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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장성만목사-국민일보 역경의 열매(11-2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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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05 2009.04.21 07:07

본문

장성만 목사(11) 교육사업 원대한 꿈,1965년 마침내 첫 삽

[역경의 열매] [2009.04.1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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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을 이루신다. 나는 평생 좋은 사람들과 사귐을 가졌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허황된 일에 허비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신앙의 힘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가치하고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젊은 시절에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달려왔다. 그 결과 다른 곳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었다. 특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게 된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다.

미국에 유학하기 전, 강릉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레쉬 선교사가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는 선교활동에 약간 지쳐 있었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실망한 상태였다.

"장 목사,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다. 맘에 들지 않는다. 이들의 정신 상태를 좀 개조시켜 다오."

교회에 가보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교회로 향하는 길은 질퍽거리고 지저분했다. 예배당 벽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흉물스러웠다. 도대체 예배당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쉬 선교사의 답답한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나는 집회를 갖기 전에 청년 몇 사람을 불러 모았다.

"예배드리는 공간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가. 이 지저분한 길을 좀 보라. 펄럭거리는 벽지를 보라.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집회를 인도할 수 없다. 우선 나와 함께 청소부터 하자."

청년들과 함께 길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모래를 퍼와 새로 길을 단장했다. 밝은 색 벽지를 사다가 예배당 벽면도 깔끔하게 도배했다. 하루 만에 전혀 새로운 예배당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레쉬 선교사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 목사, 넌 보통 한국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원한다. 미국에 다녀와서 무얼 할 계획인가."

"나는 대학을 세울 것이다. 고급 기술과 신앙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

레쉬 선교사는 내 비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선교 활동에 한계가 있다. 나도 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 미국에 다녀오면 나를 꼭 부산으로 불러다오. 나 역시 학교 사업에 관심이 많다."

"좋다. 나를 돕겠다니 정말 고맙다."

우린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선교사들은 약속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6개월 전, 그는 이미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 몇 년 전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 영남기독교실업학교를 세웠다.

1965년 11월. 원대한 꿈을 향한 출발의 총성이 울린 날이다. 레쉬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학교 건축을 위한 첫 삽을 뜬 날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학교 사업의 시작이었다. 내가 교장을, 레쉬가 교감을 맡았다. 나는 설립 허가를 얻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무려 36번이나 왕복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운영 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무인가로 운영해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레쉬 선교사는 처음부터 무인가를 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인가를 받지 않으면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렵다.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공부하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무인가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목표는 동일하나 그것을 성취하려는 방법이 조금 달랐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2) 귀국 후 과수원 땅 매입 학교 세워 건물 공사 중 폭우

[역경의 열매] [2009.04.1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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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 틈에 당당하게 누워있는 제국이가 참 자랑스러웠다. 가계(家系)를 이을 장남의 출산은 보통 큰 기쁨이 아니었다. 작고 예쁜 백금시계 하나를 사서 아내에게 선물했다. 결혼식 때 1달러짜리 시계를 패물로 준 미안함도 좀 덜기 위해서였다. 신시내티는 동양인이 아주 드문 도시다. 동양인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아주 재미난 뉴스였다. 한번은 신문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는 좀 당황했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낳았으니, 미국이라고 부르겠소. 미국(美國)이란 말은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오. 사람 이름으로도 괜찮지요?"

이튿날, 토리도시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에 우리 부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아들의 이름을 '미국'으로 지었다는 기사와 함께…. 귀국 후, 외할아버지가 제국(濟國)으로 이름을 지어주기 전까지 장남의 이름은 미국이었다. 지금도 미국의 친구들은 아들을 미국으로 부른다.

제국이를 낳고 2주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우리 부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난 것이 최고의 축복이었다. 비록 피부·언어·풍습은 다르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에 쉽게 친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형제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으면 매우 고달픈 삶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감사드렸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우리에게는 꿈과 비전이 있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분주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부부가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호라이즌지(誌) 주간 맥파란드 씨가 연락을 해왔다.

"장 목사, 한국에 돌아가면 매우 바쁠 것이다. 우리 집에서 좀 쉬었다 가기 바란다. 꼭 집에 들러다오."

