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27: 언약의 표징으로써의 할례(창 17:9-14,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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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27: 언약의 표징으로써의 할례(창 17:9-14,23-27)
사라의 몸종이던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으로 들어가 이스마엘을 잉태하고 그 주인인 사라를 멸시한 사건은, 결국 사라의 학대를 이기지 못한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남으로써 사라의 승리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싸움의 발단은,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성취로 생각한 사라가 자기는 아들을 잉태할 수 없음을 알고 대신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고자 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라는 언약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고 조급하게 그 증표를 구한 것이지만, 이를 기회로 아브라함의 첩이 된 하갈은 인간적인 우월감에 빠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대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열망이나 계획에 따라 세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갈의 지위를 박탈하고 사라의 몸종으로 귀속시켰습니다(16: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에만 의존하게 될 때 겪게 되는 뼈아픈 실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위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은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깊이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치유하시고 거듭 기회를 주시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고통은 인간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흔히 고통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한 가지는 약속의 성취가 늦춰지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사건으로 인해서 겪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분열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약속을 믿고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노쇠하여 가고 약속이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인간적인 판단을 극복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아담이 하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했고,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판단이 지극히 옳았다는 것과 기어이 아들을 얻었다는 만족감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족감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라가 생각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이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 언약의 성취로 태어날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잉태하지 못했던 사라는 이제는 몸조차 늙어 도저히 자식을 낳을 가망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아들을 주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아브라함 역시 사라에게서 자손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또 다시 13년이나 흘러갔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참뜻을 처음부터 다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12:1-3), 그는 당대의 정황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려한다는 역사적 요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미지의 땅을 향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확약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내려가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사건, 조카 롯이 소돔을 선택하여 아브라함을 떠난 사건, 멜기세덱의 축복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건 등을 통하여 점차 가나안 땅으로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누구이며, 언약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갔습니다.
또한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몸에서 출생할 아들, 곧 아브라함의 씨(후사)를 통하여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내려가 사백년 동안 살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는 그 후손의 탄생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이스마엘 탄생이었고, 그로 인해서 사라와 하갈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지 13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8)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힘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루실 것을 선언하시고, 그 언약백성의 표시로써 아브라함의 모든 남성 식구들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정하시게 된 경위입니다. 이때부터 할례를 동반한 언약, 곧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는 언약은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거듭 되새기게 만들고, 영토소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이후로 오늘날까지 대략 3천8백년의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 영토를 소유한 경험이 1천4여년도 채 안될 뿐 아니라, 그나마도 상당부분의 세월을 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했었지만, 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나안 땅이 먹고 살고 안락을 누리기에는 턱도 없이 쓸모가 부족한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념은 그 어떤 총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강대국도 막을 수가 없는 강력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보다도 그에게서 나올 ‘후손’입니다. 이 후손은 물론 이삭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21절)고 하신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신 것과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 언약은 단지 이삭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까지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말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이 혈통에 있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표시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으로 받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행할 것을 명령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와 침례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서에서 나타난 할례의 경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눅 2:21), 유대인들은 엄격한 안식일 법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요 7:22). 장로들의 유전으로 알려진 안식일 법보다는 모세의 율법을 더 중시했다는 증거입니다(요 7:23). 그리고 기독교에 입교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지만(행 15:1,5), 할례와 침례는 명백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행하였으나, 침례는 나이에 상관없이 베풉니다. 할례는 유대인으로 난 자와 유대교에 개종한 자에게 베풀지만, 침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베풉니다. 할례는 남자에게만 베풀지만, 침례는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으로 받지만, 침례는 구원의 표징으로 받습니다. 할례는 율법의 명령을 따라 받지만, 침례는 자신의 믿음의 결정에 따라 받습니다.
