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1:18-19, 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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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1:18-19, 6:11-12)
바울은 67년에 로마의 맘머티메 토굴감방에 갇혀 있다가 네로에 의해서 순교당하셨습니다. 본 서신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죽기 전에 에베소교회를 맡아보고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 교회는 세 가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박해로 고통을 겪었고; 둘째, 내부의 적인 이단의 도전 때문에 곤란을 겪었으며; 셋째, 교회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질서문제, 치리문제, 예배문제 등으로 성장통을 겪었습니다. 성서가 기록된 것도 대부분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신앙의 끈을 놓지 않도록 권면하고, 박해자를 향해서는 기독교의 무흠함을 변호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이단에 직면해서는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및 예배전통을 전달코자 하였으며, 후대에 가서는 니케아신조와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만들어 이단사상의 유입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또 교회가 성장하면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글들을 썼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내부에 침투한 이단처리와 일군선임 등에 관해서 기록한 목회서신입니다.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에 관련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두 차례나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싸움이란 것을 과연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걸까요? 선한 싸움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싸움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얼마간의 상처를 남기게 되고 상처는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가급적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싸움이 다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싸움도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잘만 싸우면 싸우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싸움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요. 문제가 없으면 발전이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적당한 싸움은 발전과 성장을 가져옵니다. 싸움이 지나치거나 싸움이 전혀 없어도 인간사회는 쇠퇴하게 됩니다. 역사가 토인비의 생각을 잠시 빌린다면, 결국 싸움을 지혜롭게 잘 해야 인간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워야 잘 싸우는 것일까요?
톨스토이의 민화들 가운데 「불은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작은 불일 때 꺼야 큰 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을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이미 입증된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은 싸움일 때 큰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진화를 해야 합니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수 언도를 받고 20년간 복역한 신영복 씨가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눠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上策)은 못되고 중책(中策)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승패(勝敗)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싸움은 이단들과의 싸움을 말한 것입니다만, 이단들과의 싸움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싸움에 지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는데요, 싸움에 이긴다고 해도 그로 인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잃게 되면 결국 싸움에 진 것이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을 이길 기회를 놓치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지는 것이 때로는 이기는 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지는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는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지고도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남지 않게 싸울 수는 있을까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앞에서 싸움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얼마간의 상처를 남기게 되고 상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고 했습니다만, 싸우는 양자가 모두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한다면, 믿음으로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고, 소망 중에 싸운다면, 그 싸움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보다는 오히려 더 좋을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부부 싸움을 위한 십계」에도 보면, “첫째, 승리자가 되기보다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힘쓰라. 승리자 곁에는 패배자만 남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싸우되, "주장하기보다는 느끼게 하고, 설득시키기보다는 공감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서,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상처 없는 싸움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또 6장 11-12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할 때, 상처 없는 싸움이 가능하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관계에 얽힌 싸움은 반드시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권면하신 방법으로 임해야 할줄 믿습니다. 그래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몇 가지 싸움의 방식을 권해주셨습니다.
첫째, 믿음의 싸움을 권하셨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하라는 것은 싸우는 방식을 신뢰와 신실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신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신실함에서 나오고, 신실함은 신뢰에서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언제나 신뢰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신뢰하게 되면, 그분께 대해서 우리가 신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에게 신실하지 않으면,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또 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신실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뢰와 신실함은 하나입니다. 이런 신뢰와 신실함이 쌓여있는 사람끼리의 싸움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장 5절의 말씀대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밑바닥에 깔린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둘째,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1:18)고 하셨습니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신 것은 진리를 사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단들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라(1:3, 6:3)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이란 말을 두 번 사용하였고, 이밖에도 “교훈,” “바른 교훈”과 “선한 교훈”이란 표현을 여덟 번 사용하였습니다(1:10-11, 4:6, 6:1). 바울은 또 2장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의 목적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진리”라는 표현을 다섯 번 이상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도들로 하여금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고(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케 하라(6:3)고 하였으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4:7)고 하였습니다. 또한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4:13)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셋째,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1:19)고 권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밖에도 “선한 양심”(1:5)과 “깨끗한 양심”(3:9)이란 표현도 쓰셨습니다. 양심은 대부분 후천적으로 길들어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이 소속한 사회집단의 문화, 종교, 도덕, 윤리, 관습에 의해서 길들어지고 교양되어집니다. 따라서 양심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다 옳거나 바른 것은 아닙니다. 양심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말한 슈퍼에고(superego)에 해당됩니다. 슈퍼에고는 마치 달리는 말에 부착한 재갈과 같은 것입니다. 본능대로 날뛰려 하는 말을 이드(id)라고 한다면, 말을 탄 기수는 에고(ego)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날뛰는 말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말의 입에 물린 재갈이라면 그 재갈이 바로 슈퍼에고 또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안전하게 타기 위해서는 재갈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재갈을 물렸다고 해서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갈은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아서 지나치게 사용해도 문제가 생기고 사용해야할 때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됩니다. 적절한 재갈과 브레이크의 사용, 이것을 선한 양심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갈과 브레이크가 달린 싸움, 이런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닐까요? 「부부싸움을 잘하기 위한 십계」를 보면,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라. 타임아웃을 지키라. 무대를 친정까지 확대하지 말라. 인격 모독을 피하라. 집에 불이 났을 때 이외에는 고함을 지르지 말라.” 등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절제된 싸움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착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으로 하는 싸움일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불렀고, 이 “선하다”는 표현을 디모데전서에서 16번 이상 사용했습니다(1:5,8; 1:18-19; 2:3,10; 3:1,7; 4:4,6; 5:10,25; 6:11-13,18).