우리 부부는 롱비치에 있는 그의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름다운 롱비치의 해수욕장에서 피로를 씻어냈다. 미국에 유학 와서 온전히 휴식을 취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롱비치에서 닷새 동안 머무르며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1965년, 드디어 내 그리운 고향 부산에 도착했다. 미국인 친구들의 말처럼 이제부터 고생의 시작이었다. 학교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꿈과 비전만 초롱초롱 빛났다. 강원도에서 사역하던 레쉬 선교사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우선 과수원을 하다가 그만둔 땅을 구입해 학교 건물인 알파홀을 짓기 시작했다. 레쉬는 바위를 깨뜨리고 블록을 찍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잠을 자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교 건물 공사를 하는 곳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길을 내주지 않으면 산 아래 주민들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빨리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

삽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비틀거리며 올라갔다. 이미 빗물이 범람해 마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나님, 학교를 지켜주세요. 만약 건물을 짓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도와주세요."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3) “절망 하지 않게 해주세요” 폭우 속 기도

[역경의 열매] [2009.04.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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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 칠흑 같은 어둠과 폭우가 손전등 불빛을 삼켜버렸다. 학교는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만약 공사장에 물이 차올라 산사태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폭우를 맞으며 산길을 올라갔다. 순간 발을 헛디뎌 심하게 고꾸라졌다. 나는 흙탕물에 휩쓸려 한참 동안 미끄러졌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몸이 걸렸다. 조금만 더 떠내려갔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믿음을 주세요. 소망을 주세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폭우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절규였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깨달았다. 나는 폭우 속에서 삽으로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계곡 쪽으로 유도했다. 이런 숱한 시련들을 딛고 첫 건물인 알파홀이 들어섰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됐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인가도 나지 않은 학교에 과연 학생들이 얼마나 찾아올 것인가. 더구나 당시에는 인문계를 숭상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기술자를 양성하는 실업계 학교는 가난하거나 성적이 신통치 않은 학생들이 가는 곳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트럭을 몰고 부산·경남 일대를 순회했다. 주로 극장·예식장·교회에서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우리나라도 곧 기능사회로 변한다.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고의 기술을 가르쳐줄 것이다. 학비는 걱정하지 마라. 모두 장학생이다."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생은 총 19명. 주로 부산·경남 지역에서 강연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들이었다. 교육 슬로건은 '성경과 보습을 들고'였다. 학훈은 '근면·자립·협동·신앙'으로 정했다. 이것이 2년제 초급대학의 첫 출발이었다. 내가 가사를 만들고, 부산대 이상근 교수가 곡을 붙여 교가도 만들었다.

"낙동강 굽어보는/민석대 위에/진리의 이상탑이/우뚝 서 있네/새 시대 새 일꾼을/길러나가는/아! 그 이름/경남공업전문대학/근면 자립 협동 신앙/우리의 학훈/만방에 펼치자/공대 경남공대."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적인 삶이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불신자였으나 졸업할 때는 기독교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도록 지도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나는 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수이며, 경비원이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감당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정말 필요한 시기였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게으르다. 게으른 민족은 절대 잘 살 수 없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자립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를 설립한 이듬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근면·자조·협동'이었다. 우리 학교의 교훈 4가지 중 '신앙'만 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학교가 새마을운동의 4대 정신을 모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준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학훈을 흉내 낸 것이랍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14) 1970년 정식 전문대 인가… 신입생 경쟁률 20대1

[역경의 열매] [2009.04.2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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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을 믿는다. 비록 지금은 입학생 19명의 초라한 입학식이지만, 나중에는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을 믿는다. 그것을 어느 목사님은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영광스런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의 시련을 극복했다. 절망의 벽은 탱크 같은 강한 기도로 분쇄하면 된다. 기도는 기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19명의 신입생을 나는 '엘리야의 구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엘리야가 처음 본 것은 손바닥만 한 구름이었지만 그것이 나중에 거대한 구름으로 변할 것을 믿었다. 어렵게 모집한 19명의 첫 신입생은 엘리야의 구름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기서 8장 7절)

학교의 발전을 위해 미국을 10여 차례 오가며 재정지원을 호소했고, 재미재단 이사회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주로 일을 했다. 이제 갓 시작한 학교였기 때문에 항상 일손이 부족했다. 2년 후에는 감격적인 첫 졸업식을 가졌다. 입학생 중 5명은 중도 탈락하고 14명만 남았다.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서로 고생을 많이 했기에 감동도 컸다.

