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딛 2:1-15)
본문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딛 2:1-15)
디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디도는 바울처럼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바울을 대신해서 선교교회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설명으로 볼 때, 디도의 등장은 주후 51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총회 때로 볼 수 있습니다(갈 2:1-5, 행 15:1-2).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헬라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지 대략 20년이 흐른 때에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 사이에 불거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리문제였습니다. 안디옥교회를 대표한 바울과 바나바는 외국태생의 유대인들로써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 최초의 이방인교회를 세운 사람들로서 기독교복음의 세계화, 탈국경화, 또는 탈민족화를 추구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핵심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태생의 유대인들로서 대부분이 예수님의 형제와 제자들이었으며, 바울과 바나바가 갖지 못한 결정권이나 승인권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큰 권한을 가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가둬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행 15:1)와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15:5)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킬”(갈 4:10)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고 하였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갈 5:6)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특징을 자유와 평등과 박애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평등하시고,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복음에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고,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혈통과 민족의 차별이 없습니다. 국경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민족의 종교적 신념인 할례와 절기 지키는 일을 타민족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한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고는 모두가 다 평등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인간은 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학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문명세계를 접할 기회를 주면, 곧바로 문명인이 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IQ테스트에서도 미개한 종족이 문명이 깬 종족보다 더 높게 나타난 사례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민족의 우월성은 타고난 것이기보다는 높은 도덕수준을 자랑하는 그들의 야훼신앙과 오랜 고통과 시련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유일신 사상에 기독교복음의 특징인 자유해방과 평등사상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복음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신성도 우상도 거부합니다. 하나님 말고는 절대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유일무이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유일신 사상에 기초를 둔 기독교복음의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이 가치를 위한 투쟁이 바로 주후 51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뤄진 일들이고, 성령님의 강한 개입과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들이 안디옥교회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좋은 결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으면서 귀중한 사실을 목도한 디도는 이후로 훌륭한 바울의 동역자로서(고후 8:23), 제자로서, 참 아들로서(딛 1:4) 평생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는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잘 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서 모금하는 귀중한 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과 관련해서 디도의 이름이 고린도후서에서만 아홉 차례나 언급되었습니다(고후 2:13; 7:6,13; 8:6,16,23; 12:18).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말년인 66년경에 디도에게 보낸 편지로써 목회지침서나 다름없는 훌륭한 글입니다.
그러면 디도서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디도서는 그레데교회를 돌보는 디도에게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이 감옥에서 보낸 세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입니다만, 2장 11-14절과 3장 4-7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협동적인 구원사역이 훌륭하게 요약되고 있어서 사도성이 매우 높은 서신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디도서 2장 15절의 말씀,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말하고”란 단어는 “가르치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권면하며”는 칭찬하고 위로하여 용기를 심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책망하며”는 꾸중하라는 뜻보다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기억하게 하라”(3:1), “바르게 잡으라”(1:5), “장로들을 세우라”(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가르치라”는 말씀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2장 1절에서 “건전한 교리에 부합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였고, 2장 7절에서는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에 디도가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권위가 서지 못할 것입니다. 권위가 서지 못한다면, 가르치며, 권면하며, 책망하는 일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장 15절의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ꡔ표준새번역성경ꡕ 2장 7절의 말씀, “그대는 스스로 모든 점에서 선한 행실의 모범이 되십시오. 가르치는 일에는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와 연관되는 말씀입니다.
이들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책망하는 일에 있어서 권위를 세우라고한 점입니다. 권위를 세우라고한 말은 디도 자신의 능력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뜻이고, 영향력을 확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며,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여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일일까요? 그것은 본을 보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만이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갖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긍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이나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 9:23)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예문사에서 출판한 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본 제목은 Change Is Everybody's Business인데, “변화는 우리 모두의 업무다”란 뜻입니다. 변화는 다른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결심만 하고 변하지 못한다면, 정말 우린 바보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아예 결심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나마 결심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낫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점과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는 스스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일하고,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만큼 자기 자신에게 가치부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는 특별히 중요한 것들인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팻 맥라건(Pat McLagan)은 말하기를, “긍정적인 피드백인 감사는 엄청난 증폭효과를 갖습니다. 뭔가 잘 안된다고 벌을 주기보다는 잘 진행되는 일에 감사하고 칭찬하면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벌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거나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하고 극적인 많은 변화들은 사실 뭔가 새로운 것을 누군가 지지하고 감사한다고 여길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팻 맥라건, 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 윤희기 옮김(예문사, 2002, 150-151쪽)]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희망과 낙관입니다. 팻 맥라건은 “희망과 낙관은 변화를 자극하고 끌어들이고 확대하는 힘입니다. 희망과 낙관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인간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힘입니다. 실제로 모든 올림픽 선수들,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 끔찍한 사고나 죽음의 질병에서 살아남은 많은 생존자들은 거의 전부가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승리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 삶의 목표에 집중합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 .그들은 늘 웃으며, 희망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승리를 거두든 패배를 당하든 그들의 삶은 희망 때문에 더 나은 삶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성공에 어떻게든 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 152-153쪽)라고 하였습니다.
