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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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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098 2004.07.2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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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약 2:14-26)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이복형제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주후 6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수신자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 두 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야고보서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인 글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한 글입니다. 바울이 강조한 ‘칭의의 믿음’은 구원을 받기위한 믿음으로써 죄인에게 요구되는 믿음이고,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순종과 성화를 위한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바울도 서신서들에서 그 대상이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들일 경우에는 반드시 선행과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선행을 위한 것이라고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분명하게 말하였고,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로마서 7장 4절에서 강조하였습니다.
‘구원파’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구원파 목사인 박옥수는 죄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말로 접근합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깨달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로 죄책감을 완전히 없애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정통교회들에서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신자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영생의 약속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산자들의 몸의 변형이 있기까지는 구원을 받았다하더라도, 구원은 약속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본능에 크든 작든 지배를 받게 되는 성품과 인격은 여전히 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파에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박옥수는 의지적인 회개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피동적으로 깨닫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선행이나 성화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달콤함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아서 구원파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총 108절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절반인 54절이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절 가운데 한절이 “~하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크게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관한 것입니다. 4장 7-8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는 “주 앞에서 낮추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1장 22절에서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장 25절에서는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2장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장 17절에서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2장 1절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4장 11절에서는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고, 5장 9절에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1장 26절에서는 자기 혀를 재갈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3장 2절에서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4-5절에서는 작은 키로 큰 배를 조종하듯이,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세치 혀는 무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3장 6-8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치 혀의 놀림이 형제나 자매에게 주는 해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소망 중에 인내로 하라는 것입니다. 1장 2절에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고, 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였으며, 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장 7-8절에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였고,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언급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사랑으로 행하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로 행하지 않고도 구원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2장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명확하게 언급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살림의 일을 예수님이 본받아 하셨고, 또 바울이 에베소서 5장 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본받아 살림의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죽임의 일을 일삼던 우리가 변화되어 살림의 일을 행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일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변화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변화란 흑암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함’이란 바로 이 살림의 일, 재창조의 일, 건설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임의 생각, 죽임의 말, 죽임의 행동은 사단의 일이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도대체 행함이 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의 변화, 말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살림의 일이 없는 믿음, 삶 속에 변화가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질책을 받아야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잘 믿는다고 자만했던 바리새인들이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소홀히 했습니까? 정기적으로 금식을 안했습니까? 십일조를 제대로 안 바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눅 18:12), 613개의 율법을 지키고, 그것도 부족해서 39개의 더욱 엄격한 율법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이상 경건할 수 없고, 그 이상의 종교인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요 7:19)고 하셨고, “외식하는”(마 23:23) 자들이라 하셨으며, 그들보다 의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5:20). 그들 가운데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마 3:7)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엄청난 독설을 받아야했습니까?
첫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기 때문입니다(마 23:23).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면서도 매사에 믿음으로 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하지 않았고, 소망 중에 인내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말,  그들의 행동은 살림의 결과를 낳지 못하고, 언제나 죽임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막 7:8)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막 7:1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경배라고 하셨습니다(막 7:7).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자랑하는 지식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익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했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눈먼 장님이란 사실을 몰랐고, 그들은 자신들이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진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무식했더라면 좋았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잘났다고 뻐기고 다니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넷째,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변화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탄압함으로써 결국 수난의 민족으로 오래도록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살림의 일과 창조적인 일, 그리고 긍정의 변화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에 대해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ꡔ역사의 연구ꡕ, [제4편 문명의 쇠퇴]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일시적인 자아를 우상화하는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례는 신약성경에 폭로된 유대인의 과오이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시리아 문명의 요람기에 시작하여 예언자 시대가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대의 백성은 일신교의 종교사상에 도달함으로써, 그 주위에 사는 시리아 사회의 다른 민족들보다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보물을 강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으나, 그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단계이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과도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을 우상화하는 과오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확실히 무상(無上)의 정신적 통찰력을 타고난 민족이었지만,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진리를 발견한 후에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절반진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유일한 참신'을 이스라엘이 발견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신의 선민임을 계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절반진리는, 그들이 가까스로 도달한 일시적인 정신적 탁월성을 신이 자기들에게 영원한 성스런 약속으로써 부여한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과오에 빠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 천부의 재능을 어리석게도 땅에 숨겨둠으로써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던 그들은 신이 나사렛 예수의 강림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제공한 한층 더 큰 보물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였습니다.
중국도 당나라 때에 이미 한차례 기독교(景敎)를 수용한 경험이 있고, 또 1583년 9월, 중국 광동성에 도착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가 유럽의 발전된 과학학문을 받아드렸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동서양학문이 결합된 변증법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했습니까? 유럽의 각종 문물과 번역서들이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는 사절들에 의해서 유입되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들을 접하고도 배척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몰아 1만여 명이나 죽었는가하면,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고, 실학자들을 정치적으로 크게 탄압하였습니다.
이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양반세력들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에 위기의식을 느껴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청(淸)나라를 제외한 다른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를 꺼려 강경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근세 들어 겪게 되는 엄청난 외세에 대응할 만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고립되는 불행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발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발전이 없다는 것은 쇠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해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에 변화가 일고 있는지, 행함은 있는지, 과연 우리는 매사에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지, 사랑으로 행하고 있는지, 소망 중에 인내로 행하고 있는지를 이 시간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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