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는?(고전 1:18-25, 2:1-5)
본문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는?(고전 1:18-25, 2:1-5)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3개월간 머물고 있던 주후 54년에서 55년 사이에 그리스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아가야지방의 행정수도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일행이 제2차 선교여행 당시, 그러니까 지상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지 20년만인 주후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세우는 데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발생된 문제들에 대한 권면과 교인들이 직접 물어온 여러 질문들에 대한 해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핵심주제를 간략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면, 1장부터 4장까지는 파벌문제를 다루고 있고요, 5장은 성적인 타락, 6장은 소송문제와 방종, 7장은 결혼과 독신, 8장부터 10장까지는 우상숭배, 11장은 예배, 12장부터 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 15장은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장은 헌금에 관한 내용과 문안인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문제가 아닌 구원의 도리를 언급한 부분인 1장과 2장의 내용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는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그 해답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23절은 그 해답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道)란 영어로 메시지(message) 또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가장 무서운 형틀로써 죽음과 수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서기 30년에 이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당한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서시대에 지혜를 자랑하던 헬라인들의 다수가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에는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의 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혜를 자랑하는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 ‘어리석다’ 생각하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하면서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20절에서 바울은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세상에는 지혜 있는 자도 없고, 총명한 자도 없고, 학자도 없고, 철학자도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뜻은 그 다음 절인 21절에서 밝힌 대로, 이 세상의 지혜나 총명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수 없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지지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는 계시신학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자연계시의 한계점을 밝힌 사람입니다. 자연계시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8-23절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는 말씀은 자연계시를 밝히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이 자연계시로써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연만물을 통해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밝힐 수는 있지만,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의 도에 관한 사도들의 설교뿐이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장 22-23절의 말씀대로, 인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이유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장 21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도”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사도들의 설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을 자로 예정된 자들만이 믿어지는 신비한 비밀이라는 것이 종교개혁가 쟝 칼뱅의 설명입니다.
칼뱅은 성령의 조명론으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칼뱅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여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구원에 도달할 재간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의한 선택과 깨우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먼저 믿고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고, 또 성령을 보내어 그들을 가르쳐 깨우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의 그 미련함, 곧 “십자가의 도”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그 미련함,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나 총명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멸망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로마서 1장 22절은 인간들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바보들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인간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인가를 플라톤은 그의 동굴의 비유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로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은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와 같습니다. 폐쇄된 공간에 갇혀 정면의 벽만 바라보도록 족쇄에 묶인 인간은 배후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참된 실재라고 착각합니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다른 어떤 실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그 그림자야 말로 참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굴에 갇힌 죄수가 이런 큰 실수를 범하는 이유는 그가 그림자의 원천, 즉 불의 존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나 우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 ‘어리석다’ 하는 것은 그가 보이는 세계 배후에 숨어있는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족쇄 때문입니다.
동굴의 비유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죄수를 얽어매고 있던 족쇄가 풀립니다. 족쇄가 풀린 인간은 비로소 이리 저리 돌아다닐 수 있게 되고, 이것저것을 볼 수 있게 되면서 그가 이제까지 보고 알았던 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 그림자였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동굴의 비유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족쇄에서 풀린 죄수는 이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빛이 내리쬐는 대자연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한때 사단이란 족쇄에 매어 죄란 동굴에 갇혀 살았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족쇄를 풀어주셨습니다. 족쇄가 풀리고 자유를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죄의 동굴에서 나와 밝은 빛과 생명의 세계로 옮기었습니다. 이 해방, 이 빛과 생명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았던 자들은 오히려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해방은 표적이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5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는 뜻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굶주린 배를 채워줄 모세와 엘리야와 다윗을 합해놓은 인물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리꼈다는 뜻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분이라고 하니까 기피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았다는 뜻은 그들을 보이지 않는 이데아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데아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gnosis)이 필요한데, 이 지식을 가져다 줄 지혜를 구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지혜라고 하니까 그들의 눈에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구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찾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도 11장 1절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던 것들을 얻는 확실한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보지 못하고 찾던 것들을 얻는 분명한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에서 