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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창현) 목사 - 자료모음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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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 함태영 목사(1914.5.24-1983.11.28)
창현 함태영은 부친 함봉표의 항일의병전투참가로 왜경에 쫓기고 옥고까지 치름으로써 가세가 기울고 몇 차례 이사를 다녀야했던 환경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20대 초반에 부친의 유훈,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항일의사가 되고, 죽어서는 항일의귀가 된다)에 따라 항일운동을 꾀하였고, 목사가 된 이후에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살아서는 복음전도자가 되고, 죽어서는 밀알이 된다)의 신조로 도시보다는 농촌, 난민촌, 빈민촌에서 목회자로, 교육 사업가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하였다.
함태영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부친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배운 후 17세가 돼서야 비로소 보통학교를 마쳤다. 18살에 부산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과정을 21살에 마쳤고, 이 기간에 공사장에서 미장, 조적, 조각, 설계 등을 배워 건축기술자가 되었다. 같은 해 일본군징용을 피하여 만주에 머물다가 이듬해인 1936년 22세 때 담양선 철도 부설작업 한국인 조장을 맡았는데, 칼을 찬 일본인 조장이 한국인들을 멸시함으로 대항하여 맞서다가 일본인 조장이 빼든 칼에 함태영이 턱에 부상을 입었고, 이를 방어하던 함태영의 괭이에 일본인이 맞아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담양사건은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건으로써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일본인들이 복수를 하려고 함으로 피신하여 신의주로 갔다. 이때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동창 1명과 함께 압록강철교를 절단하려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1937년(23세)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선천으로 옮겨 기독교인 정용옥을 만나 결혼하였고, 장모 이봉녀 권사의 권유로 예수님을 믿고 이듬해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1년 27세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경찰서에 감금되었으나 탈출 후 만주에서 숨어 지내다가 1944년(30세)에 고향 순천에 혼자 내려와 몸을 숨겼다. 그러나 발각되어 투옥되었다가 8.15광복 때 석방되었다. 함태영은 곧바로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였고, 장로교 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사재를 처분하여 전남 승주군 별량면에 장로교회를 개척하였다.
1947년(33세)에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마포구 도화동으로 온 가족이 이사하여 월남난민촌에 임시로 기거하면서 강순명(교역자회) 목사를 도와 천막학교에서 교육과 전도에 힘썼다. 이때 김은석의 가족은 아현동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양자 김성철과 함태영의 장자 함동진이 이 천막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듬해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도화동산에 대지를 마련하여 주택을 짓고 점포를 운영하면서 종친인 함태영(咸台永, 심계원 원장 및 대한민국 부통령 역임) 목사가 학장으로 재직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에 입학하여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1947년에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입장에 반발하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로 시작된 신학교이다. 장로교는 기존세력인 통합파에서 1951년에 고려파(고려신학교)와 1953년에 기장파(조선신학교)가 떨어져 나갔다.
함태영은 이 무렵에 북에서 월남한 장로교 재건파신자 정희건을 만나 사귄 후 학업과 생업을 위해서 함께 나무젓가락 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신약성서교회 운동에 매료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고, 서울성서신학교(교장 힐 요한 선교사, 현 서울기독대학교)에 편입학하여 1955년 3월 3일 제1회로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성낙소 목사의 아들), 김태수(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 교수역임), 김현숙(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 이사 엮임),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교역자회 소속),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과 함께 졸업하였다.
함태영은 1950년(36세)에 6.25전쟁이 터지자 홀로 고향인 전남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피신하였다가 공산주의자인 초등학교 친구의 밀고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나 선친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몰래 풀려나 숨어 지냈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에 별도로 피신하였으나 사모 정용옥이 승주군 해룡면으로 친정 식구들을 찾아 나섰다가 공산주의자들의 검문에 걸려 투옥되었다가 탈출 후에 가족이 모두 안전한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부산에서는 1951년 2월 9일 기독교신보사가 주관이 되어 조직된 기독교선무원으로 발탁되어 국방부정훈국 산하에 파견되어 군목으로 종군하였다.
