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삶(살전 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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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삶(살전 2:19-20)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부의 도시로써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데살리(Thessally)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바울일행이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은 주후 51년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 심해서 바울일행이 이곳에 머문 것은 고작 세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작은 신생교회는 바울의 선교에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이자, 신약성서 27권 전체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글입니다.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철학의 고장 아테네를 거쳐 그리스 남단 고린도에 도착해서 1년 6개월간 정착한 바울은 51년에서 52년 사이에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에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머물다 내려온 디모데로부터 교회소식을 전해 듣고 큰 기쁨과 힘을 얻습니다.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 있었고, 가르침대로 잘 행하고 있었으며,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높이 평가하면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재림의 기대 때문에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신자가 있었는가하면, 부정한 생활을 끊지 못하는 신자도 있었고, 재림이 있기 전에 죽은 신자들에 대한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장과 5장에서 여러 가지 말로 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이런 몇 가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극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1장 3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보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행한 일, 믿음으로 이뤄진 순종, 믿음에서 나온 헌신을 말합니다. 또 ‘사랑의 수고’란 사랑으로 행한 수고들, 사랑의 봉사, 사랑실천을 위해서 흘린 땀을 말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것, 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아니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극찬을 들은 것은 그들의 노동과 수고와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란 삼박자에 맞춰서 성도들이 힘차게 부른 땀과 수고와 인내에 감격하였고,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장 6절과 2장 14절의 말씀대로 많은 환난 중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바울일행과 주님을 본받았고,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도 믿음 위에 굳게 섰던 것처럼, 성도들이 같은 동족인 헬라인에게 박해를 받고도 예루살렘교회를 본받아 믿음 위에 굳게 섰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영광이요 기쁨이 된 세 번째 이유는 2장 13절의 말씀대로 바울일행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비록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이들에게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3장 7절, 9절 그리고 4장 9절의 말씀대로 궁핍과 환난 중에서 성도들이 나타내보인 믿음과 사랑이 바울일행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은 3장 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은 바울일행이 뿌린 수고의 결실이었으므로, 이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삼았고,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할 것인가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땀과 수고와 인내는 바울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어떠한 상급으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보상할까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을 받고 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4장 3절에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고,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 삶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가져다주는 열매요 결정체입니다.
역사하는 믿음 없이, 수고하는 사랑 없이, 인내하는 소망 없이 이뤄지는 것은 음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흘리는 땀이 아무리 많고, 수고와 인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거룩한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원칙은 가정이나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공동체내에서 동등하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지 않고, 소망으로 하지 않은 노동과 수고와 인내는 다 이기심과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음란한 것이고,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저자는 1장 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일, 사랑으로 행하는 일, 소망으로 행하는 일은 주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고,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치 가마를 타기도 하고 가마를 메기도 하는 일처럼 피차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는 ‘소망'이란 이름의 가마꾼이, 뒤에서는 '믿음'이란 이름의 가마꾼이, 또 가마에는 '사랑'이란 신부가 타고서 신랑이신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신부를 태우고, 소망은 앞에서 인도하고, 앞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은 소망이 이끄는 대로 좇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 함께 역사할 때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문학자 오스카 와일드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베풀어준 몇몇 사람들을 그 후에 다시 만나시는 것을 가상으로 꾸며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술주정꾼이었습니다. 그는 폐인이 다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술주정꾼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앉은뱅이였을 때, 당신이 나를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동안 직업을 찾아 헤맸지만, 마음에 드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만난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내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고독을 참을 수 없어서 다시 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불량자였습니다. 그 불량자는 이웃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였습니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게 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결국 나는 화풀이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예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위의 세 사람이 전에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삶을 믿음으로 살지 않고, 소망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열매가 없었던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할지라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영광과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일,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일, 소망으로 행하지 않는 일들은 음란한 것이고, 그 속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더라도 변화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악습을 다시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저자를 알 수 없는 「토끼의 보이지 않는 거북이 사랑」이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옛날에 거북이를 진정으로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속으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보지 않을래.” 그날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는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 그래서 경주는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며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곧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믿음으로 하는 일이고, 무엇이 사랑으로 하는 일이며, 무엇이 소망으로 하는 일입니까? 그것은 티 내지 않는 것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이고, 관심을 갖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높여지고 나는 무너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개화기 때, 6조(六曹)에서의 점심식사는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판서나 참판과 같은 당상관(堂上官)이 맨 처음 먹고 나면 그 상을 물려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과 같은 당하관(堂下官)이 먹고, 다시 그 상이 물려져 아전이 먹고, 아전이 물려 종들이 먹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그토록 길었습니다. 이를 ‘네 물림 상’이라 불렀는데, 윗사람들은 상물림을 배려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얼굴이 메말라 수척해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를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하는 일에 관심과 배려와 양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하는 일, 사랑으로 행하는 일, 소망으로 행하는 일은 주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였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으로 받으시고 기쁨으로 여기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행하는 일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흘린 땀방울이 믿음으로 행한 노동이 되고, 우리의 노력한 수고가 사랑으로 행한 것이 되고, 우리가 인내하며 견뎌온 일들이 소망으로 행한 일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거룩하여지며,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으로 받아드려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부의 도시로써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데살리(Thessally)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바울일행이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은 주후 51년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 심해서 바울일행이 이곳에 머문 것은 고작 세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작은 신생교회는 바울의 선교에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이자, 신약성서 27권 전체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글입니다.