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생명의 주(主), 독생하신 하나님(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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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생명의 주(主), 독생하신 하나님(요 1:1-18)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말씀에 권세가 크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마가가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행동에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누가가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을 모범적인 순례자로 소개하려했다면,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첫째, 변화의 주체자로서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곧 로고스로; 둘째, 빛과 생명의 주(主)님으로; 셋째,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넷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다섯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여섯째,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일곱째, 이스라엘의 왕으로 소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가지 모두가 요한복음 1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한 목적은 요한이 복음서 20장 31절에서 밝힌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일곱 가지 가운데 변화를 주제로 한 앞의 세 가지 곧 첫째, 변화의 주체 로고스; 둘째, 빛과 생명의 주(主); 셋째, 독생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변화의 주체자로서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 하나님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 이 말씀은 그로 말미암아 무가 변하여 유가 되고, 없음이 변하여 있음이 되고, 부재가 변하여 실재가 되는 긍정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Logos)에서 나온 것입니다. 2,500년 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40?~? BC)는 로고스를 “변화의 주체자이면서 스스로는 변치 않는 진리”라고 정의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모든 것이 끝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형태만 변하는 물리적인 변화이든 성질까지 변하는 화학적인 변화이든 자연상태에서의 변화는 빛에서 어둠으로, 질서에서 혼란으로, 생명에서 죽음에로 커지는데, 이 법칙을 엔트로피(entropy)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부정의 변화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것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사람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관계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생명이 없는 물건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신앙조차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그런데 이 망가짐이 변하여 고침이 되고 부정이 변하여 긍정이 되는 근원이 로고스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빛과 생명의 주(主)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 이 말씀은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게 하며,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게 하며, 혼란이 변하여 질서가 되게 하는 긍정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 긍정의 변화가 로고스 하나님의 속성인 생명 곧 살림의 능력이요 살림의 지혜요 살림의 은혜요 살림의 진리인데 이 생명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는 자를 살리는 생명의 빛이란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씀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변화,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된 성육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를 탐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쟁자를 비방하고 헐뜯고 끄집어 내리는 정치판이 벌어집니다. 친구가 변하여 원수가 되고, 신뢰가 변하여 불신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고, 살림이 변하여 죽임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높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지심으로써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게 하고, 불신이 변하여 신뢰가 되게 하고,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고, 죽임이 변하여 살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란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과 동등하게 되신 변화, 곧 하나님이 눈높이를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신 성육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위에 군림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이든 명예든 재물이든 지식이든 다른 사람들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남들과 차별시키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이 기피하는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과 밥상을 함께 나누셨으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는 비방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방을 무릅쓰신 것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눅 19:10)시키려는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고 낮아지기를 힘써야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시켜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니까 수치의 상징이었던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같은 이들이 변하여 영광이 되는데, 그 영광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의 영광이요, 또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불신의 세상, 곧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은 세상, 뒤집어지고 엉망이 된 세상, 어둡고 혼탁한 세상, 죽임의 일이 활개 치는 세상이 변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세상, 하나님이 살아서 우리 가운데 거하는 세상,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세상, 주의 영광이 나타난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보여주신 긍정의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외아들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외아들이 변하여 많은 자녀들의 맏아들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독식할 수 있었던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많은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나누기를 기꺼이 수용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변하여 너희 아버지가 되고, 나의 하나님이 변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는 변화,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이 되게 한 변화가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보여주신 많은 변화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긍정의 변화가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긍정의 변화는 변화의 주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믿음이야말로 변화를 일으키는 빛이요 생명이요 능력인데, 그 믿음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들, 곧 부정이 변해서 긍정이 된 사건들을 소개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에서“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어머니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긍정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표적의 의미는 유익하고 건설적인 변화, 분위기를 살리는 변화, 부족이 넘침이 되는 변화, 없음이 있음이 되는 변화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에서 나타난 키워드는 “모자란지라,” “포도주가 없다”입니다. 이 부족과 없음을 넘침과 있음으로 바꿔놓게 한 원동력 그리고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는 칭찬을 받게 한 원동력,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영접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에서“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고백한 유대인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중생의 변화,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변화의 능력이란 사실을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나온 말씀이, 15-16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였습니다. 또 36절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유대인의 피가 절반쯤 섞인 불결의 상징인 사마리아 여성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리 많이 마셔도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물이 변하여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게 하고 부정한 여인이 변하여 정결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한복음 4장 50절에서“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간 이방인 헤롯 안디바의 신하는 죽어가던 자신의 아이가 소생하는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성 그리고 이방인 왕의 신하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남녀노소와 민족과 신분의 차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타난 변화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그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복음적 사고(思考)가 병든 자를 살리는 열림의 사고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살림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6장 1-15절에서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광야에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집의 가루통과 기름병의 가루와 기름을 없어지지 않게 하고 다하지 않게 한 표적들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아니하는 영생을 얻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6장 16-21절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표적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이면 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건짐을 받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타고난 맹인을 고치신 표적에서는 예수님을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고,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에서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죽음에 생명을 주시고, 슬픔에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이 혼돈을 질서로, 