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장성만목사-국민일보 역경의 열매(31-4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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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만 목사(31) 은행 반대 무릅쓰고 ‘학자금 대출제’ 관철
[역경의 열매] [2009.05.10 17:52]
나는 조금씩 정치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아니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내게 계속 지혜를 주셨다. 나의 관심은 온통 '복지사회 건설'에 있었다. 내가 정당에 들어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을 세워 젊은이를 교육한 것도 복지사회 구현 때문이었다.
정책위의장을 맡고 보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곳에 보냈는지 확신이 서는 것이었다. 정치인이 개인의 욕심을 버리면 국민이 보인다.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면 구체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의 학자금 문제가 시급했다. 영세민 자녀들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학자금 융자 제도'를 만들었다. 은행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융자해주고 이자의 50%는 정부가 부담하는 제도였다. 학생은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원금을 상환하는 제도였다. 서민과 학생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은행과 정부는 격렬히 반대했다. 나는 나름대로 모든 정책에 대해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이 일을 기뻐하실까. 과연 국민들이 기뻐할까.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책인가."
이 물음이 바로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됐다. 내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아도 별반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학자금 융자 제도를 반대하는 은행과 정부에 맞서 수차례 당정협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 제도를 확정했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든 것에 대해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 외에도 대학 교수들의 연구년제를 도입했다. 교수들의 재충전을 위해 연구비를 지급하고 단기간 외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안식년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지만 이 제도가 처음 실시된 1986년에 가장 많은 국공립대학 교수들이 연구비를 지원받아 해외에 나갔다.
나는 교육자다. 교육은 나의 주요 관심사다. 나는 교육현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인사사고가 발생하면 택시를 잡느라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좀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공용 자동차를 한대씩 지급하면 좋겠다. 교장선생님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부상당한 학생을 신속히 병원에 데려갈 수도 있다."
국회 예산심의 때 이 안건을 강력히 주장해 예산을 받아냈다. 그리고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자동차 한대씩 배정했다. 교장선생님에 대한 의전도 변화가 필요했다. 마을의 행사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항상 말석에 앉았다. 나는 그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교육이 천대받는 사회는 결코 성숙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무엇을 배우겠는가. 교사들이 진정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위에서는 학교장의 의전에 대한 규정을 개정했다. 모든 행사에서 시장 군수 다음에 각급학교 교장이 앉도록 규정한 것이다. 스승의 날에는 각 부처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모교의 스승을 찾아가 정중히 인사하도록 하는 행사를 열었다. 모든 언론들이 이 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보도해주었다. 교육자가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자가 긍지와 보람을 가질 때 교육의 효과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믿는다. 교육 현장에 종사한 사람들은 그것을 분명히 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2) 기독가치관 바탕된 유럽 복지제도에 감명
[역경의 열매] [2009.05.11 18:03]
교육은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자녀가 어렸을 적에 좋은 습관을 심어놓으라. 그러면 그 습관이 평생 동안 이어지리라. 습관은 나무와 같다. 오래 된 나쁜 습관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습관과 신앙이다.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깨끗한 정치인의 꿈이었다. 적어도 물질의 유혹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 평의 땅도, 단 한 푼의 돈도 옳지 않은 것이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한다. 권력을 이용해 땅을 사거나 부를 취한 적이 없다. 초선 때부터 좋은 정치인의 습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984년 4월 13일부터 18일 동안 사회보장 제도와 의료보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찬혁 이병직 김찬우 의원 등과 함께 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소속이었다. 독일을 방문해 보니 보사부 장관이 여성이었다. 스웨덴의 보건장관도 여성이었다. 그들은 아주 소탈했다. 장관들이 손수 커피포트를 들고 우리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유럽의 복지정책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산시설도 완벽에 가까웠다. 유럽 방문은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한인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교민들과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요, 보람이었다. 유럽 사회복지 제도의 밑바닥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철저하게 깔려 있었다. 여성들의 눈부신 활동도 충격이었다.
91년 1월, 대통령 특사로 노르웨이 국왕 올리브 5세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에서 중립국인 노르웨이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왕궁에서 교회까지 운구마차가 이동할 때 국민들은 모두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올리브 5세는 평소 어린이들과 스키 타는 것을 즐길 정도로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교회에서 엄숙한 장례예배가 진행됐고, 모든 의식은 기독교적이었다. 그날 밤, 선친을 계승해 즉위한 하랄 5세가 조문온 외교사절을 초청해 리셉션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노태우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노 대통령께서 깊은 애도를 표하셨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 대통령께도 감사의 뜻을 잘 전해주세요."
그는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유럽의 왕족, 각국 대통령과 총리, 일본 왕태자, 북한 공사 등이 참석했다. 독일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내가 가장 만나보고 싶은 정치인이었다. 그도 역시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크리스천아카데미 운동을 적극 지원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대통령께서 한국교회에 큰 도움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는 밝은 웃음으로 응답했다. 참으로 소중한 만남들이었다. 다음날은 대사관 직원들과 만찬을 하면서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은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이것을 나는 '만남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잘못된 만남은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좋은 만남은 행복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결혼도 만남이고, 직장도 만남이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3) 국회부의장 당선… 우여곡절 속 선거법 처리
[역경의 열매] [2009.05.12 17:53]
12대 국회 후반기에 뜻하지 않은 중직이 맡겨졌다. 국회 정·부의장 선거에서 이재형 의원이 165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내가 160표를 얻어 부의장에 선출됐다. 재선의 국회 부의장은 분명히 이변이었다.
나는 당선 인사를 통해 용광로 같은 국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계층·세대·지역 간 불화와 갈등을 국회에 수렴해 용해시키는 국회가 되자고 역설했다. 나는 일단 짐을 싸서 부의장실로 옮겼다. 공간도 널찍하고, 비서진도 증원이 되고, 관용차도 지급됐다. 이제는 지역구를 관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됐다. 의장단은 입법부를 대표해 외국 손님을 맞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까지는 '정책'에 몰입했으나 이제부터는 조금씩 '정치'를 배우는 시기였다
1987년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김대중씨의 대선 후보 단일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특히 선거법 개정안을 놓고 각 당의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렸다. 정당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선택의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다수결원칙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를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재형 국회의장은 본회의를 열어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하려 했으나, 번번이 야당의 물리적인 힘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장석에 올라가려다 세 차례나 저지를 당한 것이다. 고령의 이 의장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장 부의장, 내가 몸이 매우 지쳐 있어요. 집에서 좀 쉬어야겠어요. 오늘 밤 마무리를 좀 부탁해요."
이 의장은 공관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사회권이 내게 부여됐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법안을 확정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어느 의원이 내게 충고를 해왔다.
"부의장이 단상에 오를 필요가 없어요. 본회의장 중앙홀이나 별실에서 변칙적으로 안건을 통과시키면 됩니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려면 중앙의 복도를 이용하는 수도 있어요. 의사봉을 쳐서 선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호권을 발동해서라도 의장석에 올라가 당당하게 안건을 통과시킬 것입니다."
중요한 안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앙 양심으로도 허락되지 않는 행위였다. 일순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끄러운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만감이 오갔다. 지금까지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하는 분야에서 일해온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와 정책은 분명히 달랐다.
여야가 신경전을 치르는 가운데, 벌써 시간은 새벽 1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국회의장석에 올라가서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버렸다. 그때가 88년 3월8일 오전 2시11분이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상에 오른 운명적인 밤이었다.
이 사건이 향후 나의 인생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그 말은 진리다.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나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당장 눈앞의 것에만 급급하면 큰 것을 보지 못한다.