기원전 336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대표하는 왕들이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고린도에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20세에 불과한 젊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가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뽑혔습니다.
알렉산더의 원정군은, 역사가에 따라 주장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3만 5천명의 보병과, 3천 5백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변변치 못한 군자금을 가지고 원정길에 나서면서도 군자금에 보탤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돈을 참모의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어 버렸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귀족 출신의 참모 페르디카스(Perdiccas)가 알렉산더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전하께서는 빈털터리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알렉산더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아직도 내게는 희망이 있소이다." "그렇다면 저도 재산대신에 그 희망이라는 것을 좀 나눠 받겠습니다." 페르디카스는 왕이 하사한 재산을 반납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페르디카스가 반납한 돈을 더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마저 나눠주고는 다시 손을 털었습니다. 후일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대헬라제국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눠 받은 희망의 열매가 어찌 어리석은 사람들이 받은 한 상자의 돈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알렉산더와 페르디카스는 눈에 보이는 작은 재물에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꿈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면서 보다 큰 성공에다 가치를 두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 그의 이름을 역사에 깊이 새겨 수천 년이 흘러도 지울 수 없게 만든 것, 나이 불과 20세의 청년으로써 내로라하는 대장군들을 통솔할 수 있었던 것, 그의 그런 권위는 다름 아닌 그가 품었던 큰 희망과 낙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을 실천하여 본을 보일 때, 잘못한 일보다는 잘한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위로해 줄 수 있을 때, 또 실패했거나 잘못했을 때 꾸중하고 책망하기보다는 희망과 낙관 속에서 실패나 잘못을 만드는 에너지를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로 역할을 바꿔줄 수 있을 때, 이런 때가 디도서 2장 15절의 말씀, “너는 이것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권위는 큰소리친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궁예 왕처럼 철퇴를 휘두른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위는 감사와 칭찬과 희망과 낙관 속에서 세워집니다. 권위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곳에 세워집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시고, 사랑으로 하시고, 소망 중에 인내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고 권위를 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디도는 바울처럼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바울을 대신해서 선교교회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설명으로 볼 때, 디도의 등장은 주후 51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총회 때로 볼 수 있습니다(갈 2:1-5, 행 15:1-2).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헬라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지 대략 20년이 흐른 때에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 사이에 불거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리문제였습니다. 안디옥교회를 대표한 바울과 바나바는 외국태생의 유대인들로써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 최초의 이방인교회를 세운 사람들로서 기독교복음의 세계화, 탈국경화, 또는 탈민족화를 추구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핵심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태생의 유대인들로서 대부분이 예수님의 형제와 제자들이었으며, 바울과 바나바가 갖지 못한 결정권이나 승인권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큰 권한을 가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가둬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행 15:1)와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15:5)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킬”(갈 4:10)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고 하였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갈 5:6)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특징을 자유와 평등과 박애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평등하시고,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복음에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고,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혈통과 민족의 차별이 없습니다. 국경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민족의 종교적 신념인 할례와 절기 지키는 일을 타민족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한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고는 모두가 다 평등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인간은 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학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문명세계를 접할 기회를 주면, 곧바로 문명인이 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IQ테스트에서도 미개한 종족이 문명이 깬 종족보다 더 높게 나타난 사례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민족의 우월성은 타고난 것이기보다는 높은 도덕수준을 자랑하는 그들의 야훼신앙과 오랜 고통과 시련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유일신 사상에 기독교복음의 특징인 자유해방과 평등사상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복음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신성도 우상도 거부합니다. 하나님 말고는 절대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유일무이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유일신 사상에 기초를 둔 기독교복음의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이 가치를 위한 투쟁이 바로 주후 51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총회에서 이뤄진 일들이고, 성령님의 강한 개입과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들이 안디옥교회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좋은 결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으면서 귀중한 사실을 목도한 디도는 이후로 훌륭한 바울의 동역자로서(고후 8:23), 제자로서, 참 아들로서(딛 1:4) 평생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는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잘 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서 모금하는 귀중한 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과 관련해서 디도의 이름이 고린도후서에서만 아홉 차례나 언급되었습니다(고후 2:13; 7:6,13; 8:6,16,23; 12:18).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말년인 66년경에 디도에게 보낸 편지로써 목회지침서나 다름없는 훌륭한 글입니다.
