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계(요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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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한계(요이 1:1-13)
요한이서는 사도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보낸 서신인데,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는 지역교회와 성도를 가리키는 말일 것으로 이해됩니다. 기록 목적은 거짓 교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은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관용을 베풀지 말도록 권하고 있어서, 요한일서를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의 '서로 사랑‘에 대한 서신이라고 한다면, 요한이서는 '사랑의 한계’에 대한 서신이라고 구분지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목회자인 장로와 봉사자인 집사와 평신도인 성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장로’는 목회자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사도 장로’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장로들은 치리나 관리보다는 주로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집사’는 문자적으로 보면, ‘봉사자,’ ‘일군,’ ‘청지기’란 뜻이기 때문에 평신도, 장로, 사도,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누구나 다 집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가 교직으로 인식된 역사적 과정에서는 ‘집사’가 목사인 ‘장로’를 돕는 자로, 목회를 보조하는 자로 발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집사’는 오늘날의 ‘전도사,’ ‘준목,’ ‘강도사’ 등에 해당될 수 있는 ‘집사 목사’로까지 그 역할이 다양하게 변천해 왔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교회 내의 모든 목사들을 설교와 교육을 담당한 ‘목회 장로’로, 평신도 장로를 ‘치리 또는 관리 장로’로, ‘전도사’를 ‘목회 장로’를 돕는 자 또는 목회를 보조하는 자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권사’의 성서적 근거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말한 ‘늙은 여자’ 또는 ‘참 과부’에서 찾을 있습니다. 성서나 역사나 여성이 장로직이나 집사직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특별히 언급한 ‘늙은 여자’ 또는 ‘참 과부’들은 오늘날의 권사직에 해당되는 일들, 예를 들면, “항상 간구와 기도를”(딤전 5:5) 힘쓰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딛 2:4)하는 일들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진 오늘날에는 남녀의 구별 없이 이 모든 교직들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남녀 집사들이 연세가 많아진 후에도 장로직에 오르지 못할 경우, 남녀권사로 취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신도직인 ‘관리 장로,’ ‘권사,’ ‘집사’의 선출, 임기와 안수 등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개교회나 교단이 법으로 정해서 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이서를 통해서 강조한 말씀은 교직자든 평신도든 피차 서로 사랑하고 이단자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서는 목회자와 성도, 또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할 의무를 지닌 약속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부녀”란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데, “부녀”란 ‘숙녀’를 뜻합니다. 또 “부녀와 그의 자녀”로 표현된 교회와 성도는 택하심을 입는 자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인 장로는 진리 가운데 있는 자로써 이 “부녀와 그의 자녀” 곧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고, 교회와 성도는 목회자에게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영원히 함께 살 자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진리 안에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계명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계명은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랑은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 안에서 걷는 것이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7절), 곧 미혹하는 자들이며, 적그리스도들인 이단자들은 교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집안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하였습니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잘 아시는 것처럼 조건 없는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사랑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요한서신에 언급된 ‘서로 사랑’을 이 아가페 사랑보다 열등하고 저급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계명에 비해서 ‘서로 사랑’과 ‘사랑의 한계’를 말한 요한서신의 사랑법은 월등하게 저급하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이들 학자들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첫째, ‘자기애’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긍심과 자존감이 너무 강하거나 약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당한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사람은 건전하고 건강하게 자기를 사랑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애’가 적당하면 자긍심과 자존감이 생기고, 지나치면 자만과 교만에 빠지게 하며, 부족하면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합니다.