선거법을 개정하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사회를 본 것으로 인해 혹독한 아픔을 겪게 됐다. 나는 그것도 필요한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4) 88년 총선 참패 “주의 뜻 알려주소서” 기도
[역경의 열매] [2009.05.13 18:07]
1988년 4월26일, 제13대 총선이 치러졌다. 나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부산 북갑에 출마했다. 그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일 해온 것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의 키워드는 '바람'이었다. 정치바람 앞에서는 업적 봉사 지역발전 등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에서는 선거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나님,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전투구에 절대로 말려들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업적에 의해 평가받지 못하고 지역감정과 바람에 좌우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미 양김씨의 바람은 영호남을 관통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각종 중상모략이 난무했다. 자고 일어나면 악성 루머가 새로 생겨났다. 선거운동원들이 폭행당해 입원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운동원과 가족들의 고군분투가 눈물겨웠다. 특히 아내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한탄했다.
"이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도둑으로 매도되고 있어요.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건가요."
정치는 참 잔인했다. 개인의 인격은 무참히 짓밟혔다. 항변하면 할수록 의혹만 커질 뿐이었다. 가족이 살고 있던 서울의 연립주택 사진을 찍어 대형 호화 주택에 살고 있는 양 호도했다. 내가 사는 집은 1동 9호였다. 마치 연립주택 전체가 나의 집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편 1∼3절).
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상대와 동일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집에 들어오면 곧 곯아떨어졌다. 아내와 운동원들은 초조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반면, 나는 항상 숙면을 취했다. 나의 이런 태도가 그들에게는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지독히도 낙천적인 성격 탓이었다. 아내는 "도대체 누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건지 모르겠다"며 핀잔을 주었다. 어떤 시련을 만나도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정치는 바람인 것을. 바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인 것을. 정책도, 공약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정치를 잘 몰랐다. 국회의원 임기 동안 열심히 일한 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다.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민주당 후보에게 큰 표 차로 패한 것이다. 50년을 살아오면서 맛본 첫 패배였다. 선거운동원들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보란 듯 재기하는 것이리라.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선거 패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저에게 가르쳐주십시오."
오히려 마음이 평안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는 절망이 없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이 실패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믿는다. 패배는 순간일 뿐이다. 희망은 영원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리라.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5) 낙선 충격 가시기도 전 어머니 하늘나라로
[역경의 열매] [2009.05.14 18:19]
제13대 총선 실패를 '사막에서 찾은 무덤'으로 정의했다. 무덤은 종말이 아니다. 무덤은 실패가 아니다. 무덤은 곧 희망이다. 나는 총선 실패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것을 '사막의 무덤'으로 표현했다.
'탈무드'를 보면 사막을 여행하는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부자가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그들은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그때 눈앞에 펼쳐진 공동묘지….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그것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암시였다.
낙선. 그것은 나의 묘지였다. 새로운 희망의 암시였다.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나를 지지해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지지해준 여러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낙선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출범시킬 것입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다. 내가 이사장을 맡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인들이 회비를 보탰다. 연구위원은 권영설 김동일 조중빈 유동길 이성복 서의택 오석기 교수 등이었다. 자문위원은 정성모 서정화 이자헌 김중위 안병규 오한구 씨 등 현역 의원이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시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후보의 선거유세 때, 수영비행장으로 사용하던 장소에서 100만여 명을 모았다. 또 31개 개신교단 대표를 서울 힐튼호텔에 초청해 기도회를 가졌다. 노 대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딸 노소영씨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노 대표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낙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랑하는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5남매를 기도로 키워온 한 여인의 삶이 89세로 마감된 것이다. 어머니는 참 건강한 분이었다. 별세하실 때까지도 자신의 옷을 스스로 빨아 입으시던 분이었다. 그런데 폐암으로 1년간 고생하다가 가셨다. 아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거처를 서울로 옮겼을 때도 부산에 남으셨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아들을 위해 새벽 한 시든, 두 시든 기다렸다가 손수 문을 열어주신 분이다. 밤늦게 귀가한 아들은 어머니에게 사탕 봉지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아주 기쁘게 그것을 받으셨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머니는 아들의 입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목사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100% 진실이라고 믿었다. 노모와 아들이 밤늦도록 사탕을 먹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내게 어려운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아들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청탁도 있었으리라. 어머니는 무서울 정도로 청빈하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딱 한번 도움을 요청한 적은 있다.
'장 목사, 돈을 좀 다오. 좀 많이 줘도 좋다."
첫 부탁이었다. 나는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마련해 어머니께 드렸다.
"궁금하나?"
"아닙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실려고요."
며칠 후 어머니는 아주 가뿐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 돈 잘 사용했다. 고맙데이."
어머니는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한 것일까.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6) 어머니 믿음이 아들 바르게 세워
[역경의 열매] [2009.05.15 18:43]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다. 어머니는 내가 준 돈으로 교회 건축 헌금을 드렸던 것이다.
"집 앞의 교회가 새 성전을 건축하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겠니. 장 목사 체면도 있는데 말이야."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숙연해진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지식도 많지 않았으나 지혜와 총명, 사랑은 그 어떤 분보다 충만했다. 지식은 노력해 얻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어머니는 독실한 믿음과 청아한 성품으로 자녀들을 바르게 키우셨다.
제13대 총선에 실패해 어머니의 가슴에 충격을 안겨드린 것만 같아 너무 죄송했다. 반드시 재기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재기를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것이 내내 마음이 아팠다.
장례식 날, 장대 같은 비가 온종일 내렸다. 실로암 교인묘지에 어머니를 묻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이미 천국에 올라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이별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활의 아침에 다시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별도 너무나 슬프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낳아주시고 생명처럼 소중하게 키워주신 분이니까.
장례식을 치른 사흘 후,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우리는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성구를 새겨 넣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장 25∼26절)
그날은 장대비가 멎고 햇빛이 묘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부활하신 어머니의 행복한 웃음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자녀교육을 말할 때마다 오상진 목사를 생각한다. 부산 지역에는 초교파 목회자 모임인 목양회가 있다. 올해 창립 40주년이다. 처음에는 회원들이 모두 젊었는데 지금은 백발이 성성하다. 역대 회장은 손옥현 오상진 김태동 김태현 김은곤 유방식 안동현 목사 등이다. 오상진 목사는 인품이 후덕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가끔 건강생활에 관한 강연도 했다. 그는 소위 자식 농사에 성공한 목사다. 서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와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가 아들이다. 회원들이 가끔 질문을 던졌다.
"오 목사님은 자제분들을 참 잘 키우셨어요. 자녀교육 비결이 뭡니까?"
그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한다.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지요."
한번은 부산에서 크리스천 21세기 포럼을 열었다. 주강사로 오정현 목사를 선정했다. 그런데 오 목사를 강사로 모셔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오상진 목사에게 부탁해서 강사로 초청할 수 있었다. 작년에 마부노호 선원들이 소말리아에서 억류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 기독교계가 모두 발 벗고 나서서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부산 기독교계의 능력엔 한계가 있었다. 대책위원장인 나와 이건재 목사, 강판영 임현모 장로와 함께 서울의 여러 교회를 방문해 지원을 호소했다. 성과는 미미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 오정현 목사를 만났다.
"소말리아에서 억류당한 선원들을 좀 도와주세요."
오 목사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다음 주일에 광고를 하고, 그 다음 주일에 헌금을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의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목사였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소말리아 선원들이 곧 풀려나서 오 목사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만 생각해도 고마울 뿐이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7) ‘4년제 대학 설립’ 12년 기도 응답
[역경의 열매][2009.05.17 17:57]
전화위복(轉火爲福).
13대 총선 실패는 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큰 사랑이었다. 그 즈음 나는 부산 북구에 4년제 대학 설립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대학 설립 조건은 까다로웠다. 우선 시설을 미리 갖추어야만 했다. 우리는 열심히 부지도 확장하고 건물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꿈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2년제 전문대학 출신들이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나는 우선 미국으로 건너가 재단 이사회에 뜻을 전했다.
