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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성령의 역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나그네들(행 20:16-24,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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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517 2004.07.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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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성령의 역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나그네들(행 20:16-24,21:1-14)

사도행전의 중요성은 기독교의 기원과 전파 그리고 발전에 관한 역사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이 책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관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로마가 천하를 호령하던 당대를 교회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로부터도 이단시 취급될 뿐 아니라, 탄압을 받던 아주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겨자씨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시대 곧 교회시대로 당대를 조망(眺望)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내다본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10여 차례의 큰 박해를 당하고도 300여년 만에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로마제국을 기독교왕국으로 만들어버리는 대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 놀라운 성과에 대해서 18세기 영국인 에드워드 깁본(Edward Gibbon)은 ꡔ로마제국의 몰락사ꡕ(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88.)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일신교 신앙을 단호하게 지켜냈다는 점,
둘째, 신자들에게 사후의 세계를 보장했다는 점,
셋째, 수많은 기적들이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점,
넷째, 신자들이 깨끗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
다섯째, 그리스도인공동체들이 일치단결해서 로마제국 내에 독립된 사회를 구성하였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65년에 역시 영국인 에릭 도즈(Eric R. Dodds)가 ꡔ불안의 시대 안에서의 이교도와 기독교도ꡕ(Pagan and Christian in an Age of Anxiety, Cambridge University Press)란 책을 냈는데요, 도즈 교수는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네 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절대적 배타성이 불안의 시대를 살던 당대의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다는 점,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시하는 구원에는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어떠한 차별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
셋째,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점,
넷째, 일체감이 강한 그리스도인공동체에 가입하게 되면 의식주면에서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들 두 저명한 역사가들이 지적한 아홉 가지의 원인들이 모두 옳은 지적이긴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공을 성도들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함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대의 신앙인들은 주의 재림이 지연되고 박해까지 받아 늘 목숨이 위태롭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쉬지 않았고, 성령충만하여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짧은 기간 안에 전파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 가운데 한 가지는 이 시대가 성령님이 역사(役事)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산소처럼 우리들의 영혼에 소중한 분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을 이뤄주시고, 또한 이 구원을 보증하시며 인(印)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편입시켜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굴절의 빛처럼 우리 가운데 따스하게 내재하시며, 의사처럼 영혼의 병을 고쳐 주시고, 변호사처럼 억울한 일을 도우시며, 상담자처럼 연약함을 도우시고, 교사처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죄인들은 중생의 기쁨을 얻게 되며, 당장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앞당겨 미리 맛보고 체험하게 되며, 성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구원을 보장받고 영생을 약속받은 성도들은 막연히 주의 재림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능동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존재하신 세상으로 바꿔감으로써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사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시대 또는 성령시대를 살면서 거기에 걸맞게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살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과 성령으로 충만해야할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 곧 영생의 나라로 가는 나그네길인데, 이 나그네길 곳곳에는 많은 배척과 환란이 숨어 기다리고 있어서 한 순간도 마음을 놓고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해 놓고 있는 부분이 사도행전 20장과 21장인데요, 바울 사도와 그의 선교팀원들이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그리스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고린도에 내려가 3개월간 겨울을 난 다음에 그곳을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행길에 있었던 일들을 적고 있습니다. 20장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의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와 사도행전 20장 16절의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바울과 그의 선교팀원들은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나그넷길이 배척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듯이 바울의 예루살렘을 향한 나그넷길도 역시 가시밭길이요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유월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했고,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했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지만,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처럼 유월절을 택하지 않고 오순절을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바울이 일행과 함께 바다길이 위험한 겨울동안 고린도에서 지내고, 해동되자마자 유럽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예루살렘에 가져갈 선교기금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3-4월경에 닿는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아직 율법시대에 활동하셨지만, 바울은 교회시대에 활동하였으므로 교회창립기념의 의미가 있는 5-6월경에 닿는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작정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초청하여 당부한 말씀들 가운데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몇 가지 주목해야할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나그넷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성령님이 그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주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험한 가시밭길을 피해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길을 달려갈 길로, 목숨을 걸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감해야할 길로 받아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류하는 성도들과 선지자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을 각오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21장 4절을 보면, 두로지방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하고 있고, 또 10-14절을 보면,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얼마만큼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서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24절 이하를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강하게 만류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상황이 바울에게도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서 예수님도 바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 피하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았지만, 기도와 성령님에 의지해서 나그넷길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결국 험한 꼴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성령님의 감동이 그 길을 피해가라는 지시가 아니라 기도하라는 지시오,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일 곧 복음의 일을 생각하라는 지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던 것처럼,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21장 14절에 보면,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령해서 미래의 일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과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가가 하나님 앞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대제사장들과 공회와 헤롯 안디바와 두 차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것처럼, 바울도 대제사장들과 공회와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동일한 횟수만큼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방면하려고 했던 것처럼, 천부장 루시아와 총독 베스도 그리고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2세가 역시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이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하게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많은 탄압과 배척을 당하면서까지 천성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나그넷길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힘과 용기는 오로지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 세 번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들에게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와 기쁨 속에 머물게 했을 뿐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늘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잘 활용한다면 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을 얻을 수도 있고, 기계를 움직일 동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기와 같아서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까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해도 아무나 그 전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스위치입니다. 전기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전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 전기스위치입니다. 기도는 마치 전기스위치와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에게 접근하여 필요한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성령님의 능력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 주변에 전기가 아무리 흔하다 해도 스위치를 누르지 아니하면 필요한 전력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기운이 항상 우리 주변을 덮고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생활에 엄습해 오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고, 우리 생활에 불어 닥친 혹독한 추위를 막을 수 없고, 기계 돌아가듯 우리의 삶을 힘차게 돌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들의 삶에 ‘춥다,’ ‘어둡다,’ ‘힘이 없다’ 하는 불평들이 있다면, 기도하지 아니한 우리 자신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내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한 때나마 실망과 좌절과 비통함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삼일 만에 찾아온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부터는 기도라는 스위치를 통해서 변화된 능력의 삶을 살면서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달려간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기도라는 스위치를 통해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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