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철학의 고장 아테네를 거쳐 그리스 남단 고린도에 도착해서 1년 6개월간 정착한 바울은 51년에서 52년 사이에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에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머물다 내려온 디모데로부터 교회소식을 전해 듣고 큰 기쁨과 힘을 얻습니다.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 있었고, 가르침대로 잘 행하고 있었으며,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높이 평가하면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재림의 기대 때문에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신자가 있었는가하면, 부정한 생활을 끊지 못하는 신자도 있었고, 재림이 있기 전에 죽은 신자들에 대한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장과 5장에서 여러 가지 말로 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이런 몇 가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극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1장 3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보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행한 일, 믿음으로 이뤄진 순종, 믿음에서 나온 헌신을 말합니다. 또 ‘사랑의 수고’란 사랑으로 행한 수고들, 사랑의 봉사, 사랑실천을 위해서 흘린 땀을 말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것, 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아니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극찬을 들은 것은 그들의 노동과 수고와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란 삼박자에 맞춰서 성도들이 힘차게 부른 땀과 수고와 인내에 감격하였고,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장 6절과 2장 14절의 말씀대로 많은 환난 중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바울일행과 주님을 본받았고,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도 믿음 위에 굳게 섰던 것처럼, 성도들이 같은 동족인 헬라인에게 박해를 받고도 예루살렘교회를 본받아 믿음 위에 굳게 섰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영광이요 기쁨이 된 세 번째 이유는 2장 13절의 말씀대로 바울일행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비록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이들에게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3장 7절, 9절 그리고 4장 9절의 말씀대로 궁핍과 환난 중에서 성도들이 나타내보인 믿음과 사랑이 바울일행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은 3장 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은 바울일행이 뿌린 수고의 결실이었으므로, 이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삼았고,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할 것인가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땀과 수고와 인내는 바울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어떠한 상급으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보상할까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을 받고 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4장 3절에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고,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 삶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가져다주는 열매요 결정체입니다.
역사하는 믿음 없이, 수고하는 사랑 없이, 인내하는 소망 없이 이뤄지는 것은 음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흘리는 땀이 아무리 많고, 수고와 인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거룩한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원칙은 가정이나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공동체내에서 동등하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지 않고, 소망으로 하지 않은 노동과 수고와 인내는 다 이기심과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음란한 것이고,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저자는 1장 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일, 사랑으로 행하는 일, 소망으로 행하는 일은 주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고, 그 속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치 가마를 타기도 하고 가마를 메기도 하는 일처럼 피차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는 ‘소망'이란 이름의 가마꾼이, 뒤에서는 '믿음'이란 이름의 가마꾼이, 또 가마에는 '사랑'이란 신부가 타고서 신랑이신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신부를 태우고, 소망은 앞에서 인도하고, 앞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은 소망이 이끄는 대로 좇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 함께 역사할 때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문학자 오스카 와일드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베풀어준 몇몇 사람들을 그 후에 다시 만나시는 것을 가상으로 꾸며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술주정꾼이었습니다. 그는 폐인이 다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술주정꾼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앉은뱅이였을 때, 당신이 나를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동안 직업을 찾아 헤맸지만, 마음에 드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만난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내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고독을 참을 수 없어서 다시 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불량자였습니다. 그 불량자는 이웃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였습니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게 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결국 나는 화풀이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예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위의 세 사람이 전에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삶을 믿음으로 살지 않고, 소망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열매가 없었던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할지라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영광과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일,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일, 소망으로 행하지 않는 일들은 음란한 것이고, 그 속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더라도 변화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악습을 다시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저자를 알 수 없는 「토끼의 보이지 않는 거북이 사랑」이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옛날에 거북이를 진정으로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속으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보지 않을래.” 그날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는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 그래서 경주는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며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곧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믿음으로 하는 일이고, 무엇이 사랑으로 하는 일이며, 무엇이 소망으로 하는 일입니까? 그것은 티 내지 않는 것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이고, 관심을 갖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높여지고 나는 무너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개화기 때, 6조(六曹)에서의 점심식사는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판서나 참판과 같은 당상관(堂上官)이 맨 처음 먹고 나면 그 상을 물려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과 같은 당하관(堂下官)이 먹고, 다시 그 상이 물려져 아전이 먹고, 아전이 물려 종들이 먹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그토록 길었습니다. 이를 ‘네 물림 상’이라 불렀는데, 윗사람들은 상물림을 배려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얼굴이 메말라 수척해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를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하는 일에 관심과 배려와 양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하는 일, 사랑으로 행하는 일, 소망으로 행하는 일은 주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였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으로 받으시고 기쁨으로 여기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행하는 일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흘린 땀방울이 믿음으로 행한 노동이 되고, 우리의 노력한 수고가 사랑으로 행한 것이 되고, 우리가 인내하며 견뎌온 일들이 소망으로 행한 일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거룩하여지며,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으로 받아드려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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