"이제 4년제 대학이 필요합니다. 적극 도와주십시오." 미국 인디애나주 안트랜트에서 이사회가 열렸다. 이사들은 만장일치로 4년제 대학 설립을 가결해주었다. 이날 윌리엄 홀 이사장은 꿈의 실현을 위해 감격스러운 기도를 드려주었다. "한국에서 장성만 목사가 4년제 대학을 설립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어 그 꿈이 성취되게 하옵소서."
그들은 일단 대학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학교명도 '동서'로 잠정 결정했다. '동서'란 동쪽(East)과 서쪽(West)을 의미한다. 즉 동양과 서양, 한국과 미국의 협력을 상징한다. 나는 종합대학 승인을 얻기 위해 정원식 문교부 장관과 협의했었다. 그는 공과대학 말고는 승인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공과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선진조국 건설에 앞장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나의 건학 이념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1991년 허가를 받아 이듬해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12년 동안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정말 감격적인 입학식이었다. 4년제 대학 설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초대 학장에 정권섭 장로가 취임했다. 나는 이 학교가 MIT 공과대학처럼 세계적인 학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도 이 기도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세계 석학들이 몰려오는 명문이 될 것을 믿었다.
95년에 내가 총장으로 취임해 본격적인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총선 패배가 학교 성장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원래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목회와 교육, 그것이 나의 달란트였다. 우선 대학의 과장·계장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담당역제도'를 시행해 결제 단계를 대폭 축소했다. 기관이 활성화되려면 의사결정이 신속해야 한다. 담당자가 기안한 문서는 그 다음 단계를 거쳐 곧바로 총장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5단계 절차가 3단계로 축소됐다. 또 캠퍼스를 교육존 연구존 스포츠존으로 분류해 공원화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강의실에서는 화상강의가 가능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도서관은 이제 책 읽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은 종합기능이 갖추어진 곳이어야 한다.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 곳이다. 24시간 머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어야 한다."
모든 건물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 도서관은 나의 이런 철학을 담아 설계하고 건축했다.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이라고 자부한다. 서울의 많은 대학들이 우리 학교 도서관을 방문해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해도 캠퍼스에서 망치소리가 그친 적이 없다.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8) 교수 평가―영어 교육 강화 명문대와 경쟁
[역경의 열매] [2009.05.18 17:55]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아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교수평가 제도를 도입해 모든 교수가 교육·연구·봉사 부문에 대한 자기평가를 하는 한편 상호간의 상대평가를 해 A·B·C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것에 따라 업적급을 차등 지급하는 제도였다. 3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교수는 '브랜드 교수'라는 칭호를 주고 연구비 지급, 정년 보장, 강의시간 조정 등 특혜를 주었다. 교과과정에 영어 강좌를 18시간 포함시켜 어학 교육을 강화했다. 재학생 대부분은 전공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에 1년씩 연수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그것은 한 가지 분야를 특성화해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전략이었다. 후발 대학은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학과 동일한 과정으로 경쟁해서는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승산이 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그런 발상으로 시작한 것이 디자인 분야였다. 우선 학부에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멀티미디어 디자인, 환경 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5개 학과를 만들어 28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국내 여러 기업과 산학 협정을 맺었고, 일본 나가오카 조형대학, 독일 바이센제 예술대학, 중국 베이징 이공대학, 상하이 공정대학, 홍콩 폴리텍대학 등과 교류 협정을 체결해 교수 및 학생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0년에는 동서대에서 국제 디자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일본 등의 수많은 학자들이 내한했다.
나는 일단 일을 맡으면 그것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잠자는 시간을 가장 아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거나 중요한 일을 점검한다. 남들이 출근하기 전 거의 하루 일을 처리하는 셈이다. 신설 대학 총장은 시간의 디자이너가 돼야 한다.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1440분으로 미분해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2002년에 디자인 전문대학원 설립 허가를 받도록 도우셨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 디자인 분야의 박사를 배출했다. 디자인 전문대학원장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조영제 교수가 임명됐다. 일본 나가오카 조형대학 도요구치 학장과 독일 바이센제 예술대학 기노부 교수가 객원교수로 초빙됐다. 최상의 교수진을 확보한 것이다. 그해 교육부는 우리 학교를 디자인 분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했다. 특성화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나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건학 이념을 분명하게 밝혔다. 왜 학교가 존재하는지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대학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설립했다."
이 정신에 따라 국내외 봉사에 주력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개교 때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특히 국제기술봉사단의 인도네시아 봉사 활동은 15년째 계속되고 있다. 나도 학생들과 함께 현지를 방문했고, 페트라대학은 '한국의 날'을 제정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나중에 수라바야 시장이 동서대학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했다. 경남정보대학도 국제선교봉사단을 만들어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신다. 그 꿈은 기도를 통해 선명하게 현실로 나타난다. 게으른 사람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부지런한 사람,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언 12장 24절).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9) 임권택 감독 만나 영화예술대학 설립
[역경의 열매] [2009.05.19 17:53]
교육은 나무를 심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 부부는 캠퍼스에 나무를 심는 것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누가 나무를 주겠다고 하면 밤이든 낮이든 달려갔다. 한번은 울주군의 어느 분이 향나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트럭을 몰고 울주군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향나무를 가득 싣고 부산으로 오는 도중에 그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고 말았다. 아내가 비춰주는 전등불 밑에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그때 옮겨 심은 향나무 15그루는 지금 우리 대학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다.
동서대학은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2002년 디자인 분야 '최우수', 교양교육 분야 '최우수'를 받은 데 이어 2005년 대학종합평가 발전전략 및 비전 분야 '최우수', 국제통상학 분야 '최우수'평가를 받았다. 특히 지방대학 육성을 위해 정부가 추진한 지방대학 혁신역량사업(NURI)에서 동서대학이 지방대학 중 1위를 차지했다. 우리는 5개의 사업단을 배정받아 5년 동안 430억원을 지원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NURI 사업을 통해 많은 학생이 장학금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수들의 연구비가 증액됨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게 하옵소서."
동서대학은 개교 10주년을 맞아 슬로건 두 개를 정했다. 그것은 'Top 10 and to the world'와 '너희 가슴에 세계를 담아라'다. 첫 번째 슬로건은 특성화 분야에서 국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내 대학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즈음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지만, 겸손하고 다정다감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 대학에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붙인 단과대학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영화 연구소도 만들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도 영광입니다. 좋습니다."
그는 쾌히 승락해주었다. 임 감독은 지금 석좌교수로 학생들에게 실습지도를 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대학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제휴해 AFA(Asia Film Academy)도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의 젊은 영화 지망생들이 이곳에 와서 수업을 받으며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2006년 1월8일, 나는 대학교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김호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대학교회는 재적교인이 800여명쯤 된다. 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어 365일 계속 학원복음화를 위해 릴레이 기도를 드린다. 대학교회는 내가 설립한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다. 나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회는 영적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이곳에서 모아진 에너지가 대학에 송전되어 기도의 불을 밝혀야 한다. 대학교회에서 기도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캠퍼스는 계속 영적인 빛을 발하며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나는 목사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중단할 수 없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0) 20여개국 유명大와 결연 ‘교육 세계화’ 실현
[역경의 열매] [2009.05.20 17:47]
나는 학생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삶을 통해 체득한 소중한 경험들이다. 의지할 곳도, 충분한 돈도 없는 내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도움과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교육의 세계화'를 선언했다. 우선 외국인 교수를 50명 넘게 채용했다. 외국인 유학생도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였다. 재학생도 여러 나라로 파견했다.
동서대학교 채플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진행된다. 외국어로 예배도 드리고 언어도 익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또 매년 1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세계화 선언의 일환이다.