둘째, 가까운 부모와 형제자매 또는 교우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사랑하면서 일가친척과 교우들은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집밖에서 남들한테는 친절한 말, 좋은 말만 하면서, 집안에서나 교회 안에서는 가족과 교우들에게 거칠고 상처받을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것은 본인이 아무리 사랑해서 그랬노라고 말해도, 사랑이 전혀 아니거나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은 ‘원수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무조건적인 사랑이 건강하고 건전한 사랑일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도 있습니다. 무조건이란 말이 전혀 대가성이 없다는 뜻으로 쓰일 경우에도 그 사랑이 전혀 무가치하고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옳은 방법 또는 옳은 표현은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대가성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다기보다는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이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지, 반드시 무조건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정의가 희생되지 않고 오히려 우대를 받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오른 뺨을 맞고 왼 뺨을 돌려 대면서 또 더 때리고 싶으면 더 때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사랑일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정의로운 사랑은 아닙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매를 맞는다든지, 믿음이나 전도나 정의를 위해서 박해나 시련을 겪는다면 목숨과도 맞바꿔야 할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특별한 목적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견디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일로 인해서 자존감이 세워지고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사랑이 불길처럼 솟아오른다면 잘하는 것이고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악행을 더욱 키우고 부추기는 것에 불과한 매우 불행한 일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싫은 것은 “싫다,” 아닌 것은 “아니다”고 분명하게 자기의사를 표시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그와 같은 감정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하고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불나비사랑’입니다. 불나비사랑방식은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죽임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때로 율법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실천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역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관심 혹은 긍휼과 같은 행위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정의로운 사랑을 결코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혹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도와서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숨통을 조여 죽이는 행위들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고민 끝에 찾아낸 절묘한 방식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성품을 함께 지닌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사랑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어서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살면, 정의가 죽고, 정의가 살면, 사랑이 죽기 쉽습니다. 사형제도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죄 범한 인간을 살려주자니, 정의가 희생되고, 죄를 벌하고 징계하자니, 사랑이 희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범한 인간들을 용서하면서 또한 그들의 죄를 벌할 수는 없는가를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취한 하나님의 처방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벌했다는 측면에서 정의를 살리고, 인간을 용서했다는 측면에서 사랑을 살리며 또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더하기 표식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랑과 사랑의 한계 모두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표시였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중요성은 에리히 프롬이 ꡔ사랑의 기술ꡕ에서 밝힌 것처럼,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책임을 느끼며,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주고받는 데 있습니다. 굳이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사랑은 기술을 연마하듯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이뤄집니다.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경험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평화가 있고, 정의가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빛과 생명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는 바울의 말씀과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관용을 베풀지 말라는 요한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이서는 사도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보낸 서신인데,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는 지역교회와 성도를 가리키는 말일 것으로 이해됩니다. 기록 목적은 거짓 교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은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관용을 베풀지 말도록 권하고 있어서, 요한일서를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의 '서로 사랑‘에 대한 서신이라고 한다면, 요한이서는 '사랑의 한계’에 대한 서신이라고 구분지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목회자인 장로와 봉사자인 집사와 평신도인 성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장로’는 목회자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사도 장로’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장로들은 치리나 관리보다는 주로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집사’는 문자적으로 보면, ‘봉사자,’ ‘일군,’ ‘청지기’란 뜻이기 때문에 평신도, 장로, 사도,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누구나 다 집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가 교직으로 인식된 역사적 과정에서는 ‘집사’가 목사인 ‘장로’를 돕는 자로, 목회를 보조하는 자로 발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집사’는 오늘날의 ‘전도사,’ ‘준목,’ ‘강도사’ 등에 해당될 수 있는 ‘집사 목사’로까지 그 역할이 다양하게 변천해 왔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교회 내의 모든 목사들을 설교와 교육을 담당한 ‘목회 장로’로, 평신도 장로를 ‘치리 또는 관리 장로’로, ‘전도사’를 ‘목회 장로’를 돕는 자 또는 목회를 보조하는 자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권사’의 성서적 근거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말한 ‘늙은 여자’ 또는 ‘참 과부’에서 찾을 있습니다. 성서나 역사나 여성이 장로직이나 집사직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특별히 언급한 ‘늙은 여자’ 또는 ‘참 과부’들은 오늘날의 권사직에 해당되는 일들, 예를 들면, “항상 간구와 기도를”(딤전 5:5) 힘쓰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딛 2:4)하는 일들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진 오늘날에는 남녀의 구별 없이 이 모든 교직들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남녀 집사들이 연세가 많아진 후에도 장로직에 오르지 못할 경우, 남녀권사로 취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신도직인 ‘관리 장로,’ ‘권사,’ ‘집사’의 선출, 임기와 안수 등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개교회나 교단이 법으로 정해서 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이서를 통해서 강조한 말씀은 교직자든 평신도든 피차 서로 사랑하고 이단자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서는 목회자와 성도, 또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할 의무를 지닌 약속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부녀”란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데, “부녀”란 ‘숙녀’를 뜻합니다. 