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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25: 여종 하갈과 동침한 아브람(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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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941 2005.07.01 11:21

본문

창세기 025: 여종 하갈과 동침한 아브람(창 16:1-16)

사람들은 자기가 기대하는 일의 결과가 속히 드러나지 않으면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일을 성사시키려고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본문은 인간의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후사에 관한 약속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받았습니다(13:16,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 시켜 가정의 반목과 갈등만을 초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보기에 더딘 것 같아도 가장 정확하고 온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여종 하갈과 동침한 아브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아브람에게 주신 후사에 대한 언약이 지연되었습니다.

지난날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관습에 따라 시집간 여인이 아이를 잉태치 못하면, 남편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아내를 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20:17-18).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첫 언약을 주신 후에 10년 이상 기다려 왔습니다(12:4, 7).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2절)라는 사래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속히 언약을 이루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는 자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그 은혜로 자손의 축복을 얻게 될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체되자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는 여종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얻으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2절)고 명한 사래의 행동은 그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생활풍습에 의하면, 자식이 없을 경우에 여종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생산해야만 했습니다. 재산 상속권의 경우에도 먼저 태어난 아이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자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30: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의 행동은 신앙인으로서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을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임의대로 약속을 성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곧 불신의 시초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6)고 교훈합니다.

둘째, 아브람과 사래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언약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래는 자신이 고령자였고, 따라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하여 가문의 대(代)를 잇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어떠한 기미나 확신이 사래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생산케 하려고 시도합니다.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2절)라는 사래의 말은 그와 같은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사래의 이러한 판단에는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으면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람이 사래의 말에 솔깃하여 그 제의에 응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목적을 중시한 나머지, 방법을 경시하곤 합니다.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과정을 무시하는 예가 흔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려 왔던 아브람에게 있어서 사래의 제안은 달콤하고도 어찌 보면 합리적인 해결 방법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불신앙은 죄를 잉태하고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혹 그로 말미암아’(2절)라는 말에는 하갈도 사래처럼 잉태치 못할 것을 기대하는 사래의 마음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녀를 얻지 못한 책임이 아브람에게 있음을 증명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자식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래에게 큰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당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수치의 대상이었고, 반대로 자식을 출산하는 여인은 그 출산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결혼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결국 사래의 인간적인 생각은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셋째, 그들의 처신은 결국 가정의 분란만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래와 하갈의 관계를 보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내용입니다. 자식 없는 사래는 이제 자식을 잉태한 하갈에게 멸시를 받게 됩니다. 종과 상전의 입장이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삼상 1:6).

사래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책임을 아브람에게 전가합니다. 즉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5절)고 사래는 항변합니다. 이는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해(害)를 받게 되었다는 원망입니다. 명백하게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자신의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람과 사래의 가정에는 불화(不和)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사래는 하갈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적의와 분노를 드러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 이러한 사래의 말은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도록 한 장본인이 그 자신이면서, 이제 하갈을 오히려 정죄하려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에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6절)라고 하면서 하갈의 신분은  종이란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6절)라는 구절에서 드러난 사래의 태도는 당시 종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인으로써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동떨어진 야만적인 행위였습니다. 결국 하갈이 쫓겨나는 덕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6절).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인간의 뜻과 방법은 결코 선한 결과를 초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얻으려 했으나, 가정의 분열만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인내와 기도로써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힘쓰되 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매사를 믿고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벧전 5:6).

넷째, 하갈은 자식의 잉태로 인해 교만해졌습니다.

하갈은 사래의 천한 몸종임에도 불구하고 주인 아브람의 첫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로 인해 자만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시 여인이 잉태하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하갈은 자신이 사래보다 더욱 하나님께 사랑받는 우월한 존재라고 자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갈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여주인을 멸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4절). 그러자 이를 참다못한 사래는 하갈을 미워하고 천대하게 되었습니다(6절). 이처럼 하갈은 자신이 여주인의 배려 덕분에 주인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었다는 은혜를 잊어버린 채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결과, 결국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비굴과 교만이란 극단적인 행태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힘이 더 세다고 생각되면 비굴하게 아첨하지만, 상대방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교만한 자세로 돌변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늘 겸손한 자세를 보여야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불안해지고 심지어 위기 상황에까지 처해진 것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사치와 허영에 들떠 사리사욕에만 집착하는 몰지각한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 내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써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빈번히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목회자를 멸시하고 박해하며 그 직분을 훼방하는가 하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와 같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이들은 하갈처럼 주인의 집에서 분리되어 멀리 내쫓기는 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요삼 1:9-10).

다섯째, 결국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은 언약 백성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교만 때문에 내쫓겨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갈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교훈과 안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되돌아가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할 것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번성케 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8-10절). 하갈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난 후, 그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근처 샘물에 ‘브엘라해로이’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14절). 이 말은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보신 자의 우물’ 또는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 있는 자의 우물’ 이란 뜻입니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 샘을 ‘하갈의 우물’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고통당하는 하갈을 왜 찾아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소외된 모든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베푸신 동일한 은혜를 지금 우리에게도 언제나 베풀어 주심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죄악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당신의 양자(養子)로 삼으신 은혜는 물론이요, 혹시라도 우리가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방황할지라도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자비를 늘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고와 약속을 듣고 돌아온 하갈은 아들을 해산합니다(15절).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이스마엘’ 이라고 짓습니다. 이스마엘은 그 후 약 14년 동안 아브람의 집에서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가 낳은 이삭을 희롱하고 학대한 일로 인해 아주 내어 쫓기게 됩니다(21:9-12). 교만한 여종 하갈의 품성이 그 아들 이스마엘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서 전날 하갈이 사래를 멸시했던 일이 반복된 것입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 즉 이스라엘과 애급 경계 지역에 삶의 터를 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갈은 자기와 같은 종족인 애급여인을 이스마엘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스마엘 족속의 후예가 아랍 종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편 하갈과 마찬가지로 종 출신 엘리에셀은 아브람 가정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 반면, 하갈은 분리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주인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졌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그녀 자신이 영원히 아브람 가문에서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만일 하갈이 겸손하게 사래를 섬겼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라는 성경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새겨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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