바울은, 넷째, “경건”이란 말을 디모데전서에서 아홉 차례나 썼습니다(1:9; 2:2; 3:16; 4:7-8; 6:3-11). 바울은 4장 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고,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6장 11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함을 잃는 순간 인간은 추락합니다. 경건함이 없는 싸움은 믿음의 싸움이 될 수 없고,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단독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던 라인홀트 메스너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서 친동생을 잃는 등 수많은 동료가 산에서 추락사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메스너는 죽은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ꡔ죽음의 지대ꡕ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경건함을 잃는 순간 인간은 추락한다.”고 말했습니다. 높은 산에 오를 때에 가졌던 진지함과 경건함이 산을 정복하고 내려올 때에 잃기 쉽고, 결국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8천 미터 이상 되는 열 네 개의 봉우리를 모두 정복한 한국 등반대원들 가운데 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산을 등정한 고상돈 대원이 79년 알래스카의 매킨리(6,194m) 봉에 등정한 후 하산 길에 추락사했고, 95년에 빛고을 브로드피크 원정대가 브로드(8,047m) 봉에 등정한 후 하산 길에 박현재 대원이 추락사했고, 동국대 산악부원 및 산악부원 출신 8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길에 안진섭 대원이 추락사했습니다. 금년(2004) 5월 18일에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1차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하던 중에 해발 8700미터 부근에서 박무택 대원이 숨졌고, 구조하기 위해 갔던 백준호 대원과 장민 대원도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함이 없는 싸움은 죽음의 계곡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은 놓아두면 끄지 못합니다.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싸움에 이기는 것만이 상책이 아닙니다. 이기고서도 모든 것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싸워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패배자가 없이 승자만 남게 됩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참된 승리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이 됐든, 직장 동료와의 싸움이 됐든, 이단자들과의 싸움이 됐든 그 어떤 싸움이든지 간에 그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되어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67년에 로마의 맘머티메 토굴감방에 갇혀 있다가 네로에 의해서 순교당하셨습니다. 본 서신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죽기 전에 에베소교회를 맡아보고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 교회는 세 가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박해로 고통을 겪었고; 둘째, 내부의 적인 이단의 도전 때문에 곤란을 겪었으며; 셋째, 교회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질서문제, 치리문제, 예배문제 등으로 성장통을 겪었습니다. 성서가 기록된 것도 대부분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신앙의 끈을 놓지 않도록 권면하고, 박해자를 향해서는 기독교의 무흠함을 변호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이단에 직면해서는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및 예배전통을 전달코자 하였으며, 후대에 가서는 니케아신조와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만들어 이단사상의 유입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또 교회가 성장하면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글들을 썼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내부에 침투한 이단처리와 일군선임 등에 관해서 기록한 목회서신입니다.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에 관련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두 차례나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싸움이란 것을 과연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걸까요? 선한 싸움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싸움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얼마간의 상처를 남기게 되고 상처는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가급적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싸움이 다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싸움도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잘만 싸우면 싸우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싸움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요. 문제가 없으면 발전이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적당한 싸움은 발전과 성장을 가져옵니다. 싸움이 지나치거나 싸움이 전혀 없어도 인간사회는 쇠퇴하게 됩니다. 역사가 토인비의 생각을 잠시 빌린다면, 결국 싸움을 지혜롭게 잘 해야 인간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워야 잘 싸우는 것일까요?
톨스토이의 민화들 가운데 「불은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작은 불일 때 꺼야 큰 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을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이미 입증된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은 싸움일 때 큰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진화를 해야 합니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수 언도를 받고 20년간 복역한 신영복 씨가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눠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上策)은 못되고 중책(中策)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승패(勝敗)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싸움은 이단들과의 싸움을 말한 것입니다만, 이단들과의 싸움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싸움에 지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는데요, 싸움에 이긴다고 해도 그로 인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잃게 되면 결국 싸움에 진 것이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을 이길 기회를 놓치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지는 것이 때로는 이기는 것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지는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는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지고도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남지 않게 싸울 수는 있을까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앞에서 싸움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얼마간의 상처를 남기게 되고 상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고 했습니다만, 싸우는 양자가 모두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한다면, 믿음으로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고, 소망 중에 싸운다면, 그 싸움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보다는 오히려 더 좋을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부부 싸움을 위한 십계」에도 보면, “첫째, 승리자가 되기보다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힘쓰라. 승리자 곁에는 패배자만 남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싸우되, "주장하기보다는 느끼게 하고, 설득시키기보다는 공감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서,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상처 없는 싸움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또 6장 11-12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할 때, 상처 없는 싸움이 가능하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관계에 얽힌 싸움은 반드시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권면하신 방법으로 임해야 할줄 믿습니다. 그래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몇 가지 싸움의 방식을 권해주셨습니다.