1970년. 정식으로 전문대학교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정말 '엘리야의 구름'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신입생 80명을 모집하는데, 구름처럼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2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인 것이다. 일찍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하길 원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최소한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각 도시를 순회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 학교는 교명을 영남기독교실업학교, 부산실업전문학교, 경남공업전문대학, 그리고 경남정보대학으로 바꿔가며 명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140개 전문대학 중 금년에도 교육역량 강화사업에서 작년에 이어 전국 1위로 평가되어 최고액의 지원금을 받았다. 하나님은 꿈을 가진 백성을 사용하신다. 비전을 가진 사람을 당신의 뜻을 펼칠 도구로 사용하신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대학을 빠른 시일에 크게 발전시킨 비결이 뭡니까?"

"첫째는 설립정신에 충실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육시설을 첨단화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보따리 장사'였다. 학생들의 수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대리점을 통해 구매하지 않았다. 직접 본사에 가서 그것을 구입해왔다. 시마스 제작소와 메그로회사의 전자계측기인 오실로스코프 싱크스코프 밸런스 등을 구입할 때도 나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당자를 만났다.

"난 경남정보대학 학장이다. 학생들의 실습 기자재를 구입하려 한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개인에게는 기자재를 판매하지 않는다. 대리점을 통해 구입하기 바란다."

"잘 알고 있다. 학생들이 당신 회사의 기자재를 익혀놓으면 나중에 엄청난 판매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좀 다오. 결코 당신들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당신의 열정에 감동했다. 기자재의 값을 40% 할인해주겠다. 계속 우리와 거래해주기 바란다."

그들은 나의 뜻을 잘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기자재의 값을 40%나 할인해주었다. 시마스제작소와 메그로 회사가 이런 계약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내게 지혜와 용기를 공급해주셨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5) 캠퍼스 신앙교육 ‘목회자 11명 배출’ 결실

[역경의 열매] [2009.04.2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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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곧 만남이다. 좋은 교육은 좋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나는 한 학기에 두 차례씩 '학장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만남을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 갖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채플이다. 모든 지식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빛이 난다. 신앙이 없는 교육은 때론 공허할 뿐이다. 나는 그룬두비히의 책을 읽고 그의 삶을 많이 연구했다. 그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면 독서하고(知), 둘이면 노래하고(情), 셋이면 체조를 하자(意). 하나님·이웃·땅을 사랑하는 '삼애의 마음'을 갖자."

머리로 배우는 지적 교육, 가슴으로 느끼는 정서 교육, 손으로 일하는 의지적 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드시 1년에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열었다. 주일은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을 맡아 사역했고, 평일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학 중에는 미국에 건너가 도움을 청했다. 최근 파악해보니 경남정보대학 출신 목회자가 11명이나 됐다. 교회에서는 세족회를 만들어 신앙 좋은 청년들을 선발, 훈련시켰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목사가 2명 배출됐다. 서울 답십리교회 박구하 목사와 중국 선교사 김찬영 목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졸업생 중 목사 장로 집사가 많이 배출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나는 정말 학생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주 일본에 건너가 토목·측량기기를 구입해 배에 싣고 왔다.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부피가 큰 기계를 등분해 배에 싣고 오는 일이 많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항구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항만 노무자였으리라. 우리는 컴퓨터를 일찍 들여왔다. 4년제 대학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졸업생들을 우리 회사에 많이 좀 보내 달라."

기술교육은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여러 회사에서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산업화를 외치며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졸업생들은 학교에서 충분한 실습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울산 현대조선을 비롯해 각 회사에 수천 명이 취업했다. 또 한 가지 호재가 있었다. 중동건설 붐을 타고 측량 전기 토목 설계 기술을 가진 인력이 대거 중동에 파견된 것이다. 졸업생 취업률 100%.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경남정보대학의 첫 교수는 학장을 지낸 김수석 박사였다. 부산대 출신으로 토목공학을 전공한 분이었다. 원래 그는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우리 대학에 교수로 부임해온 이후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갖게 됐다. 내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지금 우리 교회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최근 김 교수 아들 결혼식 주례도 내가 맡았다. 2대에 걸쳐 한 사람이 주례를 선 일도 아주 드물 것이다. 우리 학교 출신으로서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로 돌아온 교수는 25명이다. 그 가운데 김희규 교수는 입학해 예수를 믿었고, 지금은 우리 교회 수석장로다. 교목인 이창훈 최훈규 목사도 모두 우리 학교 출신이다. 스승의 날이 되면 나는 이들로부터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6) ‘시한부 인생’ 살린 장학금 선행

[역경의 열매] [2009.04.2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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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한 소년 가장이 해외유학의 꿈을 성취한 것은 맥시 선교사 덕분이다.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박동순 총장의 기도 덕분이다. 좋은 사람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다. 이학수라는 이름도 잊을 수 없다.

