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벧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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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벧후 1:1-11)
베드로후서는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고, 1장 16절부터 18절에서는 변화산의 예수님을 목격한 자로, 3장 1절에서는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낸다고 말함으로써 본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인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전서와 마찬가지로 네로 황제 박해 때인 주후 64년에서 67년 사이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지금의 터키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1장 14절,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서와도 같은 글입니다.
베드로는 전서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했다면, 후서에서는 교회 내부에 침투한 이단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언제나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물리적인 박해요, 둘째는 내부의 이단자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이 이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들에 가장 위협적인 박해세력은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이었고, 가장 위협적인 이단세력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40-50년간의 기독교 박해는 대부분 유대인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한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붕괴되고, 그 이후 기독교세력이 점차 확장되면서부터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문제 삼기 시작했고, 네로 때 로마시 대화재 사건을 시점으로 국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주의는 할례나 율법의 준수가 구원에 필수라는 주장이었고, 영지주의는 물질 곧 세상과 육체를 악하게 보고,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한 부류는 금욕주의를, 다른 부류는 방탕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단은 2장 2절과 18절에 나타난 대로 방탕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주의 재림을 부정한 영지주의였습니다.
100년경에 기록된 책 가운데 ꡔ디다케ꡕ, 곧 ꡔ열두 사도들의 가르침ꡕ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사도이후의 글일 뿐 아니라, 책 제목과는 달리 사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경에 들지 못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 빠진 내용들, 즉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 귀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이 집필되던 초대교회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ꡔ디다케ꡕ가 기록되던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는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떠돌이 순회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느 한 교회에 정착한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또 각 지역의 교회들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권위자들이 초기에 세운 장로들이 있었고, 이후 회중이 선출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오늘날의 목사를 말하고, 집사는 목사를 돕는 봉사자를 말합니다. 장로의 역할은 크게 목양과 감독의 일로 나뉩니다. 그리고 떠돌이 순회 목회자들이 더 이상 필요치도 않고 활동하지도 않게 된 시기에는 감독이 장로보다 우위의 직위로 발전하여 감독은 오늘날의 담임목사 또는 교구책임자, 곧 감리사나 감독 또는 지방회장이나 노회장과 같은 직책을 수행하였고, 장로는 감독의 지도아래 있는 지교회를 맡아 담임하거나 감독이 있는 중앙교회의 부목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집사들은 물론 장로들을 돕는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집사직을 거쳐서 장로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회나 성공회 또는 정교회와 같은 정통교회들에서는 감독을 주교, 장로를 사제, 집사를 부제 또는 보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후로 사제 곧 장로를 목사로, 부제 곧 봉사자를 집사로 고쳐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거짓 사도,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은 앞서 설명한 떠돌이 순회목회자들 가운데 있었던 이단자들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ꡔ디다케ꡕ란 책에 거짓 사도,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복음의 지침에 따라 이렇게들 하시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 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가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영으로 말하는 모든 예언자를 여러분은 시험하거나 판단하지 마시오. 사실 모든 죄가 용서받겠지만, 그런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해서 다 예언자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생활 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 태도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식탁을 (마련하라고) 영으로 명하는 모든 예언자는 바로 그 식탁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만일 먹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예언자가 만일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인정받고 진실한 모든 예언자가 지상에서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행하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것들을 행하라고 가르치지 않더라도 여러분에게 심판받지 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심판받습니다. 그것은 옛 예언자들도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영으로 말한다면서 “내게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주시오” 하거든 여러분은 그의 말을 듣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하여 달라고 하거든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마시오.
베드로후서는 1장에서 진리 안에서의 성장을, 2장에서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를, 3장에서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장 1절부터 4절 상반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의 신분을 설명한 글입니다. 성도는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며(1:1),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자들이며(1:2),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곧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며(1: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1:4)고 하였습니다.
