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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28: 열국의 어미가 된 사라(창 17: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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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350 2005.07.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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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28: 열국의 어미가 된 사라(창 17:15-22)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받은 축복은 ‘열국의 어미’란 뜻을 함축한 이름 ‘사라’로의 개명과 말년에 이삭을 낳아 실제로 유대민족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과 현실 속에서 기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일생은 무자(無子)한 일생이었고,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90세의 나이를 먹은 노구의 할멈이었고, 노쇠한 육신의 현실로써는 도저히 제 몸으로 자식을 낳을 꿈도 비전도 가져볼 수 없는 어둠과 죽음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불가능의 벽을 뚫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요즘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 소식은 아마도 지구촌 구석구석에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고, 무언가 모를 웰빙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찬 글들로 인터넷이 도배질되고, ‘생로병사의 비밀’에 대한 관심은 더 한층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은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많은 반성과 함께 큰 희망을 줄뿐 아니라,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영웅적인 믿음의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현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는 불안한 장래, 불확실한 미래, 발전가능성이 희박한 현실, 생활형편이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현실, 기대하는 일들이 이뤄질 가능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두워가는 현실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배워야할 일은 이런 현실에 동화되지도 말고, 주저 않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서 4장 18-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대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기대하고,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기대하고, 무질서한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바로 잡혀가는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과 확신이 아닐까요? 또 우리가 창세기 1장 1-3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란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존재하는 분이시고 또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의 어떤 핵심이 아닐까요? 이제 매서운 한 겨울추위로 죽은 것만 같았던 자연이 희망의 싹을 밀어내고 올리면서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날씨는 여전히 추운 듯싶어도 이미 땅에는 새싹들이 돋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언급된 사라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봤더니, 사라역시도 평범한 여인일 다름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믿음’이란 소중한 가치가 없었다면, 그녀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을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을 수 없는 지구촌 한 구석에서 목축하는 그저 얼굴하나 예쁜 여성이었을 다름입니다.
사라는 나이 90이 넘도록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고(창 11:30), 목축업으로 끝없이 떠도는 남편을 따라 짐승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이었으며(창 11:31,12:5), 때때로 비겁하게 행동하는 남편의 요청을 거절할 수없는 힘없는 부인이었으며(창 12:11, 18:5),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인이라 자신의 몸종을 제 스스로 남편의 품에 안겨줘야 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종으로부터 멸시를 받아야했던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창 16:2). 그녀가 남편에게 몸종을 붙인 실수는 단순한 실수이기보다는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가게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압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남편에게 분통을 터트릴 수 있었고, 비록 비이성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했던 행동이라 할지라도 하갈을 학대할 수 있는 권한 또는 남편의 사랑을 씨받이 몸종에게 다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위로라면 위로였고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을 것입니다(창 16:5-6). 만에 하나 사라에게 믿음이 없었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없었다면, 그녀가 결코 행복한 여성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믿음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었는지라 자주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기 때문에(창 18:11),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 가능성에 대해서 비관적이었습니다(창 18:12). 이런 비관적인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특히 사라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믿음의 조상에 반열에 든 것은 이런 흔들림 속에서도 끝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하여 주시고 함빡 웃게 만들어 주셨습니다(창 21:6). 하나님은 그녀의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바꿔주셨고(창 17:15), ‘열국의 어미’로 삼겠다고 까지 하셨습니다(창 17:16).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 나타났습니다(창 17:19). 이것은 그들이 이삭을 본 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으로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나은 자식이 약속의 씨란 점을 명백히 하셨습니다(창 21:12). 사라는 일백이십칠 세를 살고 죽었지만(창 23:19), 그녀는 오늘도 유대민족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숨결 속에 살아있습니다.
사라의 원래 이름은 ‘나의 여주인’, ‘나의 공주’라는 뜻의 ‘사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어미’란 뜻을 지닌 ‘사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라’는 ‘첫째가 되다’, ‘통치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사라르’에서 유래한 ‘왕비’, ‘왕녀’, ‘왕후’라는 뜻을 갖습니다. 예전의 사래는 한 가정에 국한된 공주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만인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사라 역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성취에 대한 보증으로 그녀에게 새 이름을 주셨고, 그녀의 몸에서 낳은 아들을 통해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하셨으며,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영적인 사라의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라는 명실상부한 ‘열국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의 어미도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끝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래전 한 불임여성에게 생산력을 복원시켜 주시고 아들을 낳게 하여 함빡 웃게 만들어 주신 그 축복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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