또 “부녀와 그의 자녀”로 표현된 교회와 성도는 택하심을 입는 자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인 장로는 진리 가운데 있는 자로써 이 “부녀와 그의 자녀” 곧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고, 교회와 성도는 목회자에게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영원히 함께 살 자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진리 안에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계명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계명은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랑은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 안에서 걷는 것이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7절), 곧 미혹하는 자들이며, 적그리스도들인 이단자들은 교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집안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하였습니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잘 아시는 것처럼 조건 없는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사랑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요한서신에 언급된 ‘서로 사랑’을 이 아가페 사랑보다 열등하고 저급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계명에 비해서 ‘서로 사랑’과 ‘사랑의 한계’를 말한 요한서신의 사랑법은 월등하게 저급하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이들 학자들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첫째, ‘자기애’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긍심과 자존감이 너무 강하거나 약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당한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사람은 건전하고 건강하게 자기를 사랑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애’가 적당하면 자긍심과 자존감이 생기고, 지나치면 자만과 교만에 빠지게 하며, 부족하면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합니다.
둘째, 가까운 부모와 형제자매 또는 교우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사랑하면서 일가친척과 교우들은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집밖에서 남들한테는 친절한 말, 좋은 말만 하면서, 집안에서나 교회 안에서는 가족과 교우들에게 거칠고 상처받을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것은 본인이 아무리 사랑해서 그랬노라고 말해도, 사랑이 전혀 아니거나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은 ‘원수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무조건적인 사랑이 건강하고 건전한 사랑일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도 있습니다. 무조건이란 말이 전혀 대가성이 없다는 뜻으로 쓰일 경우에도 그 사랑이 전혀 무가치하고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옳은 방법 또는 옳은 표현은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대가성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다기보다는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이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지, 반드시 무조건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정의가 희생되지 않고 오히려 우대를 받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오른 뺨을 맞고 왼 뺨을 돌려 대면서 또 더 때리고 싶으면 더 때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사랑일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정의로운 사랑은 아닙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매를 맞는다든지, 믿음이나 전도나 정의를 위해서 박해나 시련을 겪는다면 목숨과도 맞바꿔야 할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특별한 목적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견디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일로 인해서 자존감이 세워지고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사랑이 불길처럼 솟아오른다면 잘하는 것이고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악행을 더욱 키우고 부추기는 것에 불과한 매우 불행한 일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싫은 것은 “싫다,” 아닌 것은 “아니다”고 분명하게 자기의사를 표시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그와 같은 감정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하고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불나비사랑’입니다. 불나비사랑방식은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죽임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때로 율법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실천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역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관심 혹은 긍휼과 같은 행위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정의로운 사랑을 결코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혹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도와서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숨통을 조여 죽이는 행위들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고민 끝에 찾아낸 절묘한 방식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성품을 함께 지닌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사랑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어서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살면, 정의가 죽고, 정의가 살면, 사랑이 죽기 쉽습니다. 사형제도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죄 범한 인간을 살려주자니, 정의가 희생되고, 죄를 벌하고 징계하자니, 사랑이 희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범한 인간들을 용서하면서 또한 그들의 죄를 벌할 수는 없는가를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취한 하나님의 처방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벌했다는 측면에서 정의를 살리고, 인간을 용서했다는 측면에서 사랑을 살리며 또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더하기 표식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랑과 사랑의 한계 모두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표시였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중요성은 에리히 프롬이 ꡔ사랑의 기술ꡕ에서 밝힌 것처럼,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책임을 느끼며,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주고받는 데 있습니다. 굳이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사랑은 기술을 연마하듯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이뤄집니다.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경험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평화가 있고, 정의가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빛과 생명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는 바울의 말씀과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관용을 베풀지 말라는 요한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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