1971년. 경남정보대학은 국내 최초로 사회교육원을 운영했다. 당시 한국에는 '사회교육원'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미국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대학에 주부·신부·노인·꽃꽂이 교실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개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경남정보대학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부와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캠퍼스는 학교가 아니라 공원처럼 변했다. 그 즈음 사업을 하는 이학수라는 분이 나를 찾아왔다.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내게 흰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봉투 하나에는 1000만원, 다른 봉투에는 500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당시 1500만원은 지금의 1억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그는 아주 창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 아들 이름이 종훈인데요. 이 돈으로 종훈장학회를 만들어주세요."

나는 아주 고맙게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종훈장학회를 만들어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죽을 날만 기다린다던 이학수씨가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장학금 수여식 때마다 그분이 직접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타인을 위해 선행을 쌓으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낀다.

경남정보대학은 발전을 거듭했다. 첫 신입생 19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재학생이 8000여명에 이른다. 매년 부흥회를 통해 학생의 30% 이상이 결신을 한다.

나는 정말 분주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의 성서학 강의는 물론 교회·대학 채플에서의 설교와 집필활동이 이어졌다. 결국 잠자는 시간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상 새벽 4시30분에 기상했다. 먼저 기도를 드린 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낼 원고를 집필한다. 그날 하루 중요한 일들은 새벽에 거의 마무리한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성공한다. 아침의 달콤한 잠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잠을 다스리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게으름을 다스리지 못하면 남들보다 앞설 수 없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장 10∼11절).

성경은 경고한다.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은 궁핍할 것이라고…. 늦잠을 자는 사람은 하루를 그만큼 늦게 스타트하는 것이다. 늦잠 자는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출발이 그만큼 늦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수면을 취한 기억이 없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7) 기독문화인협 결성 교회연합운동 ‘씨앗’

[역경의 열매] [2009.04.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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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노인처럼 사는 청년도 있다. 청년처럼 사는 노인도 있다. 괴테는 83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화가 샤갈이 마지막 작품을 완성한 것은 91세였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한 것은 20세였다. 예수는 33세에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인생의 길이와 부피는 결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1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50년 동안 목회를 해왔습니다. 대학을 세워 40년 동안 교육을 해왔고요. 국회의원으로 10년 동안 정치를 했습니다. 이것을 모두 합하면 100년입니다."

나는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다. 교육을 하면서 목회를 중단하지 않았고, 정치를 하면서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목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주 특별한 소명이었다. 교인이 아프면 심방을 가고, 주일예배를 위해 설교 원고를 준비했다. 세 사람의 몫을 감당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25권의 책을 집필했다. 모든 원고는 새벽에 완성됐다. 수면시간을 줄여서 창조적인 일에 투자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항상 열정적으로 살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꿈을 심으라고 강조한다.

"먹는 것과 심는 것을 구분하라. 먹는 음식은 어차피 모두 배설된다. 심는 것은 반드시 열매가 있다. 꿈을 심어라. 비전을 심어라. 여러분의 미래가 풍성해질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미래의 꿈을 심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여,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부지런한 습관을 달라고 기도하라."

어떻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능했는가. 소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심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먹어버렸으면 기적은 없었다. 먹은 것은 배설될 뿐이다. 소년은 소박한 자신의 도시락을 갖다 바쳤다. 즉 심은 것이다. 기적은 이 조그마한 '심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대학에 기도의 에너지가 넘쳐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최근 집사·장로 직분을 가진 34명의 교수를 선발해 '캠퍼스 선교사'로 임명했다. 나는 그들이 교수와 학생들 틈에 파고들어 놀라운 전도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한다. 학교에서는 가끔 감동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영문학 박사인 김진균 교수의 이야기는 지금도 교수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김 교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선교사를 자원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거절하고 험난한 선교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경남정보대학과 대학교회가 김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다. 여름방학 때는 학생선교봉사단을 구성해 필리핀에서 한 달 동안 봉사활동을 갖는다. 10년 넘게 해오는 일이다. 버스를 개조한 밥차를 이용해 노인들과 근로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도 우리의 봉사 중 하나다.

나는 1970년대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 교파의 벽은 너무 높았고,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심각했다. 심지어 보수적인 교단끼리도 강단·인적 교류가 없었다. 당시 초교파적인 연합기관은 YMCA와 YWCA, 그리고 기독교방송이 전부였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 4장4∼6절).

