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복음(고후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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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복음(고후 5:17-21)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바울은 갈등해결의 근거와 방법을 하나님에게서 찾았고, 그 내용을 적어 성도들에게 보낸 글이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간과 심각한 갈등관계에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 갈등을 해결하고 계신가를 설명하였고, 하나님의 방법이야말로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갈등해결의 열쇠임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갈등을 푸는 것이 인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요, 이 선결과제를 해결한 성도들이 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인간끼리의 갈등을 해결하는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3개월간 머물고 있던 주후 55년 가을 또는 겨울에 마케도니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서신들 중에서 가장 자서전적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은 교리나 실천적인 내용보다는 바울 자신과 관련된 서신으로써 눈물과 화해와 변호와 반대와 호소와 질책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초대교회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반면,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 바울 개인의 사정을 상세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울이 대다수의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격심한 박해말고도, 다른 일부 교인들로부터 인간적인 모멸과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둘째, 바울에게는 간질이나 안질로 추측되는 "사탄의 사자" 또는 "육체의 가시"라고 밝힌 신체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시세말로 얼짱이나 몸짱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2세기에 저술된 ꡔ바울행전ꡕ은 "작은 체구에, 맞닿은 양미간, 코는 좀 길고, 대머리에 다리는 휘었으며, 단단한 체격에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넷째, 바울은 그의 편지들은 권위가 있었으나 직접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바울 일행이 고린도에 18개월이나 장기체류했으면서도 교회로부터 전혀 사례비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체적 결함은 극심한 고문과 박해로 기인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못한 것은 교인들의 노예근성 때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 약 10만 명이 되는 도시에 노예가 3분의 1이나 되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상당수가 노예들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총3부로 되어 있습니다. 제1부, 1장에서 7장까지는 오해와 해명의 글로써, 여기서 바울은 사도직의 진실성과 본질을 논하고 있습니다. 제2부, 8장에서 9장까지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모금을 요청한 글입니다. 그리고 제3부, 10장에서 13장까지는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반박의 글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열광주의에 빠진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공격은 대체로 바울의 외모와 언변과 권위와 교훈에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들 적대자들의 활동으로 교회 내에 바울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여론이 나빠졌습니다. 그 결과가 앞서 보낸 편지에 대한 오해, 복음의 모호성에 대한 불만, 헌금호소에 대한 냉담한 반응,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여전한 의심, 바울의 행동이 불투명하다는 의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교회를 해롭게 한다는 오해, 멀리 있을 때에는 담대하다는 비난, 바울의 선교업적에 대한 배격 등으로 타나났습니다. 이러한 비난과 오해에 대해서 바울은 눈물로 화해로 변호로 대응합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성구가 제1부 해명의 글속에 있는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의 말씀입니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들 가운데 대표적인 성구는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입니다. 이 성구는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과 죽음의 세력에 지배받던 사람이 빛과 생명의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것은 가고 새것이 오며, 불행이 변하여 행복이 되고, 눈물이 기쁨이 되고, 불의가 정의가 되고, 반목이 화해가 되고, 갈등이 평화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축복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나머지 18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절씩 살펴볼 텐데요, 18절과 19절은 평형구절로써 동일한 설명을 두 번 반복한 것이기 때문에 묶어서 설명해도 좋을 것 같고요, 20-21절은 말씀의 결론입니다.
먼저 18절과 19절의 첫 소절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는 17절에 선포된 내용 곧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새로운 피조물’과 ‘새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님과 함께 이루신 성삼위 하나님의 작품인 점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또한 선포된 화해복음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화해복음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내리사랑에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끼리의 화해나 자연과의 친화도 ‘내리사랑’ 또는 ‘내가먼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18절과 19절의 중간소절들,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는 화해복음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에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화해복음의 하나님방식은 19절 중간소절과 21절 첫 소절을 종합해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우리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을 대신해서 죄인 삼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방식이란 것입니다. 이 하나님방식으로 우리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버림과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저주와 죽음을 받아야할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인간과의 사귐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자기가 취하는 대신에 자기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방법이요, 하나님의 화해정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18절과 19절의 마지막 소절에 나타난 대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위탁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최근 태통령탄핵소추안가결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개혁과 보수 또는 반노무현과 친노무현의 사생결단의 전쟁터에 내몰린 느낌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은 2,000년보다 더 오래 전에 율리우스 시저가 말했다고 하듯이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들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을 우상으로 삼기 때문인데, 이 점을 지적한 사람이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입니다.