함태영은 1951년 3월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의 서병렬(徐炳烈) 목사의 집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이곳에서 이신(李信)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신은 감리교신학교를 마치고 1950년에 전의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6.25전쟁으로 고향 돌산에 피신하여 지내던 때였다.
광주 학동에 창틀까지 축조된 상태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된 큰 교회당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던 전라지방 젊은이들과 통합하기에는 장소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함태영은 1951년 5월에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사재를 처분한 돈과 부친의 지원금과 영광의 임모 장로의 헌금으로 일본 적산가옥 2층을 매입하여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이 건물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김은석과 김태수의 가족들도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의술을 가진 함태영의 셋째 동생 함태중이 재정을 후원하였고, 김은석, 이신, 김태수 등이 교수로 섬겼다. 이 건물에 강순명 전도자가 1952년 7월 13일에 천혜 경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이신은 받침에 헬라어로 ‘로고스’ 글자를 삽입한 ‘메노라’(일곱 가지 등대) 문양과 교명을 새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 현판을 제작하였다. 10여년 후 이신은 대전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의 현판도 동일한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동년 1951년(37세)에 김은석의 집례로 이신, 최요한, 장주열(최요한의 동서), 김재순(김교인 장로의 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또 함태영은 6.25전쟁 중에 통행의 제한을 받는 젊은 신약성서교회 전도자들을 위해서 종군당시 사귀었던 미8군 군목을 찾아가 통행증에 사인을 받아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도움을 주었다.
함태영은 동년(1951) 가을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사하여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교리 그리스도의 교회(현 금성교회)를 개척하였다. 동년(1951)에 이신도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 부임하여 10월까지 제1대 목회자로 섬긴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주하여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이곳에 개설하였고, 김은석, 함태영, 이신이 교수로 수고하여 김확실, 정찬성 등이 배출되었고, 환원신학 잡지, <로고스>를 발행하여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배포하였다.

함태영은 1952년 11월 15일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 마을회관을 빌려 복음공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함태영의 가족은 복음중학교 관리와 교사들의 식사제공문제로 거소를 충곡리 교회에서 신교리 교회로 옮겼다. 함태영의 셋째 동생 함태중은 운영후원자로, 막내 함태욱은 영어 강사로, 사모 정용옥은 교사들의 식사제공과 세탁 등으로 헌신하였다. 함태욱은 후일 서울성서신학교를 거쳐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여러 교회들에서 목회하였다. 복음공민중학교는 후일에 창현의 후배 겸 제자인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명하였다.
함태영은 1953년(39세)에 부친 송암 함봉표 지사(음력 3월 24일)와 사모 정용옥(7월 13일)을 사별하였다. 함봉표 지사는 유림에 속했으나 맏아들 함태영의 목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사모 정용옥은 모친과 함께 함태영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목회자가 되게 하였고 영양실조와 병고로 32세에 요절하기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당시의 궁핍했던 생활을 함태영이 남긴 요약설교지가 각종 이면지, 즉 경리장부, 요금고지서, 영수증, 전단지, 캘린더, 전보지, 결혼청첩장 등이었던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사모가 눈을 감는 날 함태영은 부여 귀암면 합송리 신학교에 가 있어서 임종을 보지 못했다. 사모는 장남 동진에게 “내가 죽은 후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라”고 유언으로 당부하였고, 고요히 찬송을 부르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동년 1953년 8월 4일 힐 요한과 통역 최순국이 신교리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방문하였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와 복음중학교를 물질로 크게 후원하던 함태중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맸었고, 함태영은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 소재 숭실중학교의 교장과 교목을 맡아 이사하였다. 힐 요한은 이신과 함께 숭실중학교를 찾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함태영은 동년 11월에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의 주택을 김모 여전도사에게 기증하여 도원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1955년(41세) 3월 3일에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로 졸업을 하였다. 이 무렵에 함태욱도 서울성서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57년(43세)에 전북 이리로 주거를 옮겨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겨 금암동에 주택을 지었고,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의 주택을 매입하여 전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겸하여 정착촌 의무실을 개설하였다.