교회연합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방법이 뭘까. 그때 문득 떠오른 지혜가 있었다. 교회간 교류가 안 되면 우선 문화·예술 분야의 교류를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설립한 것이 부산기독교문화인협회였다. 음악가 화가 문필가 등이 회원으로 대거 가입해 연합운동을 펼쳤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8) 12년 기도 끝에 4년제 대학 설립

[역경의 열매] [2009.04.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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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벽은 세상의 그것보다 훨씬 견고했다. 교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했다. 부산YMCA 옥문석 총무, 부산기독교방송 김기엽 목사와 함께 교회 연합운동을 전개했다. 부산의 일간지 민주신보의 토요일판 한 면을 종교면으로 할애받아 '석(石)'이란 필명으로 칼럼을 집필했다. 또 젊은 초교파 목사들을 중심으로 목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강단교류, 공동 신학강좌, 잡지 발행 등의 연합사업이 꽃을 피웠다. 목양회는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지금은 부산이 교회 연합운동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교파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 특히 3년 전 20여명의 장로 기업인들로 구성된 크리스천21세기포럼의 활동은 괄목할 만했다. 강판녕 이성만 홍순모 이헌희 정종성 박재석 김영복 김정수 양한석 임현모 장로 등이 주축인 포럼은 문화예술·교육·사회봉사 등 3개 분야의 문화대상을 만들어 수상자에게 상금 1000만원과 상패를 수여하고 있다. 사회의 음지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을 발굴해 격려하는 행사다. 소말리아에서 납치된 한국인 선원들의 구명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나는 이 단체의 이사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다. 죽음이 곧 희망이다. 기독교는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종교다. 나는 절망의 밤이 오히려 축복의 아침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혜를 훌쩍 뛰어넘는다. 나의 지혜와 계획대로 된 것은 거의 없다.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 도우심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 25절).

나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학할 4년제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 부부는 무려 12년 동안 기도해 왔다. 총선에 실패해 낙심한 나에게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선물을 준비해놓으셨다. 12년 동안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1991년, 4년제 대학인 동서대학교가 인가를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꿈을 드디어 이루게 해주신 것이다. 그 대신 정치에서는 손을 떼고 교육과 목회에 전념하도록 새로운 길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동서대학교는 인가를 받은 이듬해부터 신입생을 모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이제 전문대학인 경남정보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학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이 생긴 것이다. 우리 부부는 감격적인 기도를 드렸다.

"사랑의 하나님, 새로운 일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대학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게 하옵소서."

1995년, 동서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꿈과 비전과 신앙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사실 그것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었다. 그 전에도 나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학생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내가 작사하고 김병율군이 작곡한 '일터는 삼천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반만년 묵혀놓은/삼천리 내 강토/피땀흘려 파헤쳐서/파종해보세/심은 뜻 귀하다면/알찬 열매 맺으리/아 수확의 그날 바라며/쉬임없이 나가네/한삽 두삽 우리 살림/불어난다/한손에 성경/또 한손엔 보습/우리의 일터는/옥토 삼천리"

총장을 맡아 처음 선언한 것이 교육의 세계화였다. 국내에만 머무는 교육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나는 세계 20여 국가 78개 대학 및 연구소와 교류협정을 체결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19) 개교 초기 아내 패물 팔아 직원 월급 마련

[역경의 열매] [2009.04.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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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이끄는 동력은 무엇인가. 삶의 동력은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목사·교육자·정치인이라는 1인 3역을 감당하면서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열정 때문이었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주장했지만, 나는 '열정이 이끄는 삶'을 말하고 싶다.

나는 항상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 일에 짓눌려 삶의 리듬을 망가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나는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은 후 5대양 6대주를 다녔다. 대학의 세계화를 추구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대학생들도 이젠 지구촌 전체를 껴안아야 한다. 그 일환으로 세계 대학총장회의를 우리 학교에서 개최했다. 또 외국 대학과의 학점 상호인정, 공동학위제도 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미국과 중국에 분교도 만들었다.

사실 경남정보대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레쉬 선교사와 아내 박동순 총장이다. 레쉬는 직접 블록을 찍어 학교를 지은 사람이다. 그는 인가문제로 나와 좀 의견 차이를 보였었다. 그러다가 경남정보대학이 정식으로 인가가 나고,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홀연히 한국을 떠났었다. 그때가 1971년이었다.