20여 개국을 방문해 유수한 대학들과 자매결연한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대학과 국립 사할린대학, 미국의 호프대학과 페리디킨슨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 일본의 리츠메이칸대학과 조사이국제대학, 스웨덴의 왕립대학, 독일의 베를린공과대학, 핀란드의 오울루대학, 중국의 중산대학과 산동대학과 북경이공대학과 중남재경대학과 상해공정기술대학, 말레이시아의 엠엠유(MMU) 등 78개 대학과 연구소간의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이 대학과 교수·학생의 교류는 물론 복수학위 수여까지 합의했다. 미국과 중국에는 현재 분교설립을 진행 중이다. 중국 분교는 오는 9월에 준공할 예정이다.
교육의 세계화 선언은 모든 분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화 선언으로 인해 다국적 교수와 다국적 학생이 넘쳐났다. 이것이 발전되어 2006년에는 역사적인 세계총장회의가 동서대학교 주최로 열렸다. 12개 국가에서 21개 대학의 총장들이 참석해 '부산 선언문'을 채택했다. 선언문에는 대학간 상호 학점인정, 복수학위 수여, 유학생 교류, 세계봉사단 결성 등이 포함됐다.
하나님이 대학을 설립하게 하시고 전 세계의 대학들과 교류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캠퍼스 선교를 위함이다. 캠퍼스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캠퍼스는 낚시로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다. 그물로 한꺼번에 수많은 영혼을 낚는 가두리 양식장이다. 우리 대학에는 캠퍼스 선교사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돕고 있다.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도 배출했다. 그것이 최고의 보람이다. 갓 입학한 학생들은 채플과 성경공부에 거부감을 보이며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기독교 교육이 너무 심하다. 우리에겐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1년만 지나면 이런 불만이 모두 사라진다. 일부 기독교대학이 채플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충고한다. 어정쩡한 태도가 문제다. 승진한 교수들은 반드시 연수원에 입소해 1박2일 동안 신앙연수를 받는다. 교육을 마친 교수들은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학원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나는 학기초와 학기말에는 직접 설교를 한다.
"이 학교는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세웠다. 기독교 정신이 희석되면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Number One이 아니라, Only One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1) 학생·교직원 기도로 무장… 학교 발전 원동력
[역경의 열매] [2009.05.21 17:47]
동서대는 1주일에 한 번씩 학생 채플이 열린다. 매월 한 번씩 학부 기도회가 열리고, 토요일은 월례기도회가 있다. 교목인 유의신 최훈규 목사가 교직원과 학생들의 영적 상담을 담당한다. 경남정보대학은 매주 학생, 교직원 채플이 열린다. 설립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10년 넘게 계속해오고 있어 감사할 뿐이다. 교목인 이창훈 윤석일 목사의 뜨거운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디지털대는 사이버대학이다. 박성일 교목이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다. 동서대는 박동순 총장, 경남정보대학은 황일주 총장, 부산디지털대는 최승욱 총장이 애쓰고 있다. 모두 대학교회 집사이며 충성된 믿음의 종들이다. 이런 훌륭한 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동서대 총장을 맡아 10년 동안 애써온 박동순 총장의 열정과 헌신은 참으로 놀라웠다. 박 총장은 캠퍼스를 정원처럼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의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학교는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학교에 들어서면 마치 아름다운 정원에 서 있는 느낌이다. 박 총장은 가끔 빗자루를 들고 캠퍼스를 청소한다. 부산일보는 총장이 교직원들과 청소하는 사진과 함께 '빗자루를 든 총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어 화제가 됐다.
나는 학생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불가능이 없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은 나의 삶을 통해 얻어진 소중한 경험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왜?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사장실 입구에 적힌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이 바로 나의 신앙고백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개척해 목회하던 대교그리스도의교회는 대학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곳은 캠퍼스 선교의 영적 발전소가 되고 있다. 교육과 목회는 비행기의 양 날개와 같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현재 캠퍼스에 1만평 규모의 엄광문화관을 짓고 있다. 국제 규모의 수영장과 학생 복지 시설을 갖춘 매머드 건물이다. 지역사회를 위해 새로운 봉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요즘 러브 코리아(Love Korea)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발벗고 나서자는 운동이다. 행동강령은 세 가지다. 첫째, 나라사랑 기도운동이다. 둘째, '1·3운동'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세 사람의 비기독교인을 보살펴주자는 것이다. 셋째, 'JJ(Jesus joy)운동'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소망을 갖자는 것이다. 이달 초 부산에서 열린 성결인대회에서는 러브 코리아 협약식이 열렸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담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자는 운동이다.
부산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부산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왔다. 요즘 그 기도가 조금씩 응답되고 있다.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가 부산기독교총연합회 회장,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가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 내가 크리스천21세기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세 개의 바퀴가 서로 잘 맞아떨어져 대형 집회를 성공시켰다. 2007년에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프랭클린 그레이엄 초청 전도집회가 사직운동장에서 열렸다. 부산의 기독교회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집회로 손꼽힌다. 해운대순복음교회 정경철 목사의 기도와 노력으로 조용기·조용목 목사 초청 집회가 열렸다. 이 모임도 대성공이었다. 정필도 최홍준 목사와 내가 공동대회장을 맡아 적극 참여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2·끝) 주 은총 함께 한 삶이 희망 잃은 이들에 위로 됐으면
[역경의 열매] [2009.05.22 18:15]
굿바이 맥시…. 생큐 레쉬….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선교사의 이름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갔다. 나는 그분들 덕분에 꿈을 활짝 펼칠 수 있었다. 맥시 선교사의 무덤은 일본에 있다. 소천하기 전, 아내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선물도 드리고, 생일파티도 열어주었다. 레쉬와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글 솜씨가 특출했던 레쉬는 매번 수십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와 나를 감동시켰다.
"장 목사, 학교 운영하느라 힘들지? 걱정하지 마. 요즘 내가 소설을 쓰고 있어. 왜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는지 알아? 이 소설로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인세로 학교에 장학금을 보낼 거야."
노 선교사의 눈물겨운 사랑을 어찌 잊으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혈육도 아닌데, 국적도 다른데 어떻게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황에 맞도록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손길이 놀라울 뿐이다. 환경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특히 실의에 잠긴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현재의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십시오. 온유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것입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지금 모든 것이 어렵다고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마세요. 운외창천(雲外蒼天). 지금 땅에는 암울한 비가 내리지만, 구름 밖에는 푸른 창공이 빛나고 있어요.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요. 꿈을 가져요. 힘들어도 밝은 표정을 지어요. 하나님이 밝게 웃는 그대를 도와줄 거예요."
믿음도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절대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신앙,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야곱의 신앙,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요셉의 신앙이 그것이다. 나는 단 한번도 인생을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차남 제원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남이 제18대 총선에 관심을 보였을 때, 나는 정치 경험을 들려주었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정말 공의를 위해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공인이 되면 사사로운 것은 포기해야 한다."
제원은 총선에 처음 출마해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다. 정치란 참 어려운 것이다. 나는 정치에 입문한 후, 목사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종이 될 수는 없었다. 여당의 요직에 있으면서 단 한 건도 불의한 일에 연루되지 않은 것은 오직 기도 덕분이었다. 나의 기도뿐만 아니라, 주위의 중보기도 덕분이었다.
기도도 '파종의 원리'가 적용된다. 부모가 뿌린 기도의 씨앗은 자녀들이 수확한다.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 기도하는 부모의 자녀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현재 동서대학교 학생이 1만여 명이다. 경남정보대 학생이 8000여명, 부산 디지털대 학생이 4000여명, 교직원이 1000여명에 이른다.