1958년(44세)에는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전북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 전주시 소재)에 대지 200평에 건평 100여 평의 건물을 매입하여 용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완제품 약종상을 차려 원광대학교에 다니던 장남 동진이 군입대할 때까지 운영케 하였다. 함태영은 자신보다 13세나 아래인 이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초빙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고 침례를 베풀며 목회사역을 협의하였다.
1960년(46세)에 청주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62년(48세)에는 목회를 쉬며 시험을 받았다. 대전시 가오동 천변(川邊)에 판자로 움막을 짓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시멘트블록 공장을 운영하며 노동에 시달렸고, 각 제대한 동진이 작업을 도왔으나 경영이 부실하였다. 이 무렵 타 교단으로부터 유혹이 있었으나 물리치고 신앙노선을 지켰다.
1964년(50세)에 충북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남일면 방서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담임하였다. 건축이 전문이므로 교회를 꾸미고 보수하는 일을 자주 하였다. 한 번은 교회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낙상하여 갈비뼈가 상하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1970년(56세) 1월 25일 장남 동진이 최윤권의 주례로 결혼하였고, 1974년(60세)에는 논산 대명중학교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설립자로서 공로표창과 황금메달을 부상으로 받았다.
1975년(61세)에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장자 동진의 집에서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이상 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갑연을 가졌다.
1980년(66세)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방서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의 목회를 마지막으로 노환(반신마비와 당뇨) 때문에 은퇴하였고, 1983년(69세) 11월 28일 충남 대전시 가오동에서 소천 하였다.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살아서는 복음전도자가 되고, 죽어서는 밀알이 된다)의 신조로 도시보다는 농촌, 난민촌, 빈민촌 등지에서 목회자로, 교육 사업가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로 재물과 재능을 다 바쳐 헌신하였고, 남의 땅에 세운 시멘트 블록 움막과 낡은 찬송가와 성경책과 몇 권의 신학서적만을 남겼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75주년 기념대회 때 함태영과 장자 함동진에게 환원상(메달)을 각각 수여하였다.
창현 함태영의 부친, 송암(松庵) 함봉표(咸鳳表)는 항일의병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독립지사로서 일제의 핍박을 피하여 전남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에 정착한 유림에 속하였으나 맏아들 함태영의 목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사모 정용옥은 친정 모친과 함께 함태영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목회자가 되게 하여 궁핍했던 시절 불평 없이 남편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다가 영양실조와 병고로 32세에 요절하였다.
함태영의 막내 동생 석비 함태욱(晳譬 咸泰昱) 목사는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교대학교)와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를 나와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활동과 복음중학교에 기여하였고, 장남 함동수 전도자(교역자회)가 시무한 청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고 동역하였다.
순동식 목사는 창현 함태영의 셋째 사위로서 복음중학교 출신이며,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대전과 홍성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장산 함동진(長山 咸東振)은 함태영의 장자로 전북일보사 서무원, 시사통신 전북지사 무전사, 합동통신 전북지사 부무전사(副無電士) 등 주경야독으로 전주 공업 고등 기술학교 무선통신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성서신학교(서울기독대학교)와 한국성서신학교(대전)를 각각 중퇴하고, 서울기독대학 통신신학을 나와 서울 응암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개척교회 전도 활동을 하였고, 1970년대에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 본부’라는 이름으로 문서전도지를 저술하고, 서신회답도 하였으며, ‘신약교회’라는 연재물을 필경으로 작성하여 두 곳 교회의 주보에 제공하였다. 현재는 문인(시인, 아동문학가. 서예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기독교문인협회 회원, 한국아동문학회 회원 등)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함동진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였다. 1991년 6월 11일(음력4월30일)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를 작성하였고, 1993년 함태영 탄생 79주년에 수정 증보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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