"장 목사, 당신의 생각이 참으로 옳았다. 내 임무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다. 이제 장 목사가 책임 있게 학교를 운영하는 게 좋겠다."

레쉬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 20년 만에 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감동적인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는 학교의 놀라운 성장에 크게 고무돼 레쉬 기념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두 번째 공신은 아내다. 부부는 한 지점을 바라봐야 한다. 시선을 한곳에 모으면 행복이 보인다. 아내는 처음부터 내가 바라보는 지점인 '대학'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부부가 함께 공동의 목표를 바라본 것이다. 영문학과를 졸업한 아내가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시작한 후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개교 초창기 아내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내는 직원들의 봉급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 패물을 모두 팔았다. 나중에는 집에 돈 될 만한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자를 갚고 나면 또 이자가 생기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6개월 동안 미국 20개주를 순회하며 도움을 호소한 적도 있었다.

나는 경남정보대학 개교를 앞두고 참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학교 창고를 열어보니 그곳에서 새끼 돼지들이 우글거렸다. 어떤 놈은 기둥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어떤 놈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창고가 온통 돼지 천지였다. 나는 원래 꿈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꿈이란 말인가. 이번만큼은 하도 꿈이 생생해서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저렇게 많은 새끼 돼지들은 난생 처음이오. 학교 창고에 웬 돼지들이 그리 많은지…. 도대체 이 꿈이 주는 암시가 무엇일까요."

아내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아주 멋진 해몽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해몽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그 꿈속에 하나님의 암시가 담겨 있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0) 학교에 돼지 넘치는 꿈… 전국서 인재 몰려

[역경의 열매] [2009.04.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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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꿈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다. 그중에서도 요셉의 꿈과 해몽은 단연 압권이다. 한번은 요셉이 이런 꿈을 꾸었다. 자신의 곡식 단이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이 빙 둘러서서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또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자신에게 큰 절을 하는 꿈이었다. 요셉은 결국 이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갔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바로왕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 있는데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 일곱 마리가 갈밭에서 갈잎을 뜯어 먹고 있는데, 그 뒤에 약하고 바짝 마른 흉악한 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소들이 살진 소를 다 잡아 먹었다.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한 식물, 한 줄기에 무성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비실비실하고 바짝 마른 일곱 이삭에게 먹히는 꿈이었다. 누가 내 꿈을 해몽하겠는가. 지혜 있는 점쟁이와 박사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해석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때 요셉이 좋은 암소와 이삭은 7년 풍년을 뜻하고, 흉악한 암소와 이삭은 7년 흉년을 뜻하니, 풍년에 곡물의 5분의 1을 거두어 흉년을 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이것이 그대로 적중해 요셉은 총리가 됐다.

나의 꿈도 분명히 무슨 암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창고에 새끼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꿈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나는 꿈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왠지 하나님의 특별한 암시가 있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대학을 운영하느라 너무 지친 우리 부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까 해서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다. 아내는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참 좋은 꿈인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몰려온다는 꿈이 아닐까요. 구름처럼 찾아온 학생들의 모습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신 것 같네요. 더욱 힘을 냅시다."

아내의 해몽이 제법 그럴 듯했다. 내가 이 꿈을 꾸었을 때가 1971년 초였다. 경남정보대학이 정식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내의 해몽은 그대로 적중했다. 학생 모집을 했는데, 운동장이 비좁아서 일부 학생들이 건물의 기둥을 붙잡고 서 있을 정도였다. 꿈에서 본 장면 그대로였다.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도 운동화를 신고 학교 언덕을 수십 번씩 오르내리던 아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희망의 언어를 들려준 아내가 고맙다. 그리고 지혜로운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육은 평생의 소원이요, 꿈이었다. 경남정보대학은 일취월장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근대화의 물결도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생 중 가장 보람 있고 분주한 나날이었다.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시 문화상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캠퍼스 중심에 초현대식 건물을 짓고 내 호를 따서 민석 기념관이라 명명했다. 거칠 것이 없는 성장의 연속이었다.

79년, 정국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해 10·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이어 12·12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최규하 총리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9월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나는 부산의 여러 모임에 참석해 나라의 안정을 역설하곤 했다. 이때 새로 등장할 정당은 전국에서 참신한 인물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정치에 참여하자는 제안을 두 차례나 받았지만 계속 거절했다. 그런데 평소 안면이 있던 어느 분이 조용히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이 뜻을 전하기 위해 심부름 온 사람일 뿐입니다." 이 만남이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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