우리 부부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기도의 위력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이야기가 사사로운 자랑에 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인생의 짐이 무거워 탄식하는 사람들, 미래에 두려움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이보다 더한 보람이 없겠다. 지금까지 열독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역경의 열매] [2009.05.10 17:52]
나는 조금씩 정치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아니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내게 계속 지혜를 주셨다. 나의 관심은 온통 '복지사회 건설'에 있었다. 내가 정당에 들어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을 세워 젊은이를 교육한 것도 복지사회 구현 때문이었다.
정책위의장을 맡고 보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곳에 보냈는지 확신이 서는 것이었다. 정치인이 개인의 욕심을 버리면 국민이 보인다.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면 구체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의 학자금 문제가 시급했다. 영세민 자녀들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학자금 융자 제도'를 만들었다. 은행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융자해주고 이자의 50%는 정부가 부담하는 제도였다. 학생은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원금을 상환하는 제도였다. 서민과 학생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은행과 정부는 격렬히 반대했다. 나는 나름대로 모든 정책에 대해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이 일을 기뻐하실까. 과연 국민들이 기뻐할까.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책인가."
이 물음이 바로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됐다. 내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아도 별반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학자금 융자 제도를 반대하는 은행과 정부에 맞서 수차례 당정협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 제도를 확정했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든 것에 대해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 외에도 대학 교수들의 연구년제를 도입했다. 교수들의 재충전을 위해 연구비를 지급하고 단기간 외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안식년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지만 이 제도가 처음 실시된 1986년에 가장 많은 국공립대학 교수들이 연구비를 지원받아 해외에 나갔다.
나는 교육자다. 교육은 나의 주요 관심사다. 나는 교육현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인사사고가 발생하면 택시를 잡느라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좀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공용 자동차를 한대씩 지급하면 좋겠다. 교장선생님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부상당한 학생을 신속히 병원에 데려갈 수도 있다."
국회 예산심의 때 이 안건을 강력히 주장해 예산을 받아냈다. 그리고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자동차 한대씩 배정했다. 교장선생님에 대한 의전도 변화가 필요했다. 마을의 행사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항상 말석에 앉았다. 나는 그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교육이 천대받는 사회는 결코 성숙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무엇을 배우겠는가. 교사들이 진정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위에서는 학교장의 의전에 대한 규정을 개정했다. 모든 행사에서 시장 군수 다음에 각급학교 교장이 앉도록 규정한 것이다. 스승의 날에는 각 부처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모교의 스승을 찾아가 정중히 인사하도록 하는 행사를 열었다. 모든 언론들이 이 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보도해주었다. 교육자가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자가 긍지와 보람을 가질 때 교육의 효과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믿는다. 교육 현장에 종사한 사람들은 그것을 분명히 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2) 기독가치관 바탕된 유럽 복지제도에 감명
[역경의 열매] [2009.05.11 18:03]
교육은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자녀가 어렸을 적에 좋은 습관을 심어놓으라. 그러면 그 습관이 평생 동안 이어지리라. 습관은 나무와 같다. 오래 된 나쁜 습관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습관과 신앙이다.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깨끗한 정치인의 꿈이었다. 적어도 물질의 유혹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 평의 땅도, 단 한 푼의 돈도 옳지 않은 것이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한다. 권력을 이용해 땅을 사거나 부를 취한 적이 없다. 초선 때부터 좋은 정치인의 습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984년 4월 13일부터 18일 동안 사회보장 제도와 의료보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찬혁 이병직 김찬우 의원 등과 함께 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소속이었다. 독일을 방문해 보니 보사부 장관이 여성이었다. 스웨덴의 보건장관도 여성이었다. 그들은 아주 소탈했다. 장관들이 손수 커피포트를 들고 우리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유럽의 복지정책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산시설도 완벽에 가까웠다. 유럽 방문은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한인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교민들과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요, 보람이었다. 유럽 사회복지 제도의 밑바닥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철저하게 깔려 있었다. 여성들의 눈부신 활동도 충격이었다.
91년 1월, 대통령 특사로 노르웨이 국왕 올리브 5세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에서 중립국인 노르웨이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왕궁에서 교회까지 운구마차가 이동할 때 국민들은 모두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올리브 5세는 평소 어린이들과 스키 타는 것을 즐길 정도로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교회에서 엄숙한 장례예배가 진행됐고, 모든 의식은 기독교적이었다. 그날 밤, 선친을 계승해 즉위한 하랄 5세가 조문온 외교사절을 초청해 리셉션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노태우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노 대통령께서 깊은 애도를 표하셨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 대통령께도 감사의 뜻을 잘 전해주세요."
그는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유럽의 왕족, 각국 대통령과 총리, 일본 왕태자, 북한 공사 등이 참석했다. 독일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내가 가장 만나보고 싶은 정치인이었다. 그도 역시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크리스천아카데미 운동을 적극 지원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대통령께서 한국교회에 큰 도움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는 밝은 웃음으로 응답했다. 참으로 소중한 만남들이었다. 다음날은 대사관 직원들과 만찬을 하면서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은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이것을 나는 '만남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잘못된 만남은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좋은 만남은 행복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결혼도 만남이고, 직장도 만남이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3) 국회부의장 당선… 우여곡절 속 선거법 처리
[역경의 열매] [2009.05.12 17:53]
12대 국회 후반기에 뜻하지 않은 중직이 맡겨졌다. 국회 정·부의장 선거에서 이재형 의원이 165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내가 160표를 얻어 부의장에 선출됐다. 재선의 국회 부의장은 분명히 이변이었다.
나는 당선 인사를 통해 용광로 같은 국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계층·세대·지역 간 불화와 갈등을 국회에 수렴해 용해시키는 국회가 되자고 역설했다. 나는 일단 짐을 싸서 부의장실로 옮겼다. 공간도 널찍하고, 비서진도 증원이 되고, 관용차도 지급됐다. 이제는 지역구를 관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됐다. 의장단은 입법부를 대표해 외국 손님을 맞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까지는 '정책'에 몰입했으나 이제부터는 조금씩 '정치'를 배우는 시기였다
1987년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김대중씨의 대선 후보 단일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특히 선거법 개정안을 놓고 각 당의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렸다. 정당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선택의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다수결원칙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를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재형 국회의장은 본회의를 열어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하려 했으나, 번번이 야당의 물리적인 힘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장석에 올라가려다 세 차례나 저지를 당한 것이다. 고령의 이 의장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장 부의장, 내가 몸이 매우 지쳐 있어요. 집에서 좀 쉬어야겠어요. 오늘 밤 마무리를 좀 부탁해요."
이 의장은 공관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사회권이 내게 부여됐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법안을 확정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어느 의원이 내게 충고를 해왔다.
"부의장이 단상에 오를 필요가 없어요. 본회의장 중앙홀이나 별실에서 변칙적으로 안건을 통과시키면 됩니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려면 중앙의 복도를 이용하는 수도 있어요. 의사봉을 쳐서 선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호권을 발동해서라도 의장석에 올라가 당당하게 안건을 통과시킬 것입니다."
중요한 안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앙 양심으로도 허락되지 않는 행위였다. 일순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끄러운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만감이 오갔다. 지금까지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하는 분야에서 일해온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와 정책은 분명히 달랐다.
여야가 신경전을 치르는 가운데, 벌써 시간은 새벽 1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국회의장석에 올라가서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버렸다. 그때가 88년 3월8일 오전 2시11분이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상에 오른 운명적인 밤이었다.
이 사건이 향후 나의 인생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그 말은 진리다.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나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당장 눈앞의 것에만 급급하면 큰 것을 보지 못한다.
