고 건강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일도 잘해내고, 마음씨도 착하고, 순종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하갈의 행동거지를 눈여겨보았을 것이고,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애라면 아브라함에게 날 대신해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아주되, 교만 떨지 아니하고 속 썩일 일 없을 거야.”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 것입니까? 처음엔 감히 안방을 기웃거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하갈이었을 테지만, 일단 안방에 한발을 집어넣게 되자, 두발 다 집어넣고 싶어졌을 것이고, 두발을 집어넣은 후에는 아랫목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종국에는 마님을 몰아내고 자신이 안방마님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릅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이삭이 태어나기까지는 가족들로부터 온갖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이삭에게 빼앗겼으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모든 상황을 눈치챌만한 나이까지 들었으니, 이삭이 그저 밉기만 했을 것입니다. 하갈이 지혜로운 여인이었더라면, 이스마엘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고 맙니다. 그 일차적인 책임이 하갈에게 있었다고 봅니다. 좀 더 자중하여 제 위치를 지켰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이스마엘이 장성한 후에 제몫의 기업을 얻고 나서 분가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갈은 이집트 여인이었습니다. 갈데아 출신의 사라와는 민족적 충돌도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갈데아 출신의 조상을 둔 이스라엘이 최초 조상들의 고향인 이라크인들과 원한관계에 있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아브라함의 근심이 깊어갔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근심도 아브라함이 자초한 일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연약한 믿음이 만들어낸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던 자식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이스마엘의 출생까지도 미리 알고는 계셨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꾸민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근심을 덜어주시고,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어 한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많은 실수와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우리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목적이 달랐을 뿐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마엘을 통해서 아랍민족을 이룰 목적이 달랐을 뿐이지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둥지를 떠날 수밖에 없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하갈과 이스마엘 자신들입니다.
둥지를 떠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닥친 시련은 열대의 더위와 갈증이었습니다. 사막이나 다름없는 광야에서 한 가죽부대의 물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닙니다. 그들은 집에서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이미 길을 잃었고 사막에서 방황하였으며 가죽부대의 물은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기진한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그늘아래 눕히고,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보지 못하겠다.”며 화살 날아갈 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이스마엘 쪽을 마주보고 앉아 방성대곡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기도와 이스마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하갈을 돕게 하셨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열어 샘물을 보게 하셨고, 하갈은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고,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성대곡하는 절망에 빠진 하갈을 도우셨습니다. 한 때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의기양양해 하던 하갈이었습니다. 자기를 키워준 여주인을 비웃던(16:4) 건방지고 배은망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처량하고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하갈의 그런 모습 속에 임하셨습니다. 자기주제를 잊고 교만에 빠졌던 하갈에게 임하신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울부짖는 하갈의 바닥으로 떨어진 그 모습 속에 임하신 것입니다. 하갈의 처지와 같은 낮은 자세의 마음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낮은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귀한 마음입니다. 또 이런 처지에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 평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들은 권력과 안전의 상징이었습니다. 근친강간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두 딸이 친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나 다말이 시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가 그렇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은 형을 위해서 아우들이나 가장 가까운 친족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기까지 남편노릇을 해줘야했던 이유가 그렇고, 또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를 통해서 아들을 얻고자 했던 이유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이 불륜을 저질은 부도덕한 행위이기에 앞서 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한 충정에서 비롯된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여성들은 하갈을 포함해서 모두가 다 불가피한 씨받이들이던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전에 둔 하갈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것이었겠는가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성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사라의 여종 이집트인 하갈을 씨받이로 맞아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한 탓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갈등과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실부인과 첩과의 갈등, 적자와 서자의 지위문제 등으로 가정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게 됩니다.
하갈이 집밖으로 쫓겨난 것이 반드시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은 내쫓김으로써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에 '리피트 이쉬타르 법전'(the Lipit Ishtar Code)이 발굴되었는데, 고대 수메르의 작은 왕국 이신(Isin)의 5대 왕인 리피트 이쉬타르는 그의 왕국을 다스리기 위한 법전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미 존재했던 수메르의 풍습들로부터 대부분의 법률을 이끌어냈을 것입니다. 그 법전은 노예들에 대한 대우, 상속, 결혼 같은 일들을 다루는 38개의 법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종을 취하여 그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고, 또 그 아내에게서도 자녀를 얻을 경우 그 여종과 여종의 자녀에게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종의 자녀는 그 아버지의 기업을 본 아들과 나눌 수 없다.
기업을 얻지 못하는 대신에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집에서 내쫓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갈 모자(母子)가 자유를 얻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라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삭은 택하고 이스마엘은 버린 것처럼 설명합니다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을 택한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기 때문이며, 그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민족의 조상이지 이스라엘 민족만의 조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기 위한 것이며, 이는 곧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적자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이스마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어머니가 이집트인이며, 그의 아내도 이집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데아인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요르단복음주의신학교 신학대학원 부원장으로 있는 토니 마을루프 교수는 레바논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시절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댈러스신학교에서 9년간 신학을 공부한 후에 쓴 성경역사에서의 아랍인이란 박사학위논문에서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이 구약의 여러 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으며, 욥과 잠언 30-31장의 아굴과 르무엘이 이스마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이삭만을 택하고 이스마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행불행만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민족보다 더 불행한 민족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민족이 위대한 것이고,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기독교가 나왔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지, 그들이 차지한 나라는 보좔 것 없는 사막지대요, 인구라고 해봐야 전 세계에 흩여진 유대인을 다 합해봐야 우리 민족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하갈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입니다. 온갖 교만과 방종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제 절망과 좌절에 빠져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진 하갈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말씀은 아브라함(15:1)과 이삭(26:24)과 다니엘(단 10:12)에게도 들려주셨던 동일한 말씀인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도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시 81:7), 삼손도 죽음을 앞두고 부르짖었습니다(삿 16:28). 신앙의 열조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다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하갈의 부르짖음은 감춰진 샘물을 밝히 보게 한 능력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갈을 권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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