언급한대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3개월간 머물고 있던 주후 54년에서 55년 사이에 그리스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아가야지방의 행정수도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일행이 제2차 선교여행 당시, 그러니까 지상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지 20년만인 주후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세우는 데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발생된 문제들에 대한 권면과 교인들이 직접 물어온 여러 질문들에 대한 해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핵심주제를 간략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면, 1장부터 4장까지는 파벌문제를 다루고 있고요, 5장은 성적인 타락, 6장은 소송문제와 방종, 7장은 결혼과 독신, 8장부터 10장까지는 우상숭배, 11장은 예배, 12장부터 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 15장은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장은 헌금에 관한 내용과 문안인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문제가 아닌 구원의 도리를 언급한 부분인 1장과 2장의 내용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는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그 해답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23절은 그 해답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道)란 영어로 메시지(message) 또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가장 무서운 형틀로써 죽음과 수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서기 30년에 이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당한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서시대에 지혜를 자랑하던 헬라인들의 다수가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에는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의 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혜를 자랑하는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 ‘어리석다’ 생각하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하면서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20절에서 바울은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세상에는 지혜 있는 자도 없고, 총명한 자도 없고, 학자도 없고, 철학자도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뜻은 그 다음 절인 21절에서 밝힌 대로, 이 세상의 지혜나 총명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수 없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지지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는 계시신학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자연계시의 한계점을 밝힌 사람입니다. 자연계시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8-23절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는 말씀은 자연계시를 밝히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이 자연계시로써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연만물을 통해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밝힐 수는 있지만,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의 도에 관한 사도들의 설교뿐이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장 22-23절의 말씀대로, 인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이유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장 21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도”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사도들의 설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을 자로 예정된 자들만이 믿어지는 신비한 비밀이라는 것이 종교개혁가 쟝 칼뱅의 설명입니다.
칼뱅은 성령의 조명론으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칼뱅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여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구원에 도달할 재간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의한 선택과 깨우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먼저 믿고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고, 또 성령을 보내어 그들을 가르쳐 깨우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의 그 미련함, 곧 “십자가의 도”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그 미련함,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나 총명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멸망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로마서 1장 22절은 인간들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바보들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인간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인가를 플라톤은 그의 동굴의 비유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로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은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와 같습니다. 폐쇄된 공간에 갇혀 정면의 벽만 바라보도록 족쇄에 묶인 인간은 배후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참된 실재라고 착각합니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다른 어떤 실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그 그림자야 말로 참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굴에 갇힌 죄수가 이런 큰 실수를 범하는 이유는 그가 그림자의 원천, 즉 불의 존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나 우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 ‘어리석다’ 하는 것은 그가 보이는 세계 배후에 숨어있는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족쇄 때문입니다.
동굴의 비유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죄수를 얽어매고 있던 족쇄가 풀립니다. 족쇄가 풀린 인간은 비로소 이리 저리 돌아다닐 수 있게 되고, 이것저것을 볼 수 있게 되면서 그가 이제까지 보고 알았던 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 그림자였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동굴의 비유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족쇄에서 풀린 죄수는 이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빛이 내리쬐는 대자연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한때 사단이란 족쇄에 매어 죄란 동굴에 갇혀 살았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족쇄를 풀어주셨습니다. 족쇄가 풀리고 자유를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죄의 동굴에서 나와 밝은 빛과 생명의 세계로 옮기었습니다. 이 해방, 이 빛과 생명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았던 자들은 오히려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해방은 표적이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5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는 뜻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굶주린 배를 채워줄 모세와 엘리야와 다윗을 합해놓은 인물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리꼈다는 뜻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분이라고 하니까 기피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았다는 뜻은 그들을 보이지 않는 이데아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데아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gnosis)이 필요한데, 이 지식을 가져다 줄 지혜를 구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지혜라고 하니까 그들의 눈에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구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찾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도 11장 1절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던 것들을 얻는 확실한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보지 못하고 찾던 것들을 얻는 분명한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에서 언급한대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 이전글 믿음으로, 차별없이, 값없이(롬 3:21-24) 04.07.10
- 다음글 화해의 복음(고후 5:17-21) 04.07.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