1장 4절하반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위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주신 목적을 설명한 글입니다. 그 목적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1:4b),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1:5-7)하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1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우리 성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일에 힘써야할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열매를 맺고(1:8),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1:10),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은혜를 입도록 하려는 것(1:11)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2절 이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성도들이 이미 아는 내용이라도 다시 상기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이와 같으므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1:16)을 확실히 믿고, 진리가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마음에 밝히 깨달아질 때까지 성경을 읽고 묵상하되 사사로이 풀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단자는 2장 2절과 18절에 나타난 대로 방탕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주의 재림을 부정한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곧 세상과 육체를 하나님보다 못한 낮은 단계의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창조주와 또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한 부류는 금욕주의를, 다른 부류는 방탕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므로 금욕을 통해서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라고 보았던 것이고, 방탕주의는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므로 함부로 해도 좋다고 보아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바로 이 방탕한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2장 17절에서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핵심은 부활과 재림에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출발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죽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해답이 육체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부활이 이뤄지는 시점을 주의 재림의 때로 설정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이뤄지는 구원은 이 때에 이뤄질 약속의 성격을 띠는 것이고, 이 약속을 보증하고 인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 가운데서 이뤄지는 모든 축복은 사실상 영적인 것입니다. 굳이 육체적인 것이 있다면, 병고침이나 기도응답과 같은 것들이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일시적인 축복일 뿐이고,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육체의 부활과 주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을 베드로는 3장 8절부터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오늘 우리가 살펴본 베드로후서는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기록한 글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글을 통해서 신앙성장의 8단계를 언급하였습니다. 비록 믿음이 보배로운 것이긴 하지만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언급되었습니다. 믿음에서 한 계단 발전한 단계가 덕입니다. 덕 위에 지식, 지식 위에 절제, 절제 위에 인내, 인내 위에 경건, 경건 위에 형제우애, 형제우애 위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과연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8이란 숫자는 기독교복음과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성숙의 8단계를 언급하면서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최 상위 단계인 사랑의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십시다.
베드로후서는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고, 1장 16절부터 18절에서는 변화산의 예수님을 목격한 자로, 3장 1절에서는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낸다고 말함으로써 본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인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전서와 마찬가지로 네로 황제 박해 때인 주후 64년에서 67년 사이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지금의 터키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1장 14절,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서와도 같은 글입니다.
베드로는 전서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했다면, 후서에서는 교회 내부에 침투한 이단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언제나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물리적인 박해요, 둘째는 내부의 이단자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이 이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들에 가장 위협적인 박해세력은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이었고, 가장 위협적인 이단세력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40-50년간의 기독교 박해는 대부분 유대인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한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붕괴되고, 그 이후 기독교세력이 점차 확장되면서부터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문제 삼기 시작했고, 네로 때 로마시 대화재 사건을 시점으로 국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주의는 할례나 율법의 준수가 구원에 필수라는 주장이었고, 영지주의는 물질 곧 세상과 육체를 악하게 보고,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한 부류는 금욕주의를, 다른 부류는 방탕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단은 2장 2절과 18절에 나타난 대로 방탕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주의 재림을 부정한 영지주의였습니다.