흑암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그래서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어둠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나갈 능력과 지혜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말씀에 권세가 크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마가가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행동에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누가가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을 모범적인 순례자로 소개하려했다면,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첫째, 변화의 주체자로서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곧 로고스로; 둘째, 빛과 생명의 주(主)님으로; 셋째,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넷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다섯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여섯째,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일곱째, 이스라엘의 왕으로 소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가지 모두가 요한복음 1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한 목적은 요한이 복음서 20장 31절에서 밝힌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일곱 가지 가운데 변화를 주제로 한 앞의 세 가지 곧 첫째, 변화의 주체 로고스; 둘째, 빛과 생명의 주(主); 셋째, 독생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변화의 주체자로서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 하나님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 이 말씀은 그로 말미암아 무가 변하여 유가 되고, 없음이 변하여 있음이 되고, 부재가 변하여 실재가 되는 긍정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Logos)에서 나온 것입니다. 2,500년 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40?~? BC)는 로고스를 “변화의 주체자이면서 스스로는 변치 않는 진리”라고 정의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모든 것이 끝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형태만 변하는 물리적인 변화이든 성질까지 변하는 화학적인 변화이든 자연상태에서의 변화는 빛에서 어둠으로, 질서에서 혼란으로, 생명에서 죽음에로 커지는데, 이 법칙을 엔트로피(entropy)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부정의 변화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것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사람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관계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생명이 없는 물건도 버려두면 망가지고 신앙조차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그런데 이 망가짐이 변하여 고침이 되고 부정이 변하여 긍정이 되는 근원이 로고스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빛과 생명의 주(主)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 이 말씀은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게 하며,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게 하며, 혼란이 변하여 질서가 되게 하는 긍정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 긍정의 변화가 로고스 하나님의 속성인 생명 곧 살림의 능력이요 살림의 지혜요 살림의 은혜요 살림의 진리인데 이 생명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는 자를 살리는 생명의 빛이란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씀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변화,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된 성육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를 탐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쟁자를 비방하고 헐뜯고 끄집어 내리는 정치판이 벌어집니다. 친구가 변하여 원수가 되고, 신뢰가 변하여 불신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고, 살림이 변하여 죽임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높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아지심으로써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게 하고, 불신이 변하여 신뢰가 되게 하고,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고, 죽임이 변하여 살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란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과 동등하게 되신 변화, 곧 하나님이 눈높이를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신 성육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위에 군림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이든 명예든 재물이든 지식이든 다른 사람들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남들과 차별시키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이 기피하는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과 밥상을 함께 나누셨으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는 비방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방을 무릅쓰신 것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눅 19:10)시키려는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고 낮아지기를 힘써야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시켜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니까 수치의 상징이었던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같은 이들이 변하여 영광이 되는데, 그 영광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의 영광이요, 또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불신의 세상, 곧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은 세상, 뒤집어지고 엉망이 된 세상, 어둡고 혼탁한 세상, 죽임의 일이 활개 치는 세상이 변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세상, 하나님이 살아서 우리 가운데 거하는 세상,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세상, 주의 영광이 나타난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보여주신 긍정의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외아들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외아들이 변하여 많은 자녀들의 맏아들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독식할 수 있었던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많은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나누기를 기꺼이 수용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변하여 너희 아버지가 되고, 나의 하나님이 변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는 변화,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이 되게 한 변화가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보여주신 많은 변화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긍정의 변화가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긍정의 변화는 변화의 주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믿음이야말로 변화를 일으키는 빛이요 생명이요 능력인데, 그 믿음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들, 곧 부정이 변해서 긍정이 된 사건들을 소개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에서“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어머니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긍정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표적의 의미는 유익하고 건설적인 변화, 분위기를 살리는 변화, 부족이 넘침이 되는 변화, 없음이 있음이 되는 변화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에서 나타난 키워드는 “모자란지라,” “포도주가 없다”입니다. 이 부족과 없음을 넘침과 있음으로 바꿔놓게 한 원동력 그리고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는 칭찬을 받게 한 원동력,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영접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에서“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고백한 유대인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중생의 변화,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변화의 능력이란 사실을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나온 말씀이, 15-16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였습니다. 또 36절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유대인의 피가 절반쯤 섞인 불결의 상징인 사마리아 여성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리 많이 마셔도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물이 변하여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게 하고 부정한 여인이 변하여 정결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한복음 4장 50절에서“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간 이방인 헤롯 안디바의 신하는 죽어가던 자신의 아이가 소생하는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성 그리고 이방인 왕의 신하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남녀노소와 민족과 신분의 차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타난 변화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그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복음적 사고(思考)가 병든 자를 살리는 열림의 사고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살림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6장 1-15절에서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광야에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집의 가루통과 기름병의 가루와 기름을 없어지지 않게 하고 다하지 않게 한 표적들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아니하는 영생을 얻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6장 16-21절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표적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이면 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건짐을 받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타고난 맹인을 고치신 표적에서는 예수님을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고,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에서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죽음에 생명을 주시고, 슬픔에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이 혼돈을 질서로, 흑암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그래서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어둠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나갈 능력과 지혜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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