할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보면, 먼저, 할례의 가치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킬 때에만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2:25). 할례는 몸에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하였고(롬 2:28-29),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롬 3:3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하였습니다(갈 5: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였습니다(골 2:11). 하나님 앞에서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만인이나 문화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다고도 하였습니다(골 3:11). 결론으로 몸에 하는 할례보다는 마음에 하는 할례, 곧 진정한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힘써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침례를 할례와 연관시켜 생각함으로써 침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침례는 할례와는 목적도 다르고 의미도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의의 개종자들에게 남자에게 베푸는 할례는 물론이고, 남녀를 물론하고 침례를 베푸는 것을 보아도 침례와 할례가 별개의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인식을 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만 의존하게 될 때,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구실이 성립될지라도, 뼈아픈 실수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실패한 그 자리, 도저히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되지 못할 그 시점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실 순간이란 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원대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고, 시간에 공간에 제약되지만, 하나님은 수천 년 먼 미래까지도 관찰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실수는 대체로 앞을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갖는 겸손과 그분을 섬기며 높이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사라의 몸종이던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으로 들어가 이스마엘을 잉태하고 그 주인인 사라를 멸시한 사건은, 결국 사라의 학대를 이기지 못한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남으로써 사라의 승리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싸움의 발단은,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성취로 생각한 사라가 자기는 아들을 잉태할 수 없음을 알고 대신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고자 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라는 언약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고 조급하게 그 증표를 구한 것이지만, 이를 기회로 아브라함의 첩이 된 하갈은 인간적인 우월감에 빠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대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열망이나 계획에 따라 세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갈의 지위를 박탈하고 사라의 몸종으로 귀속시켰습니다(16: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에만 의존하게 될 때 겪게 되는 뼈아픈 실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위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은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깊이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치유하시고 거듭 기회를 주시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고통은 인간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흔히 고통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한 가지는 약속의 성취가 늦춰지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사건으로 인해서 겪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분열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약속을 믿고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노쇠하여 가고 약속이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인간적인 판단을 극복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아담이 하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했고,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판단이 지극히 옳았다는 것과 기어이 아들을 얻었다는 만족감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족감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라가 생각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이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 언약의 성취로 태어날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잉태하지 못했던 사라는 이제는 몸조차 늙어 도저히 자식을 낳을 가망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아들을 주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아브라함 역시 사라에게서 자손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또 다시 13년이나 흘러갔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참뜻을 처음부터 다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12:1-3), 그는 당대의 정황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려한다는 역사적 요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미지의 땅을 향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확약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내려가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사건, 조카 롯이 소돔을 선택하여 아브라함을 떠난 사건, 멜기세덱의 축복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건 등을 통하여 점차 가나안 땅으로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누구이며, 언약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갔습니다.
또한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몸에서 출생할 아들, 곧 아브라함의 씨(후사)를 통하여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내려가 사백년 동안 살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는 그 후손의 탄생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이스마엘 탄생이었고, 그로 인해서 사라와 하갈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지 13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8)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힘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루실 것을 선언하시고, 그 언약백성의 표시로써 아브라함의 모든 남성 식구들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정하시게 된 경위입니다. 이때부터 할례를 동반한 언약, 곧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는 언약은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거듭 되새기게 만들고, 영토소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이후로 오늘날까지 대략 3천8백년의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 영토를 소유한 경험이 1천4여년도 채 안될 뿐 아니라, 그나마도 상당부분의 세월을 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했었지만, 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나안 땅이 먹고 살고 안락을 누리기에는 턱도 없이 쓸모가 부족한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념은 그 어떤 총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강대국도 막을 수가 없는 강력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보다도 그에게서 나올 ‘후손’입니다. 이 후손은 물론 이삭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21절)고 하신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신 것과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 언약은 단지 이삭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까지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말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이 혈통에 있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표시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으로 받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행할 것을 명령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와 침례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서에서 나타난 할례의 경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눅 2:21), 유대인들은 엄격한 안식일 법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요 7:22). 장로들의 유전으로 알려진 안식일 법보다는 모세의 율법을 더 중시했다는 증거입니다(요 7:23). 그리고 기독교에 입교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지만(행 15:1,5), 할례와 침례는 명백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행하였으나, 침례는 나이에 상관없이 베풉니다. 할례는 유대인으로 난 자와 유대교에 개종한 자에게 베풀지만, 침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베풉니다. 할례는 남자에게만 베풀지만, 침례는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으로 받지만, 침례는 구원의 표징으로 받습니다. 할례는 율법의 명령을 따라 받지만, 침례는 자신의 믿음의 결정에 따라 받습니다.
할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보면, 먼저, 할례의 가치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킬 때에만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2:25). 할례는 몸에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 것이라고 하였고(롬 2:28-29),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롬 3:3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하였습니다(갈 5: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였습니다(골 2:11). 하나님 앞에서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만인이나 문화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다고도 하였습니다(골 3:11). 결론으로 몸에 하는 할례보다는 마음에 하는 할례, 곧 진정한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힘써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침례를 할례와 연관시켜 생각함으로써 침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침례는 할례와는 목적도 다르고 의미도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의의 개종자들에게 남자에게 베푸는 할례는 물론이고, 남녀를 물론하고 침례를 베푸는 것을 보아도 침례와 할례가 별개의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인식을 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만 의존하게 될 때,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구실이 성립될지라도, 뼈아픈 실수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실패한 그 자리, 도저히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되지 못할 그 시점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실 순간이란 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원대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고, 시간에 공간에 제약되지만, 하나님은 수천 년 먼 미래까지도 관찰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실수는 대체로 앞을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갖는 겸손과 그분을 섬기며 높이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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