그러면 디도서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디도서는 그레데교회를 돌보는 디도에게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이 감옥에서 보낸 세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입니다만, 2장 11-14절과 3장 4-7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협동적인 구원사역이 훌륭하게 요약되고 있어서 사도성이 매우 높은 서신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디도서 2장 15절의 말씀,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말하고”란 단어는 “가르치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권면하며”는 칭찬하고 위로하여 용기를 심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책망하며”는 꾸중하라는 뜻보다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기억하게 하라”(3:1), “바르게 잡으라”(1:5), “장로들을 세우라”(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가르치라”는 말씀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2장 1절에서 “건전한 교리에 부합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였고, 2장 7절에서는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에 디도가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권위가 서지 못할 것입니다. 권위가 서지 못한다면, 가르치며, 권면하며, 책망하는 일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장 15절의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ꡔ표준새번역성경ꡕ 2장 7절의 말씀, “그대는 스스로 모든 점에서 선한 행실의 모범이 되십시오. 가르치는 일에는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와 연관되는 말씀입니다.
이들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책망하는 일에 있어서 권위를 세우라고한 점입니다. 권위를 세우라고한 말은 디도 자신의 능력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뜻이고, 영향력을 확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며,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여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일일까요? 그것은 본을 보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만이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갖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긍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이나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 9:23)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예문사에서 출판한 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본 제목은 Change Is Everybody's Business인데, “변화는 우리 모두의 업무다”란 뜻입니다. 변화는 다른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결심만 하고 변하지 못한다면, 정말 우린 바보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아예 결심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나마 결심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낫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점과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는 스스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일하고,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만큼 자기 자신에게 가치부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는 특별히 중요한 것들인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팻 맥라건(Pat McLagan)은 말하기를, “긍정적인 피드백인 감사는 엄청난 증폭효과를 갖습니다. 뭔가 잘 안된다고 벌을 주기보다는 잘 진행되는 일에 감사하고 칭찬하면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벌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거나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하고 극적인 많은 변화들은 사실 뭔가 새로운 것을 누군가 지지하고 감사한다고 여길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팻 맥라건, 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 윤희기 옮김(예문사, 2002, 150-151쪽)]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희망과 낙관입니다. 팻 맥라건은 “희망과 낙관은 변화를 자극하고 끌어들이고 확대하는 힘입니다. 희망과 낙관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인간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힘입니다. 실제로 모든 올림픽 선수들,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 끔찍한 사고나 죽음의 질병에서 살아남은 많은 생존자들은 거의 전부가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승리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 삶의 목표에 집중합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 .그들은 늘 웃으며, 희망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승리를 거두든 패배를 당하든 그들의 삶은 희망 때문에 더 나은 삶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성공에 어떻게든 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ꡔ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ꡕ 152-153쪽)라고 하였습니다.
기원전 336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대표하는 왕들이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고린도에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20세에 불과한 젊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가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뽑혔습니다.
알렉산더의 원정군은, 역사가에 따라 주장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3만 5천명의 보병과, 3천 5백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변변치 못한 군자금을 가지고 원정길에 나서면서도 군자금에 보탤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돈을 참모의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어 버렸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귀족 출신의 참모 페르디카스(Perdiccas)가 알렉산더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전하께서는 빈털터리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알렉산더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아직도 내게는 희망이 있소이다." "그렇다면 저도 재산대신에 그 희망이라는 것을 좀 나눠 받겠습니다." 페르디카스는 왕이 하사한 재산을 반납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페르디카스가 반납한 돈을 더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마저 나눠주고는 다시 손을 털었습니다. 후일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대헬라제국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눠 받은 희망의 열매가 어찌 어리석은 사람들이 받은 한 상자의 돈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알렉산더와 페르디카스는 눈에 보이는 작은 재물에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꿈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면서 보다 큰 성공에다 가치를 두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 그의 이름을 역사에 깊이 새겨 수천 년이 흘러도 지울 수 없게 만든 것, 나이 불과 20세의 청년으로써 내로라하는 대장군들을 통솔할 수 있었던 것, 그의 그런 권위는 다름 아닌 그가 품었던 큰 희망과 낙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을 실천하여 본을 보일 때, 잘못한 일보다는 잘한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위로해 줄 수 있을 때, 또 실패했거나 잘못했을 때 꾸중하고 책망하기보다는 희망과 낙관 속에서 실패나 잘못을 만드는 에너지를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로 역할을 바꿔줄 수 있을 때, 이런 때가 디도서 2장 15절의 말씀, “너는 이것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권위는 큰소리친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궁예 왕처럼 철퇴를 휘두른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위는 감사와 칭찬과 희망과 낙관 속에서 세워집니다. 권위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곳에 세워집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시고, 사랑으로 하시고, 소망 중에 인내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고 권위를 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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