첫째, 믿음의 싸움을 권하셨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하라는 것은 싸우는 방식을 신뢰와 신실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신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신실함에서 나오고, 신실함은 신뢰에서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언제나 신뢰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신뢰하게 되면, 그분께 대해서 우리가 신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에게 신실하지 않으면,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또 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신실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뢰와 신실함은 하나입니다. 이런 신뢰와 신실함이 쌓여있는 사람끼리의 싸움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장 5절의 말씀대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밑바닥에 깔린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둘째,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1:18)고 하셨습니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신 것은 진리를 사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단들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라(1:3, 6:3)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이란 말을 두 번 사용하였고, 이밖에도 “교훈,” “바른 교훈”과 “선한 교훈”이란 표현을 여덟 번 사용하였습니다(1:10-11, 4:6, 6:1). 바울은 또 2장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의 목적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진리”라는 표현을 다섯 번 이상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도들로 하여금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고(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케 하라(6:3)고 하였으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4:7)고 하였습니다. 또한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4:13)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셋째,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1:19)고 권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밖에도 “선한 양심”(1:5)과 “깨끗한 양심”(3:9)이란 표현도 쓰셨습니다. 양심은 대부분 후천적으로 길들어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이 소속한 사회집단의 문화, 종교, 도덕, 윤리, 관습에 의해서 길들어지고 교양되어집니다. 따라서 양심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다 옳거나 바른 것은 아닙니다. 양심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말한 슈퍼에고(superego)에 해당됩니다. 슈퍼에고는 마치 달리는 말에 부착한 재갈과 같은 것입니다. 본능대로 날뛰려 하는 말을 이드(id)라고 한다면, 말을 탄 기수는 에고(ego)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날뛰는 말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말의 입에 물린 재갈이라면 그 재갈이 바로 슈퍼에고 또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안전하게 타기 위해서는 재갈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재갈을 물렸다고 해서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갈은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아서 지나치게 사용해도 문제가 생기고 사용해야할 때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됩니다. 적절한 재갈과 브레이크의 사용, 이것을 선한 양심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갈과 브레이크가 달린 싸움, 이런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닐까요? 「부부싸움을 잘하기 위한 십계」를 보면,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라. 타임아웃을 지키라. 무대를 친정까지 확대하지 말라. 인격 모독을 피하라. 집에 불이 났을 때 이외에는 고함을 지르지 말라.” 등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절제된 싸움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착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으로 하는 싸움일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불렀고, 이 “선하다”는 표현을 디모데전서에서 16번 이상 사용했습니다(1:5,8; 1:18-19; 2:3,10; 3:1,7; 4:4,6; 5:10,25; 6:11-13,18).
바울은, 넷째, “경건”이란 말을 디모데전서에서 아홉 차례나 썼습니다(1:9; 2:2; 3:16; 4:7-8; 6:3-11). 바울은 4장 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고,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6장 11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함을 잃는 순간 인간은 추락합니다. 경건함이 없는 싸움은 믿음의 싸움이 될 수 없고,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단독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던 라인홀트 메스너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서 친동생을 잃는 등 수많은 동료가 산에서 추락사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메스너는 죽은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ꡔ죽음의 지대ꡕ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경건함을 잃는 순간 인간은 추락한다.”고 말했습니다. 높은 산에 오를 때에 가졌던 진지함과 경건함이 산을 정복하고 내려올 때에 잃기 쉽고, 결국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8천 미터 이상 되는 열 네 개의 봉우리를 모두 정복한 한국 등반대원들 가운데 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산을 등정한 고상돈 대원이 79년 알래스카의 매킨리(6,194m) 봉에 등정한 후 하산 길에 추락사했고, 95년에 빛고을 브로드피크 원정대가 브로드(8,047m) 봉에 등정한 후 하산 길에 박현재 대원이 추락사했고, 동국대 산악부원 및 산악부원 출신 8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길에 안진섭 대원이 추락사했습니다. 금년(2004) 5월 18일에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1차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하던 중에 해발 8700미터 부근에서 박무택 대원이 숨졌고, 구조하기 위해 갔던 백준호 대원과 장민 대원도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함이 없는 싸움은 죽음의 계곡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은 놓아두면 끄지 못합니다. 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싸움에 이기는 것만이 상책이 아닙니다. 이기고서도 모든 것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싸워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패배자가 없이 승자만 남게 됩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참된 승리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이 됐든, 직장 동료와의 싸움이 됐든, 이단자들과의 싸움이 됐든 그 어떤 싸움이든지 간에 그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되어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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