100년경에 기록된 책 가운데 ꡔ디다케ꡕ, 곧 ꡔ열두 사도들의 가르침ꡕ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사도이후의 글일 뿐 아니라, 책 제목과는 달리 사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경에 들지 못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 빠진 내용들, 즉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 귀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이 집필되던 초대교회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ꡔ디다케ꡕ가 기록되던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는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떠돌이 순회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느 한 교회에 정착한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또 각 지역의 교회들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권위자들이 초기에 세운 장로들이 있었고, 이후 회중이 선출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오늘날의 목사를 말하고, 집사는 목사를 돕는 봉사자를 말합니다. 장로의 역할은 크게 목양과 감독의 일로 나뉩니다. 그리고 떠돌이 순회 목회자들이 더 이상 필요치도 않고 활동하지도 않게 된 시기에는 감독이 장로보다 우위의 직위로 발전하여 감독은 오늘날의 담임목사 또는 교구책임자, 곧 감리사나 감독 또는 지방회장이나 노회장과 같은 직책을 수행하였고, 장로는 감독의 지도아래 있는 지교회를 맡아 담임하거나 감독이 있는 중앙교회의 부목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집사들은 물론 장로들을 돕는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집사직을 거쳐서 장로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회나 성공회 또는 정교회와 같은 정통교회들에서는 감독을 주교, 장로를 사제, 집사를 부제 또는 보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후로 사제 곧 장로를 목사로, 부제 곧 봉사자를 집사로 고쳐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거짓 사도,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은 앞서 설명한 떠돌이 순회목회자들 가운데 있었던 이단자들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ꡔ디다케ꡕ란 책에 거짓 사도,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복음의 지침에 따라 이렇게들 하시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 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가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영으로 말하는 모든 예언자를 여러분은 시험하거나 판단하지 마시오. 사실 모든 죄가 용서받겠지만, 그런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해서 다 예언자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생활 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 태도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식탁을 (마련하라고) 영으로 명하는 모든 예언자는 바로 그 식탁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만일 먹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예언자가 만일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인정받고 진실한 모든 예언자가 지상에서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행하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것들을 행하라고 가르치지 않더라도 여러분에게 심판받지 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심판받습니다. 그것은 옛 예언자들도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영으로 말한다면서 “내게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주시오” 하거든 여러분은 그의 말을 듣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하여 달라고 하거든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마시오.
베드로후서는 1장에서 진리 안에서의 성장을, 2장에서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를, 3장에서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장 1절부터 4절 상반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의 신분을 설명한 글입니다. 성도는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며(1:1),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자들이며(1:2),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곧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며(1: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1:4)고 하였습니다.
1장 4절하반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위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주신 목적을 설명한 글입니다. 그 목적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1:4b),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1:5-7)하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1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우리 성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일에 힘써야할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열매를 맺고(1:8),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1:10),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은혜를 입도록 하려는 것(1:11)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2절 이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성도들이 이미 아는 내용이라도 다시 상기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이와 같으므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1:16)을 확실히 믿고, 진리가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마음에 밝히 깨달아질 때까지 성경을 읽고 묵상하되 사사로이 풀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단자는 2장 2절과 18절에 나타난 대로 방탕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주의 재림을 부정한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곧 세상과 육체를 하나님보다 못한 낮은 단계의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창조주와 또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한 부류는 금욕주의를, 다른 부류는 방탕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므로 금욕을 통해서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라고 보았던 것이고, 방탕주의는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므로 함부로 해도 좋다고 보아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바로 이 방탕한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2장 17절에서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핵심은 부활과 재림에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출발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죽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해답이 육체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부활이 이뤄지는 시점을 주의 재림의 때로 설정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이뤄지는 구원은 이 때에 이뤄질 약속의 성격을 띠는 것이고, 이 약속을 보증하고 인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 가운데서 이뤄지는 모든 축복은 사실상 영적인 것입니다. 굳이 육체적인 것이 있다면, 병고침이나 기도응답과 같은 것들이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일시적인 축복일 뿐이고,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육체의 부활과 주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을 베드로는 3장 8절부터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오늘 우리가 살펴본 베드로후서는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기록한 글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글을 통해서 신앙성장의 8단계를 언급하였습니다. 비록 믿음이 보배로운 것이긴 하지만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언급되었습니다. 믿음에서 한 계단 발전한 단계가 덕입니다. 덕 위에 지식, 지식 위에 절제, 절제 위에 인내, 인내 위에 경건, 경건 위에 형제우애, 형제우애 위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과연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8이란 숫자는 기독교복음과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성숙의 8단계를 언급하면서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최 상위 단계인 사랑의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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