베이컨은 1620년에 쓴 ꡔ노붐 오르가눔ꡕ(Novum Organum, 新器官)에서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훼방하는 편견으로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종족우상인데요, 인류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써 자기 편견에 맞는 사례에 마음이 동요되는 편견을 말합니다. 둘째는 동굴우상인데요, 동굴에 갇혀 있어서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 역할, 편협한 교육 등으로 생기는 편견을 말합니다. 셋째는 극장우상인데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보면서 허구에 미혹되듯이 잘못된 논증이나 학설에 미혹되는 편견을 말합니다. 넷째는 시장우상인데요, 시장에서 조심성 없이 주고받는 여론에서 생기는 편견을 말합니다. 예리한 지성적 판단 없이 여론에 휘둘리는 오늘의 현실이야말로 수백 년 전 베이컨이 지적한대로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싸움질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싸움을 하는 마당에서 해야 할 가장 좋은 일은 싸움을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시누이가 비록 때리는 제 어미를 막으며 싸움을 말린다 해도 그 시누이의 마음이 제 어미 쪽에 기울어져 있다면 맞는 며느리로써는 더 기막힌 일이 될 것입니다. 싸움을 말리는 척하면서 오히려 싸움을 부추기는 오늘의 현실이 앞서 이야기한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숭배 때문이 아닐까요? 진정한 화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당하신 것처럼 자기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설사 그것이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아서 무모한 짓이 되어버리고 만다 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복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배워 본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의 방법으로 존재하시고, 당신께서 친히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제물이 되시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20절 마지막 소절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모든 화해의 근원이자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기초로 하지 아니한 모든 화해들,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화해들은 정치적인 타협에 불과합니다. 정치적인 타협은 자기 쪽 이익에 따라서 언제든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늘 기대하는 새로운 피조물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는 화해복음의 하나님방식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바울은 갈등해결의 근거와 방법을 하나님에게서 찾았고, 그 내용을 적어 성도들에게 보낸 글이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간과 심각한 갈등관계에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 갈등을 해결하고 계신가를 설명하였고, 하나님의 방법이야말로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갈등해결의 열쇠임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갈등을 푸는 것이 인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요, 이 선결과제를 해결한 성도들이 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인간끼리의 갈등을 해결하는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3개월간 머물고 있던 주후 55년 가을 또는 겨울에 마케도니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서신들 중에서 가장 자서전적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은 교리나 실천적인 내용보다는 바울 자신과 관련된 서신으로써 눈물과 화해와 변호와 반대와 호소와 질책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초대교회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반면,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 바울 개인의 사정을 상세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울이 대다수의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격심한 박해말고도, 다른 일부 교인들로부터 인간적인 모멸과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둘째, 바울에게는 간질이나 안질로 추측되는 "사탄의 사자" 또는 "육체의 가시"라고 밝힌 신체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시세말로 얼짱이나 몸짱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2세기에 저술된 ꡔ바울행전ꡕ은 "작은 체구에, 맞닿은 양미간, 코는 좀 길고, 대머리에 다리는 휘었으며, 단단한 체격에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넷째, 바울은 그의 편지들은 권위가 있었으나 직접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바울 일행이 고린도에 18개월이나 장기체류했으면서도 교회로부터 전혀 사례비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체적 결함은 극심한 고문과 박해로 기인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못한 것은 교인들의 노예근성 때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 약 10만 명이 되는 도시에 노예가 3분의 1이나 되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상당수가 노예들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총3부로 되어 있습니다. 제1부, 1장에서 7장까지는 오해와 해명의 글로써, 여기서 바울은 사도직의 진실성과 본질을 논하고 있습니다. 제2부, 8장에서 9장까지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모금을 요청한 글입니다. 그리고 제3부, 10장에서 13장까지는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반박의 글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열광주의에 빠진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공격은 대체로 바울의 외모와 언변과 권위와 교훈에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들 적대자들의 활동으로 교회 내에 바울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여론이 나빠졌습니다. 그 결과가 앞서 보낸 편지에 대한 오해, 복음의 모호성에 대한 불만, 헌금호소에 대한 냉담한 반응,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여전한 의심, 바울의 행동이 불투명하다는 의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교회를 해롭게 한다는 오해, 멀리 있을 때에는 담대하다는 비난, 바울의 선교업적에 대한 배격 등으로 타나났습니다. 이러한 비난과 오해에 대해서 바울은 눈물로 화해로 변호로 대응합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성구가 제1부 해명의 글속에 있는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의 말씀입니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들 가운데 대표적인 성구는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입니다. 이 성구는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과 죽음의 세력에 지배받던 사람이 빛과 생명의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것은 가고 새것이 오며, 불행이 변하여 행복이 되고, 눈물이 기쁨이 되고, 불의가 정의가 되고, 반목이 화해가 되고, 갈등이 평화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축복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나머지 18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절씩 살펴볼 텐데요, 18절과 19절은 평형구절로써 동일한 설명을 두 번 반복한 것이기 때문에 묶어서 설명해도 좋을 것 같고요, 20-21절은 말씀의 결론입니다.
