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002: 창조와 흑암(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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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02: 창조와 흑암(창 1:1-2)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1:1)
창조이전 상태와 창조에 관한 학자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2절 말씀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이미 ‘땅’과 ‘물’이 언급되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 상태의 어떤 물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2절의 말씀은 1절의 말씀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이 있기 이전 상태인 ‘땅’과 ‘물’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한 말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1-2절과 3절 이하의 칠일창조의 말씀은 시간적인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 시간적 간격, 즉 1-2절과 3절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과연 얼마나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몇몇 유명한 신학자들(예: Unger, Scofield Bible)은 1-2절을 ‘원창조’라 부르고, 3절을 ‘재창조’라고 불렀습니다. 이 원창조와 재창조 사이의 기간에 천사장 루시퍼와 그의 추종 천사들의 타락이 있었고, 이들이 변하여 사단이 되고, 악마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계 12:7-17, 사 14:12-15, 겔 28:12-19).
하나님이(1:1)
창세기를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현대인들조차도 잡신을 믿고 다신을 믿는데, 하물며 3천년 전에 신이 한분이라는 생각을 했으니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 [제4편 문명의 쇠퇴]에서 그들에 대해서 “정신적 보물,” “정신적 성장,” “무상(無上)의 정신적 통찰력,” “정신적 탁월성,” “천부의 재능” 등의 미사여구를 사용한 것이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오직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변 종교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우상도 없었고, 여신도 없었고, 신화도 없었고, 여사제도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차원 높은 종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급한 종교,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종교를 선호하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히브리어로 하늘을 ‘샤마임’이라고 합니다. ‘샤마이’의 복수형이며, 항상 복수 형태로만 쓰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복수형으로 쓰이는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중인 첫째 하늘,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우주인 둘째 하늘, 그리고 천사들이 거하는 셋째 하늘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러 간 자에 대해서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셋째 하늘과 관련된 것이라 봅니다.
히브리어로 땅을 ‘아레츠’라고 합니다. 사람과 생물이 거주하는 지구뿐 아니라, 땅 아래의 지하세계까지 포괄하는 말입니다.
결국 ‘천지’란 말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한분 말고는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진 것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 완전하시고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다 만들어진 피조물이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은 숙명입니다.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도 필연적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필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맺어진 약속들이 인간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켜지지 아니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불편해지고, 불편해지면, 수치심이 생기고, 수치심이 생기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원망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가 싹트게 되고, 그것들이 자라면 싸움이 되고, 속이게 되고, 훔치게 되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명석한 두뇌와 이성을 가졌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2)
‘흑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쉐크’는 해가 지거나 등불이 꺼지면 찾아오는 ‘자연적인 어둠’(15:17), 하나님께서 직접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오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흑암’(시 105:28, 암 8:9),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오는 ‘기적적인 흑암’(출 20:21, 수 24:7)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흑암’은 빛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흑암’은 ‘고난’을 상징합니다(시 112:4, 사 5:30, 애 4:8). 그러나 이 고난은 신앙의 성숙을 가져옵니다. 또한 ‘흑암’은 ‘죄악’을 상징합니다(욥 18:6, 엡 5:11).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흑암’은 ‘타락’을 상징합니다(롬 13:12). ‘흑암’은 ‘미움’을 상징합니다(요일 2:9-10). 미움의 결과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마 5:21-22). ‘흑암’은 ‘영적 소경’을 상징합니다(행 13:11). 인간이 증오심이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리를 분별하기 힘들어집니다. ‘흑암’은 ‘죽음’을 상징합니다(욥 10:21-22). 죽음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요 1:4). ‘흑암’은 ‘지옥’을 의미합니다(마 22:13). 지옥은 영원한 어두움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은 사단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의 권세에 직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흑암의 권세, 혼돈과 공허를 빛과 질서와 생명으로 바꿔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도 매우 자주 이런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세력 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생명에로 바꿔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흑암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가는 경험들을 축적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주제 사라마구라는 포르투갈 소설가가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시간의 경험은 우리에게 실명한 사람들은 없고, 실명 상태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흑암’이란 주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들의 삶이 ‘흑암’에 짓눌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빛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소망 중에 인내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엘로힘’이라 하며,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합작 사역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말하는 ‘루아흐’는 구약성경에 378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말씀은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위에서 선회를 하듯이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 위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면 위에’란 말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으로써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을 운행하실 때 얼굴과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근접한 상태에서 운행하셨음을 말해 해줍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갈 지구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원시 지구를 끊임없이 선회하셨던 성령님의 모습은 우주만물을 만드신 후에는 더욱 세밀한 관심과 사랑으로 특히 인간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까지도 관심을 기울이시고 새롭게 하여 질서와 생명과 빛으로 바꿔놓으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고 고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1:1)
창조이전 상태와 창조에 관한 학자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2절 말씀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이미 ‘땅’과 ‘물’이 언급되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 상태의 어떤 물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2절의 말씀은 1절의 말씀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이 있기 이전 상태인 ‘땅’과 ‘물’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한 말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1-2절과 3절 이하의 칠일창조의 말씀은 시간적인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 시간적 간격, 즉 1-2절과 3절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과연 얼마나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몇몇 유명한 신학자들(예: Unger, Scofield Bible)은 1-2절을 ‘원창조’라 부르고, 3절을 ‘재창조’라고 불렀습니다. 이 원창조와 재창조 사이의 기간에 천사장 루시퍼와 그의 추종 천사들의 타락이 있었고, 이들이 변하여 사단이 되고, 악마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계 12:7-17, 사 14:12-15, 겔 28:12-19).