선거법을 개정하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사회를 본 것으로 인해 혹독한 아픔을 겪게 됐다. 나는 그것도 필요한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4) 88년 총선 참패 “주의 뜻 알려주소서” 기도
[역경의 열매] [2009.05.13 18:07]
1988년 4월26일, 제13대 총선이 치러졌다. 나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부산 북갑에 출마했다. 그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일 해온 것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의 키워드는 '바람'이었다. 정치바람 앞에서는 업적 봉사 지역발전 등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에서는 선거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나님,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전투구에 절대로 말려들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업적에 의해 평가받지 못하고 지역감정과 바람에 좌우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미 양김씨의 바람은 영호남을 관통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각종 중상모략이 난무했다. 자고 일어나면 악성 루머가 새로 생겨났다. 선거운동원들이 폭행당해 입원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운동원과 가족들의 고군분투가 눈물겨웠다. 특히 아내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한탄했다.
"이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도둑으로 매도되고 있어요.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건가요."
정치는 참 잔인했다. 개인의 인격은 무참히 짓밟혔다. 항변하면 할수록 의혹만 커질 뿐이었다. 가족이 살고 있던 서울의 연립주택 사진을 찍어 대형 호화 주택에 살고 있는 양 호도했다. 내가 사는 집은 1동 9호였다. 마치 연립주택 전체가 나의 집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편 1∼3절).
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상대와 동일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집에 들어오면 곧 곯아떨어졌다. 아내와 운동원들은 초조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반면, 나는 항상 숙면을 취했다. 나의 이런 태도가 그들에게는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지독히도 낙천적인 성격 탓이었다. 아내는 "도대체 누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건지 모르겠다"며 핀잔을 주었다. 어떤 시련을 만나도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정치는 바람인 것을. 바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인 것을. 정책도, 공약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정치를 잘 몰랐다. 국회의원 임기 동안 열심히 일한 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다.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민주당 후보에게 큰 표 차로 패한 것이다. 50년을 살아오면서 맛본 첫 패배였다. 선거운동원들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보란 듯 재기하는 것이리라.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선거 패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저에게 가르쳐주십시오."
오히려 마음이 평안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는 절망이 없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이 실패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믿는다. 패배는 순간일 뿐이다. 희망은 영원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리라.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5) 낙선 충격 가시기도 전 어머니 하늘나라로
[역경의 열매] [2009.05.14 18:19]
제13대 총선 실패를 '사막에서 찾은 무덤'으로 정의했다. 무덤은 종말이 아니다. 무덤은 실패가 아니다. 무덤은 곧 희망이다. 나는 총선 실패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것을 '사막의 무덤'으로 표현했다.
'탈무드'를 보면 사막을 여행하는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부자가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그들은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그때 눈앞에 펼쳐진 공동묘지….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그것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암시였다.
낙선. 그것은 나의 묘지였다. 새로운 희망의 암시였다.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나를 지지해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지지해준 여러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낙선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출범시킬 것입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다. 내가 이사장을 맡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인들이 회비를 보탰다. 연구위원은 권영설 김동일 조중빈 유동길 이성복 서의택 오석기 교수 등이었다. 자문위원은 정성모 서정화 이자헌 김중위 안병규 오한구 씨 등 현역 의원이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시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후보의 선거유세 때, 수영비행장으로 사용하던 장소에서 100만여 명을 모았다. 또 31개 개신교단 대표를 서울 힐튼호텔에 초청해 기도회를 가졌다. 노 대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딸 노소영씨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노 대표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낙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랑하는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5남매를 기도로 키워온 한 여인의 삶이 89세로 마감된 것이다. 어머니는 참 건강한 분이었다. 별세하실 때까지도 자신의 옷을 스스로 빨아 입으시던 분이었다. 그런데 폐암으로 1년간 고생하다가 가셨다. 아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거처를 서울로 옮겼을 때도 부산에 남으셨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아들을 위해 새벽 한 시든, 두 시든 기다렸다가 손수 문을 열어주신 분이다. 밤늦게 귀가한 아들은 어머니에게 사탕 봉지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아주 기쁘게 그것을 받으셨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머니는 아들의 입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목사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100% 진실이라고 믿었다. 노모와 아들이 밤늦도록 사탕을 먹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내게 어려운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아들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청탁도 있었으리라. 어머니는 무서울 정도로 청빈하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딱 한번 도움을 요청한 적은 있다.
'장 목사, 돈을 좀 다오. 좀 많이 줘도 좋다."
첫 부탁이었다. 나는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마련해 어머니께 드렸다.
"궁금하나?"
"아닙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실려고요."
며칠 후 어머니는 아주 가뿐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 돈 잘 사용했다. 고맙데이."
어머니는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한 것일까.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6) 어머니 믿음이 아들 바르게 세워
[역경의 열매] [2009.05.15 18:43]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다. 어머니는 내가 준 돈으로 교회 건축 헌금을 드렸던 것이다.
"집 앞의 교회가 새 성전을 건축하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겠니. 장 목사 체면도 있는데 말이야."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숙연해진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지식도 많지 않았으나 지혜와 총명, 사랑은 그 어떤 분보다 충만했다. 지식은 노력해 얻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어머니는 독실한 믿음과 청아한 성품으로 자녀들을 바르게 키우셨다.
제13대 총선에 실패해 어머니의 가슴에 충격을 안겨드린 것만 같아 너무 죄송했다. 반드시 재기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재기를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것이 내내 마음이 아팠다.
장례식 날, 장대 같은 비가 온종일 내렸다. 실로암 교인묘지에 어머니를 묻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이미 천국에 올라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이별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활의 아침에 다시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별도 너무나 슬프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낳아주시고 생명처럼 소중하게 키워주신 분이니까.
장례식을 치른 사흘 후,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우리는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성구를 새겨 넣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장 25∼26절)
그날은 장대비가 멎고 햇빛이 묘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부활하신 어머니의 행복한 웃음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자녀교육을 말할 때마다 오상진 목사를 생각한다. 부산 지역에는 초교파 목회자 모임인 목양회가 있다. 올해 창립 40주년이다. 처음에는 회원들이 모두 젊었는데 지금은 백발이 성성하다. 역대 회장은 손옥현 오상진 김태동 김태현 김은곤 유방식 안동현 목사 등이다. 오상진 목사는 인품이 후덕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가끔 건강생활에 관한 강연도 했다. 그는 소위 자식 농사에 성공한 목사다. 서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와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가 아들이다. 회원들이 가끔 질문을 던졌다.
"오 목사님은 자제분들을 참 잘 키우셨어요. 자녀교육 비결이 뭡니까?"
그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한다.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지요."
한번은 부산에서 크리스천 21세기 포럼을 열었다. 주강사로 오정현 목사를 선정했다. 그런데 오 목사를 강사로 모셔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오상진 목사에게 부탁해서 강사로 초청할 수 있었다. 작년에 마부노호 선원들이 소말리아에서 억류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 기독교계가 모두 발 벗고 나서서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부산 기독교계의 능력엔 한계가 있었다. 대책위원장인 나와 이건재 목사, 강판영 임현모 장로와 함께 서울의 여러 교회를 방문해 지원을 호소했다. 성과는 미미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 오정현 목사를 만났다.
"소말리아에서 억류당한 선원들을 좀 도와주세요."
오 목사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다음 주일에 광고를 하고, 그 다음 주일에 헌금을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의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목사였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소말리아 선원들이 곧 풀려나서 오 목사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만 생각해도 고마울 뿐이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7) ‘4년제 대학 설립’ 12년 기도 응답
[역경의 열매][2009.05.17 17:57]
전화위복(轉火爲福).
13대 총선 실패는 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큰 사랑이었다. 그 즈음 나는 부산 북구에 4년제 대학 설립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대학 설립 조건은 까다로웠다. 우선 시설을 미리 갖추어야만 했다. 우리는 열심히 부지도 확장하고 건물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꿈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2년제 전문대학 출신들이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나는 우선 미국으로 건너가 재단 이사회에 뜻을 전했다.
