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차별없이, 값없이(롬 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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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차별없이, 값없이(롬 3:21-24) 유대인들은 안식일법 39가지와 율법조항 613개를 만들어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고 힘써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죄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는 별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칠 다른 쉬운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이 방법은 구약성경의 율법서들과 예언서들이 이미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이 방법을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해 보려고 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성공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어서 아무도 자기행위나 노력으로써는 도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은혜로 값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목표수치를 7 또 777이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런데 23절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 수치는 6 또 666이 됩니다. 그러니까 ‘미치지 못했다’ 또는 영어로 “fall short of”는 7미터 넓이의 죽음의 계곡이 있고 또 반드시 그 계곡을 뛰어넘어야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멀리뛰기를 해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8미터 정도는 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에게는 최고 6미터까지 밖에 뛸 재능이 없음으로 결국엔 모두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질 운명을 갖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 곧 만들어진 자 또는 만들어진 것에는 완전이란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숫자 7을 ‘하나님’ 또는 ‘완전’이라고 했을 때, 피조물인 인간은 숫자 6에 해당됩니다. 인간이 지성을 가진 고등한 동물이고 만물의 영장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준 것입니다. 숫자 7과 6은 어떻게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7은 ‘완전’을, 6은 ‘부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6은 7이 되지를 못합니다. 6은 타고난 운명이 ‘부족’이어서 ‘완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운명이나 숙명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식일법 39가지와 율법조항 613개를 만들어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외식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미치지 못함’ 또는 ‘부족’을 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는 인간이 부족한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이 부족을 채워 완전에 도달할 다른 방도가 없는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방도는 없는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에 도달할 방도는 없는가? 예, 방도가 있습니다. 그 방도를 알려주는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음의 계곡을 “은혜로 값없이”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계곡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 곧 숫자로는 8 또는 888에 해당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다리’를 놓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또 하나님이 그분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환언하면, ‘믿음’이란 통행증만 가지면 그 다리를 무사통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I=10,e=8,s=200,o=70,u=400,s=200)라는 이름은 헬라어 음가로 888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침의 표’나 ‘짐승의 표’는 이런 통행증의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천국행 인침의 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박해시대에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짐승의 표가 있었습니다. 주후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모든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로마신들의 형상에 참배하고 분향한 후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나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서인 ‘리벨루스’(libellus)를 소지하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리벨루스’는 증명서란 뜻인데 이 통행증이 바로 일종의 짐승의 표였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로마서 3장 21-24절에 쓰인 핵심 키워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없이, 은혜로 값없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로마서가 말하는 이 세 가지 복음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은 천국행 통행증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병든 육체와 정신을 고치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인간은 만들어진 자이고, 만들어진 자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또 과거에 아무리 못된 삶을 살았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지언정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세 전에 우리 죄지은 인간들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하나님 당신께는 우리 죄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저주와 죽음을 당하기로 예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잘나고 못난 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가치는 예수님을 우리 각자의 주로 고백하며 또 하나님을 죽어 무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살리신 분으로 믿는 것(롬 10:9)입니다. 하나님은 입으로 고백하는 이 믿음만을 보시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죽어 가는 모든 것, 또는 죽어 있는 상태,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혹은 영적인 것이든 간에 죽어 가는 것들 또는 죽어 있는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고, 또 다시 살아나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은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은 벌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기에 앞서 믿음을 보십니다. 결과를 보시기에 앞서 성실함을 보십니다. 과거를 묻기보다는 회개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과거보다는 현재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과거 다섯 남편이 있었고, 현재 한 남자와 동거 중이었던 한 불행한 여성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예수님은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한 여성에게 예수님은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 몰매를 맞아 죽을 상황에 처한 그 불쌍하고 가련한 여성의 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씩 가버리고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11)고 하셨습니다. 둘째,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차별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천국행 통행증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통행증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국적도 신분도 피부색도 나이도 학력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거기엔 무슨 ‘짱’이란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묻지 않습니다. 1800년 정조대왕이 죽고 정순왕후와 홍낙안이 이끄는 북인 벽파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드렸던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다수의 남인 시파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할 당시, 그 죄목들 가운데 한 가지가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첩의 자식을 서자라 하여 좌족(左族), 반사(半士), 사점박이 등으로 천대받고 과거도 보지 못하고 제사에서도 소외 받았으며 가계(家系) 상속에서도 소외 받기가 다반사였습니다. 19세기 초엽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1839년에 순교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바울서신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출신의 그리스도인이 나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친 죄수였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오네시모는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F자를 새기고 채찍을 맞은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삼기를 원했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노예로써가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서 영접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 16절에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오네시모를 노예로 받아들이지 말고 노예 이상의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형제로써 영접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일 뿐입니다. 셋째,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값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천국행 통행증에는 값이 없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곳이지 돈이나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이란 법정용어입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선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유죄한 인간을 믿음 하나만 보시고 무죄를 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취급하십니다. 믿는 자가 실질적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간주된 의’라고 말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었다 하여 ‘전가된 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것으로 전가되기 때문에 이를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넓은 의미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은혜라고 말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 없이 또 값없이 선물로 의롭다하심 곧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차별 없이, 그리고 값없이 천국행 통행증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롬 10:9).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죽음을 이긴 부활의 주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우리를 죽이려 하고 짓누르는 죽임의 생각, 죽임의 일들을 극복하고 살림의 생각, 살림의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또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차별 없는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무런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신 것처럼, 값없이 주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대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먼저 솔선하는 하나님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승리로 이끄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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