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3: 에서 족보의 특징(창 36: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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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3: 에서 족보의 특징(창 36:1-43)
창세기 25장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핏줄, 같은 배에서 나왔더라도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고 선민조상이 되고 있고,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방민족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막 10:31)고 말씀하셨듯이, 아담에게는 장손인 가인이 있었지만, 가인은 칼과 음모와 술수를 쓰는 세상권력의 조상이 되었고, 아벨을 대신한 셋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선민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도 약속을 받지 못하였고, 이방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둘째인 이삭이 하나님의 선민의 대를 이어갔습니다. 이삭의 맏아들인 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칼과 음모와 술수를 쓰는 이방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둘째인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선민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데라의 셋째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장자처럼 여겨지는 것은 성경에 그의 이름이 하란과 나홀보다 앞에 나오기 때문에 생겨진 오해일 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였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혈통이나 서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이란 것이 있고, ‘신약’이란 것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뜻에는 시내산 기슭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언약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서인 율법을 잘 지키기로 서약하고, 짐승의 피 뿌림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약속의 선민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신약’이란 뜻에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침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잘 믿기로 서약하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혈통이나 민족, 핏줄이나 서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곧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는 혈통과 서열을 중시하는 가부장시대에 장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지 아니하고, 불신앙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졌고, 그 자리를 나중 된 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근동의 다른 많은 민족들보다 출발이 상당히 늦고, 소수일 뿐 아니라, 생활하기에 매우 열악하여 버려지다시피 한 팔레스타인 중부고원과 사막지역을 차지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이시고, 참 신이시며, 유일한 신이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민족으로써의 자부심과 긍지를 나타내는 선민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근동지역과 이집트는 이미 5-6천 년 전부터 고대문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고 정착하기 시작한 때는 3천 4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후발주자 중의 후발주자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민족의 역사를 아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 역사가 히브리력으로 2025년 5월은 5785년에 불과합니다.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의 씨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이란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관이고 신앙고백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혈통이나 민족, 핏줄이나 서열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틀 속에서, 곧 이런 역사의식과 신앙고백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이 되고, 종교적 우수성에서 타민족이 추종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민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언급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오만이란 자기우상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배타주의이고, 수천 년의 피압박서러움에서 만들어진 영토주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배타주의와 영토주의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에서와 정신적인 면에서 민족과 영토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고, 하나님이 새 천년에 걸맞게 주신 기독교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경험했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것과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대 원칙에 적용을 받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민의 자격을 빼앗기게 된 것이며, 그들은 ‘구약’의 선민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의 선민으로 그 자리를 승계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신앙의 세계는 서열파괴의 세계란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가 먼저 믿고, 누가 나중 믿었는가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것과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대 원칙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겸손하게 하나님과의 약속의 끈, 곧 믿음의 끈을 놓지 말고,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 위에 굳게 서야할 줄 압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상실한 것은 그가 불신앙의 계보, 곧 가인과 이스마엘의 계보를 이어 갔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맏아들로 태어나 장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장자권을 팔았으며(25:33), 타민족의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그의 후손들도 타민족과 통혼함으로써 신앙의 순수성의 상실을 가속시켰고 혼혈 민족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에서는 비록 아브라함의 후예지만, 택함 받은 백성의 계열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통혼의 문제점은 솔로몬과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의 혼합으로 순수성이 상실되고, 신앙의 퇴보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데 있습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경건한 믿음의 가정, 곧 언약백성의 혈통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입니다. 결혼 초기만 해도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에서에게는 세 명의 아내들이 있었고, 세일 산에 정착하기 전인 가나안에 거주할 당시에 태어난 자식들의 이름에는 경건한 이삭과 리브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부인 ‘아다’에게서 낳은 아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힘’이란 뜻이 있고, 부인 ‘바스맛’에게서 낳은 아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이 있으며, 부인 ‘오홀리바마’에게서 낳은 아들 ‘여우스’와 ‘얄람’은 각각 ‘하나님이 재촉하시는 자’, ‘하나님이 감추시는 자’란 이름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에서의 족보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그 부모가 경건할지라도, 그 자녀가 세상을 쫓아가고 세상과 타협한다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반열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가 큰일에 충성할 수 없듯이 작고 사소한 경건생활을 무시하면 성도의 자격상실로 이어지고, 축복의 반열에서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훗날 에서의 후손은 세일 땅과 호리족속을 점령한 후에 에돔왕국을 건설하였는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과는 악연의 끈을 이어갔습니다. 에돔인들은 출애굽 당시 그들의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고(민 20:14-20), 사울(삼상 14:47), 다윗(왕상 11:14-17), 솔로몬(왕상 11:14-25), 여호사밧(대하 20:22)을 대적하였으며, 다윗에게 정복당한 이후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을 당시에는 여호람을 배신하였습니다(대하 21:8).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져간 에서의 후예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민족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악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1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세 이전시대에 이미 에돔에 왕이 있었고, 에돔은 그 왕의 통치를 받는 왕정국가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 민족이 이스라엘보다 진일보한 정치체제를 갖추고 절대군주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왕과 족장을 중심으로 독립된 나라를 형성하여 외형적인 번영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재 에돔이란 나라는 인류 역사상 수많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듯이 역사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언약백성을 괴롭히며 하나님과 대적했던 자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은 육의 백성보다 물질적인 면에서 부족한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육의 지배는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왕이시기 때문에 세상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안전과 평화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입장에서 세상적인 영광은 결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축복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전 1:2, 12:8).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썩어질 세상 것에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영적인 것에 두어야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생명책, 곧 하나님의 백성의 족보에 그 이름이 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이름이 새해 한해를 위한 생명책에 실리기를 기원하면서 매년 초가을 신년행사 때마다 회개와 기도와 자비를 베풂으로써 일 년간 살아온 잘못된 삶을 반성하고 새해동안에는 착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복음을 거부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만이 기록될 수 있는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축복이 주어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신실하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만이 신성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족보인 영원한 생명책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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