먼저 18절과 19절의 첫 소절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는 17절에 선포된 내용 곧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새로운 피조물’과 ‘새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님과 함께 이루신 성삼위 하나님의 작품인 점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또한 선포된 화해복음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화해복음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내리사랑에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끼리의 화해나 자연과의 친화도 ‘내리사랑’ 또는 ‘내가먼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18절과 19절의 중간소절들,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는 화해복음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에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화해복음의 하나님방식은 19절 중간소절과 21절 첫 소절을 종합해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우리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을 대신해서 죄인 삼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방식이란 것입니다. 이 하나님방식으로 우리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버림과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저주와 죽음을 받아야할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정하셨고, 자신에게는 인간과의 사귐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자기가 취하는 대신에 자기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방법이요, 하나님의 화해정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18절과 19절의 마지막 소절에 나타난 대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위탁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최근 태통령탄핵소추안가결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개혁과 보수 또는 반노무현과 친노무현의 사생결단의 전쟁터에 내몰린 느낌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은 2,000년보다 더 오래 전에 율리우스 시저가 말했다고 하듯이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들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을 우상으로 삼기 때문인데, 이 점을 지적한 사람이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입니다.
베이컨은 1620년에 쓴 ꡔ노붐 오르가눔ꡕ(Novum Organum, 新器官)에서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훼방하는 편견으로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종족우상인데요, 인류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써 자기 편견에 맞는 사례에 마음이 동요되는 편견을 말합니다. 둘째는 동굴우상인데요, 동굴에 갇혀 있어서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 역할, 편협한 교육 등으로 생기는 편견을 말합니다. 셋째는 극장우상인데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보면서 허구에 미혹되듯이 잘못된 논증이나 학설에 미혹되는 편견을 말합니다. 넷째는 시장우상인데요, 시장에서 조심성 없이 주고받는 여론에서 생기는 편견을 말합니다. 예리한 지성적 판단 없이 여론에 휘둘리는 오늘의 현실이야말로 수백 년 전 베이컨이 지적한대로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싸움질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싸움을 하는 마당에서 해야 할 가장 좋은 일은 싸움을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시누이가 비록 때리는 제 어미를 막으며 싸움을 말린다 해도 그 시누이의 마음이 제 어미 쪽에 기울어져 있다면 맞는 며느리로써는 더 기막힌 일이 될 것입니다. 싸움을 말리는 척하면서 오히려 싸움을 부추기는 오늘의 현실이 앞서 이야기한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숭배 때문이 아닐까요? 진정한 화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당하신 것처럼 자기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설사 그것이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아서 무모한 짓이 되어버리고 만다 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복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배워 본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의 방법으로 존재하시고, 당신께서 친히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제물이 되시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20절 마지막 소절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모든 화해의 근원이자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기초로 하지 아니한 모든 화해들,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화해들은 정치적인 타협에 불과합니다. 정치적인 타협은 자기 쪽 이익에 따라서 언제든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늘 기대하는 새로운 피조물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는 화해복음의 하나님방식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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