"이제 4년제 대학이 필요합니다. 적극 도와주십시오." 미국 인디애나주 안트랜트에서 이사회가 열렸다. 이사들은 만장일치로 4년제 대학 설립을 가결해주었다. 이날 윌리엄 홀 이사장은 꿈의 실현을 위해 감격스러운 기도를 드려주었다. "한국에서 장성만 목사가 4년제 대학을 설립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어 그 꿈이 성취되게 하옵소서."
그들은 일단 대학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학교명도 '동서'로 잠정 결정했다. '동서'란 동쪽(East)과 서쪽(West)을 의미한다. 즉 동양과 서양, 한국과 미국의 협력을 상징한다. 나는 종합대학 승인을 얻기 위해 정원식 문교부 장관과 협의했었다. 그는 공과대학 말고는 승인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공과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선진조국 건설에 앞장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나의 건학 이념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1991년 허가를 받아 이듬해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12년 동안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정말 감격적인 입학식이었다. 4년제 대학 설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초대 학장에 정권섭 장로가 취임했다. 나는 이 학교가 MIT 공과대학처럼 세계적인 학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도 이 기도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세계 석학들이 몰려오는 명문이 될 것을 믿었다.
95년에 내가 총장으로 취임해 본격적인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총선 패배가 학교 성장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원래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목회와 교육, 그것이 나의 달란트였다. 우선 대학의 과장·계장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담당역제도'를 시행해 결제 단계를 대폭 축소했다. 기관이 활성화되려면 의사결정이 신속해야 한다. 담당자가 기안한 문서는 그 다음 단계를 거쳐 곧바로 총장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5단계 절차가 3단계로 축소됐다. 또 캠퍼스를 교육존 연구존 스포츠존으로 분류해 공원화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강의실에서는 화상강의가 가능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도서관은 이제 책 읽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은 종합기능이 갖추어진 곳이어야 한다.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 곳이다. 24시간 머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어야 한다."
모든 건물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 도서관은 나의 이런 철학을 담아 설계하고 건축했다.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이라고 자부한다. 서울의 많은 대학들이 우리 학교 도서관을 방문해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해도 캠퍼스에서 망치소리가 그친 적이 없다.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8) 교수 평가―영어 교육 강화 명문대와 경쟁
[역경의 열매] [2009.05.18 17:55]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아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교수평가 제도를 도입해 모든 교수가 교육·연구·봉사 부문에 대한 자기평가를 하는 한편 상호간의 상대평가를 해 A·B·C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것에 따라 업적급을 차등 지급하는 제도였다. 3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교수는 '브랜드 교수'라는 칭호를 주고 연구비 지급, 정년 보장, 강의시간 조정 등 특혜를 주었다. 교과과정에 영어 강좌를 18시간 포함시켜 어학 교육을 강화했다. 재학생 대부분은 전공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에 1년씩 연수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그것은 한 가지 분야를 특성화해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전략이었다. 후발 대학은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학과 동일한 과정으로 경쟁해서는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승산이 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그런 발상으로 시작한 것이 디자인 분야였다. 우선 학부에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멀티미디어 디자인, 환경 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5개 학과를 만들어 28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국내 여러 기업과 산학 협정을 맺었고, 일본 나가오카 조형대학, 독일 바이센제 예술대학, 중국 베이징 이공대학, 상하이 공정대학, 홍콩 폴리텍대학 등과 교류 협정을 체결해 교수 및 학생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0년에는 동서대에서 국제 디자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일본 등의 수많은 학자들이 내한했다.
나는 일단 일을 맡으면 그것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잠자는 시간을 가장 아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거나 중요한 일을 점검한다. 남들이 출근하기 전 거의 하루 일을 처리하는 셈이다. 신설 대학 총장은 시간의 디자이너가 돼야 한다.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1440분으로 미분해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2002년에 디자인 전문대학원 설립 허가를 받도록 도우셨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 디자인 분야의 박사를 배출했다. 디자인 전문대학원장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조영제 교수가 임명됐다. 일본 나가오카 조형대학 도요구치 학장과 독일 바이센제 예술대학 기노부 교수가 객원교수로 초빙됐다. 최상의 교수진을 확보한 것이다. 그해 교육부는 우리 학교를 디자인 분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했다. 특성화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나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건학 이념을 분명하게 밝혔다. 왜 학교가 존재하는지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대학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설립했다."
이 정신에 따라 국내외 봉사에 주력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개교 때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특히 국제기술봉사단의 인도네시아 봉사 활동은 15년째 계속되고 있다. 나도 학생들과 함께 현지를 방문했고, 페트라대학은 '한국의 날'을 제정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나중에 수라바야 시장이 동서대학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했다. 경남정보대학도 국제선교봉사단을 만들어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신다. 그 꿈은 기도를 통해 선명하게 현실로 나타난다. 게으른 사람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부지런한 사람,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언 12장 24절).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9) 임권택 감독 만나 영화예술대학 설립
[역경의 열매] [2009.05.19 17:53]
교육은 나무를 심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 부부는 캠퍼스에 나무를 심는 것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누가 나무를 주겠다고 하면 밤이든 낮이든 달려갔다. 한번은 울주군의 어느 분이 향나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트럭을 몰고 울주군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향나무를 가득 싣고 부산으로 오는 도중에 그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고 말았다. 아내가 비춰주는 전등불 밑에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그때 옮겨 심은 향나무 15그루는 지금 우리 대학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다.
동서대학은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2002년 디자인 분야 '최우수', 교양교육 분야 '최우수'를 받은 데 이어 2005년 대학종합평가 발전전략 및 비전 분야 '최우수', 국제통상학 분야 '최우수'평가를 받았다. 특히 지방대학 육성을 위해 정부가 추진한 지방대학 혁신역량사업(NURI)에서 동서대학이 지방대학 중 1위를 차지했다. 우리는 5개의 사업단을 배정받아 5년 동안 430억원을 지원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NURI 사업을 통해 많은 학생이 장학금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수들의 연구비가 증액됨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게 하옵소서."
동서대학은 개교 10주년을 맞아 슬로건 두 개를 정했다. 그것은 'Top 10 and to the world'와 '너희 가슴에 세계를 담아라'다. 첫 번째 슬로건은 특성화 분야에서 국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내 대학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즈음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지만, 겸손하고 다정다감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 대학에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붙인 단과대학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영화 연구소도 만들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도 영광입니다. 좋습니다."
그는 쾌히 승락해주었다. 임 감독은 지금 석좌교수로 학생들에게 실습지도를 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대학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제휴해 AFA(Asia Film Academy)도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의 젊은 영화 지망생들이 이곳에 와서 수업을 받으며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2006년 1월8일, 나는 대학교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김호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대학교회는 재적교인이 800여명쯤 된다. 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어 365일 계속 학원복음화를 위해 릴레이 기도를 드린다. 대학교회는 내가 설립한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다. 나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회는 영적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이곳에서 모아진 에너지가 대학에 송전되어 기도의 불을 밝혀야 한다. 대학교회에서 기도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캠퍼스는 계속 영적인 빛을 발하며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나는 목사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중단할 수 없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0) 20여개국 유명大와 결연 ‘교육 세계화’ 실현
[역경의 열매] [2009.05.20 17:47]
나는 학생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삶을 통해 체득한 소중한 경험들이다. 의지할 곳도, 충분한 돈도 없는 내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도움과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교육의 세계화'를 선언했다. 우선 외국인 교수를 50명 넘게 채용했다. 외국인 유학생도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였다. 재학생도 여러 나라로 파견했다.
동서대학교 채플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진행된다. 외국어로 예배도 드리고 언어도 익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또 매년 1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세계화 선언의 일환이다.
