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목사의 양부 김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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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목사가 말하는 양아버지 김은석 목사
정리: 조동호 목사,
참고: 김성철 목사의 자서전, {삶이란, 감사하면 그것으로 O.K다}(도서출판 진흥,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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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거주하는 김성철 목사가 김은석 목사를 처음 본 것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까운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였다.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을 무렵, 즉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김은석 목사 부부가 김성철 목사의 부모(김주일, 구봉림) 댁으로 피신을 왔던 것이다. 김성철 목사 가족은 전쟁이 끝난 후 고국에 돌아와 밀양 가까운 예림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김주일은 김은석 목사를 늘 찾아다녔는데, 어느 날 김은석 목사가 사모 김완례와 함께 모친(구봉림)을 찾아와 열 살 무렵의 김성철을 양자로 데려 갔다. 김은석 목사와 의형제를 맺은 부친(김주일)이 김은석 목사에게 둘째 아들 김성철을 양자로 넘겼던 것이다. 김은석 목사는 황해도 평산군 단구리에서 지주 계급에 속하는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김종은이었고, 성격은 급하고 고집스러웠다. 동네 개구쟁이에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른에게도 겁을 주었는데, 걸핏하면 나무 위로 새끼줄을 매고 “죽어버리겠다”고 위협을 주는 괴팍한 성격이었고, 큰아들로서 대우받고 자란 터라 안하무인이었다. 김은석 목사는 16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여인에게 부모의 결정으로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생식기 이상으로 우울증을 앓던 가운데 살림집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집안이 몰락하였고, 김은석은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청년들이 철들면 애국자가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여 애국청년 기독인이 되었고, 또 다른 부인과 재혼하여 아들을 얻어 이름을 성환이라 지었다. 그러나 아들은 세 살 때 죽었고, 연이어 부인도 죽고 말았다. 김은석 목사는 또 다시 중국과 일본을 떠돌다가 세 번째 부인을 일본에서 얻게 되었다. 처녀장가는 아니었고, 교회에서 중매로 맺어졌는데, 그분이 김완례이다. 김완례는 충청도 사람이지만 원래 고향은 이북이었다. 서울에 와서 경성신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고 있었다. 김완례의 첫 남편은 충남 연산 사람으로서 결혼하자마자 고향에 좀 다녀오겠다고 한국에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편지가 날아왔는데, “내가 지금 몸이 많이 아파서 가지 못한다.”고 했고, 얼마 후에는 “죽었으니까 오지 말라”는 통보가 왔다. 그렇게 남편을 잃고, 전도 부인이 되어 열심히 교우들을 심방하고 다녔는데, 교우들이 접대로 떠준 얼음물을 마시고 냉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김은석 목사와의 사이에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 김완례는 품위가 있고 현대적 감각을 가진 인텔리였다. 김은석을 만나 재혼하였으나 남편이 쫓기는 신세라 일본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해방직전에 “범이 죽을 때는 호랑이 굴로 간다”며 잡혀도 한국에 가서 잡히겠다고 결심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곧이어 조국이 광복을 맞았다. 김은석 목사는 전도생활에 전념하면서 서울 역전의 빨간 색 벽돌(세브란스) 빌딩을 빌려 ‘백만 귀환 동포 영접 위원회’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큰 솥을 걸고 교회에서 쌀을 공급받아 오가는 사람을 먹이고 재우면서 귀환 동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당시에는 여관도 없던 때라 일본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귀환 동포들의 수용소 역할을 하였다. 강신명 목사, 한경직 목사도 그 때 함께 활동하였다. 또 구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애국활동을 하였다. 1948년 청주지방노회의 구연직 목사의 ‘함께 일하자’는 청을 받아드려 충청북도 부강에 내려가 교회를 섬겼다. 목회를 하면서 성경에 몰두하였고, 자연스럽게 성경연구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김은석 목사는 장로교 교리에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성서로 돌아가자. 성서에는 교파가 없다.”라는 독립교회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교파를 초월하여 진정한 “교회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외쳤다. 그리하여 예배 중심의 3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충북 부강에서의 일이다.
김은석 목사는 잉여물자를 알뜰히 모아 팔아서 대전시 선화동 351번 1호의 땅 385평을 샀다. 선화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6.25사건이 터지기 이전의 일이었다. <김은석 목사의 옵아듸야(오바댜) 끝 여백에 남긴 메모에 의하면, 선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주소는 선화동 2구 315번 였다. "1953년 8월 25일에는 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나의 주택에서 봉독하였다.">
1.4후퇴 전에 김성철 목사와 김완례 사모는 피난하여 충북 부강 인근의 칠미에 머물렀고, 김은석 목사는 경남 사창에 머물렀다. 김성철 목사 가족은 다시 생모와 형제자매들이 사는 충북 계산군 소수면(수리)의 생가근처에서 지내다가 수복 후 서울 집을 팔고 대전으로 이사하였다. 김성철 목사 가족이 피난 중에 찾아다녔던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와 충북 계산군 소수면(수리), 충북 부강, 대전 선화동은 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곳이다. 이들 교회들은 김은석 목사와 그의 가족들이 직접 세웠거나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힐요한 선교사가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대전으로 유치한 분은 김은석 목사였다. 김은석 목사는 1963년 1월에 소천 하였다. 충남 연산에서 가까운 부적면 충곡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밤 10시가 넘어서 찐 고구마와 날고구마를 먹고 탈장이 되었다. 소천하기 3년 전에 위 수술을 받았던 터라 그게 원인이 되어 복통을 일으켜 앓다가 이틀 만에 소천 하였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임종을 보지 못하였다. 최봉석 장로(당시는 집사, 명달재 목사의 장인) 김성철 목사에게 김은석 목사의 유언과 남긴 물품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양아들 김성철 목사가 대를 이어 꼭 목사가 되길 바랐다. 그가 그에게 남긴 것은 헐렁한 가방하나였는데, 그 초라하고 낡은 가방 속에는 구리돈, 납 돈 몇 푼과 가방만큼이나 낡은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 성경이 46년 만에 김성철 목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연구소에서는 김은석 목사가 남긴 성경을 기반으로 그의 신학사상을 연구할 계획이다. 김은석 목사의 활동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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