하나님이(1:1)
창세기를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현대인들조차도 잡신을 믿고 다신을 믿는데, 하물며 3천년 전에 신이 한분이라는 생각을 했으니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 [제4편 문명의 쇠퇴]에서 그들에 대해서 “정신적 보물,” “정신적 성장,” “무상(無上)의 정신적 통찰력,” “정신적 탁월성,” “천부의 재능” 등의 미사여구를 사용한 것이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오직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변 종교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우상도 없었고, 여신도 없었고, 신화도 없었고, 여사제도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차원 높은 종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급한 종교,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종교를 선호하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히브리어로 하늘을 ‘샤마임’이라고 합니다. ‘샤마이’의 복수형이며, 항상 복수 형태로만 쓰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복수형으로 쓰이는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중인 첫째 하늘,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우주인 둘째 하늘, 그리고 천사들이 거하는 셋째 하늘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러 간 자에 대해서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셋째 하늘과 관련된 것이라 봅니다.
히브리어로 땅을 ‘아레츠’라고 합니다. 사람과 생물이 거주하는 지구뿐 아니라, 땅 아래의 지하세계까지 포괄하는 말입니다.
결국 ‘천지’란 말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한분 말고는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진 것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 완전하시고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다 만들어진 피조물이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은 숙명입니다.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도 필연적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필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맺어진 약속들이 인간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켜지지 아니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불편해지고, 불편해지면, 수치심이 생기고, 수치심이 생기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원망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가 싹트게 되고, 그것들이 자라면 싸움이 되고, 속이게 되고, 훔치게 되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명석한 두뇌와 이성을 가졌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2)
‘흑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쉐크’는 해가 지거나 등불이 꺼지면 찾아오는 ‘자연적인 어둠’(15:17), 하나님께서 직접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오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흑암’(시 105:28, 암 8:9),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오는 ‘기적적인 흑암’(출 20:21, 수 24:7)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흑암’은 빛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흑암’은 ‘고난’을 상징합니다(시 112:4, 사 5:30, 애 4:8). 그러나 이 고난은 신앙의 성숙을 가져옵니다. 또한 ‘흑암’은 ‘죄악’을 상징합니다(욥 18:6, 엡 5:11).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흑암’은 ‘타락’을 상징합니다(롬 13:12). ‘흑암’은 ‘미움’을 상징합니다(요일 2:9-10). 미움의 결과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마 5:21-22). ‘흑암’은 ‘영적 소경’을 상징합니다(행 13:11). 인간이 증오심이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리를 분별하기 힘들어집니다. ‘흑암’은 ‘죽음’을 상징합니다(욥 10:21-22). 죽음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요 1:4). ‘흑암’은 ‘지옥’을 의미합니다(마 22:13). 지옥은 영원한 어두움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은 사단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의 권세에 직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흑암의 권세, 혼돈과 공허를 빛과 질서와 생명으로 바꿔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도 매우 자주 이런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세력 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생명에로 바꿔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흑암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가는 경험들을 축적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주제 사라마구라는 포르투갈 소설가가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시간의 경험은 우리에게 실명한 사람들은 없고, 실명 상태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흑암’이란 주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들의 삶이 ‘흑암’에 짓눌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빛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소망 중에 인내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엘로힘’이라 하며,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합작 사역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말하는 ‘루아흐’는 구약성경에 378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말씀은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위에서 선회를 하듯이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 위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면 위에’란 말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으로써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을 운행하실 때 얼굴과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근접한 상태에서 운행하셨음을 말해 해줍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갈 지구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원시 지구를 끊임없이 선회하셨던 성령님의 모습은 우주만물을 만드신 후에는 더욱 세밀한 관심과 사랑으로 특히 인간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까지도 관심을 기울이시고 새롭게 하여 질서와 생명과 빛으로 바꿔놓으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고 고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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