20여 개국을 방문해 유수한 대학들과 자매결연한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대학과 국립 사할린대학, 미국의 호프대학과 페리디킨슨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 일본의 리츠메이칸대학과 조사이국제대학, 스웨덴의 왕립대학, 독일의 베를린공과대학, 핀란드의 오울루대학, 중국의 중산대학과 산동대학과 북경이공대학과 중남재경대학과 상해공정기술대학, 말레이시아의 엠엠유(MMU) 등 78개 대학과 연구소간의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이 대학과 교수·학생의 교류는 물론 복수학위 수여까지 합의했다. 미국과 중국에는 현재 분교설립을 진행 중이다. 중국 분교는 오는 9월에 준공할 예정이다.
교육의 세계화 선언은 모든 분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화 선언으로 인해 다국적 교수와 다국적 학생이 넘쳐났다. 이것이 발전되어 2006년에는 역사적인 세계총장회의가 동서대학교 주최로 열렸다. 12개 국가에서 21개 대학의 총장들이 참석해 '부산 선언문'을 채택했다. 선언문에는 대학간 상호 학점인정, 복수학위 수여, 유학생 교류, 세계봉사단 결성 등이 포함됐다.
하나님이 대학을 설립하게 하시고 전 세계의 대학들과 교류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캠퍼스 선교를 위함이다. 캠퍼스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캠퍼스는 낚시로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다. 그물로 한꺼번에 수많은 영혼을 낚는 가두리 양식장이다. 우리 대학에는 캠퍼스 선교사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돕고 있다.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도 배출했다. 그것이 최고의 보람이다. 갓 입학한 학생들은 채플과 성경공부에 거부감을 보이며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기독교 교육이 너무 심하다. 우리에겐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1년만 지나면 이런 불만이 모두 사라진다. 일부 기독교대학이 채플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충고한다. 어정쩡한 태도가 문제다. 승진한 교수들은 반드시 연수원에 입소해 1박2일 동안 신앙연수를 받는다. 교육을 마친 교수들은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학원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나는 학기초와 학기말에는 직접 설교를 한다.
"이 학교는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세웠다. 기독교 정신이 희석되면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Number One이 아니라, Only One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1) 학생·교직원 기도로 무장… 학교 발전 원동력
[역경의 열매] [2009.05.21 17:47]
동서대는 1주일에 한 번씩 학생 채플이 열린다. 매월 한 번씩 학부 기도회가 열리고, 토요일은 월례기도회가 있다. 교목인 유의신 최훈규 목사가 교직원과 학생들의 영적 상담을 담당한다. 경남정보대학은 매주 학생, 교직원 채플이 열린다. 설립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10년 넘게 계속해오고 있어 감사할 뿐이다. 교목인 이창훈 윤석일 목사의 뜨거운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디지털대는 사이버대학이다. 박성일 교목이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다. 동서대는 박동순 총장, 경남정보대학은 황일주 총장, 부산디지털대는 최승욱 총장이 애쓰고 있다. 모두 대학교회 집사이며 충성된 믿음의 종들이다. 이런 훌륭한 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동서대 총장을 맡아 10년 동안 애써온 박동순 총장의 열정과 헌신은 참으로 놀라웠다. 박 총장은 캠퍼스를 정원처럼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의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학교는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학교에 들어서면 마치 아름다운 정원에 서 있는 느낌이다. 박 총장은 가끔 빗자루를 들고 캠퍼스를 청소한다. 부산일보는 총장이 교직원들과 청소하는 사진과 함께 '빗자루를 든 총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어 화제가 됐다.
나는 학생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불가능이 없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은 나의 삶을 통해 얻어진 소중한 경험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왜?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사장실 입구에 적힌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이 바로 나의 신앙고백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개척해 목회하던 대교그리스도의교회는 대학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곳은 캠퍼스 선교의 영적 발전소가 되고 있다. 교육과 목회는 비행기의 양 날개와 같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현재 캠퍼스에 1만평 규모의 엄광문화관을 짓고 있다. 국제 규모의 수영장과 학생 복지 시설을 갖춘 매머드 건물이다. 지역사회를 위해 새로운 봉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요즘 러브 코리아(Love Korea)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발벗고 나서자는 운동이다. 행동강령은 세 가지다. 첫째, 나라사랑 기도운동이다. 둘째, '1·3운동'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세 사람의 비기독교인을 보살펴주자는 것이다. 셋째, 'JJ(Jesus joy)운동'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소망을 갖자는 것이다. 이달 초 부산에서 열린 성결인대회에서는 러브 코리아 협약식이 열렸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담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자는 운동이다.
부산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부산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왔다. 요즘 그 기도가 조금씩 응답되고 있다.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가 부산기독교총연합회 회장,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가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 내가 크리스천21세기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세 개의 바퀴가 서로 잘 맞아떨어져 대형 집회를 성공시켰다. 2007년에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프랭클린 그레이엄 초청 전도집회가 사직운동장에서 열렸다. 부산의 기독교회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집회로 손꼽힌다. 해운대순복음교회 정경철 목사의 기도와 노력으로 조용기·조용목 목사 초청 집회가 열렸다. 이 모임도 대성공이었다. 정필도 최홍준 목사와 내가 공동대회장을 맡아 적극 참여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42·끝) 주 은총 함께 한 삶이 희망 잃은 이들에 위로 됐으면
[역경의 열매] [2009.05.22 18:15]
굿바이 맥시…. 생큐 레쉬….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선교사의 이름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갔다. 나는 그분들 덕분에 꿈을 활짝 펼칠 수 있었다. 맥시 선교사의 무덤은 일본에 있다. 소천하기 전, 아내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선물도 드리고, 생일파티도 열어주었다. 레쉬와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글 솜씨가 특출했던 레쉬는 매번 수십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와 나를 감동시켰다.
"장 목사, 학교 운영하느라 힘들지? 걱정하지 마. 요즘 내가 소설을 쓰고 있어. 왜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는지 알아? 이 소설로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인세로 학교에 장학금을 보낼 거야."
노 선교사의 눈물겨운 사랑을 어찌 잊으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혈육도 아닌데, 국적도 다른데 어떻게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황에 맞도록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손길이 놀라울 뿐이다. 환경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특히 실의에 잠긴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현재의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마십시오. 온유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것입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지금 모든 것이 어렵다고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마세요. 운외창천(雲外蒼天). 지금 땅에는 암울한 비가 내리지만, 구름 밖에는 푸른 창공이 빛나고 있어요.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요. 꿈을 가져요. 힘들어도 밝은 표정을 지어요. 하나님이 밝게 웃는 그대를 도와줄 거예요."
믿음도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절대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신앙,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야곱의 신앙,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요셉의 신앙이 그것이다. 나는 단 한번도 인생을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차남 제원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남이 제18대 총선에 관심을 보였을 때, 나는 정치 경험을 들려주었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정말 공의를 위해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공인이 되면 사사로운 것은 포기해야 한다."
제원은 총선에 처음 출마해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다. 정치란 참 어려운 것이다. 나는 정치에 입문한 후, 목사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종이 될 수는 없었다. 여당의 요직에 있으면서 단 한 건도 불의한 일에 연루되지 않은 것은 오직 기도 덕분이었다. 나의 기도뿐만 아니라, 주위의 중보기도 덕분이었다.
기도도 '파종의 원리'가 적용된다. 부모가 뿌린 기도의 씨앗은 자녀들이 수확한다.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 기도하는 부모의 자녀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현재 동서대학교 학생이 1만여 명이다. 경남정보대 학생이 8000여명, 부산 디지털대 학생이 4000여명, 교직원이 1000여명에 이른다.
우리 부부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기도의 위력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이야기가 사사로운 자랑에 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인생의 짐이 무거워 탄식하는 사람들, 미래에 두려움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이보다 더한 보람이 없겠다. 지금까지 열독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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