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경 목사 및 한의사 면허 취득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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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경 목사
성수경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아들이다. 1937년 12월 24일 아침에 아버지가 일본 요츠야선교부에서 존
채이스(John T. Chase)로부터 건네받은 명함을 들고 채이스를 찾아갔다. 성수경은 그 때부터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1월경에 촬영된 한국인성경훈련원 학생들의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Korean Mustard Seeds,”
Korean Messenger(KM), February 1938>.
채이스는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서 성수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성수경은 성낙소의 아들로서 29살이며,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다년간 한국인 중학교 교사였으나 현재는 서울(서울에 있는)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고, 장차 자신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는 유능한 일꾼이며, 그리스도(인)의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필운동교회와 위동교회 사이를 아버지와 교대로 오가며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년을 일곱 혹은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May I Introduce to You,” KM, March 1949: 2>.
채이스가 성수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37년 12월 24일이었고, 1949년 3월에 29살이었으므로 채이스가 성수경을 처음 만났을 때 성수경의 나이는 17살 혹은 18살 때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년을 일곱 혹은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우리는 이 소년을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로 이해될 수 있다.
필운동교회는 성낙소 목사가 일제강점기 말엽 한약방(무면허)을 운영하여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중 1943년에 매입한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의 42평 초가로써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채이스가 1947년에 방문했을 때 필운동교회는 엷은 흙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었으나 1948년 말과 1949년 초에 방문했을 때는 벽이 수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예배처소가 필요했던 것은 다른 교회들과 다름이 없었다.
위동교회는 시골에 위치하였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무렵 위동교회는 개척된 지 6개월 정도 되었으며, 예배처소는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는 친구가 소유한 집이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7년에 한국에 왔을 때, 성수경은 날조된 살인 누명을 쓰고 서울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고, 혐의를 벗고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몇 달 동안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성수경은 채이스에게 말하기를 수감 중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성수경은 아버지 성낙소와 교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위동교회를 섬겼다<“Come with Me,” KM, March 1949: 2>. 채이스 선교사가 단기방문으로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들은 소식은 필운동교회에서 30명, 위동교회에서 8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The Year 1948,” KM, March 1949: 1>.
성수경은 존 힐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 32번지의 ‘기독교회선교부’ 재산을 되찾는 일에도 힘썼다. 존 채이스가 힘쓴 10여 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존 힐과 성수경의 노력으로 ‘기독교회선교부’의 재산을 1952년 중반 경에 돌려받게 되었다. 그 때의 상황을 존 힐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1951년 7월 3일까지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필자도 바로 그 날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필자는 부산에서 고아원을 시작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 뵈려고 갔었을 때, 그분은 필자더러 서울에서 시작하도록 권유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필자의 오랜 친구,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성수경을 찾았으며, 서대문 근처 송월동 32번지에 있었던 구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동행하였습니다. 전항섭은 탄환이 장전된 연발권총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으나 우리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임을 알고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건물의 절반을 차지했고, 전항섭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약 일 년 후에 미국 대사관과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침내 전씨를 몰아냈습니다. 그 대신 전씨는 정부가 일본인 자산에서 지불한 정착금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필자는 끝내 재산을 되찾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으며, 전쟁 중 폭격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구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돈을 들여 수리를 마쳤습니다[John J. Hill, “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 <쎄메론> 제7호 편집부(한성신학교, 1972)],
1950년대에 성수경은 존 힐을 도와 ‘기독교회선교부’ 고아원을 보살폈고, 1960년대 이후에는 대한기독교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성수경 목사 한의사 면허 취득 관련 자료
이 자료는 경기도 시흥시 소재 희망한의원 이강재 원장님께서 제공하여 주신 내용과 작성하신 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강재 원장님께서는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셨고, <시대를 따라 떠나는 체질침 여행>(행림서원, 2019)을 비롯하여 <학습 8체질의학> 등 다수의 체질학 관련 책들을 저술하신 한의사이십니다.
성수경 목사님의 생몰은 1920년과 1978년입니다. 1963년 3월에 실시된 제15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한의사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성수경 목사님은 1963년에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신 후 1966년에 개설된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과에서 체질의학 전공으로 1968년에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과 최초로 다른 한분과 함께 석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김종기 목사님에 따르면 독산동에서 한의원을 개업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수경 목사님은 한의업에 종사하시기 보다는 신학교에서 제자 양육과 목회활동에 주력하셨습니다. 이밖에도 성수경 목사님은 중등교사하시다가 서울대학교에서 보수교육을 받으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수경 목사님의 부친이신 성낙소 목사님도 한의사(무면허)로서 일제말인 1940년부터 미군정말인 1947년 사이에 선교사들이 부재했던 시절에는 필운동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재건하여 목회하시는 동안 생계를 위해서 한의업에 종사하셨습니다. 그리고 1957년 4월 30일에 출범된 '사상의학회'(四象醫學會)의 임원인 감찰부장을 역임하셨습니다.<동아일보 1957.5.3>, <시대를 따라 떠나는 체질침 여행>(행림서원, 2019) 20쪽.

한의대에는 역대로 나이가 많은 학생들의 그룹이 있었다. (뭐 동양의대 시절에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 먹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사’라고 불렸다. 나는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에 실린 ‘노정우 성수경 송일병’ 세 분의 사진10) 속에서 가운데 분의 벗겨진 머리가 자꾸떠올랐다. 그래서 앞에 말한 ‘동문요람’에서 찾아보았는데 성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헤맸다. 결론은 동문요람에 이름이 누락되었던 것이다. 학교를 실지로 다니지도 않았던 사람이 (의도적으로) 실릴 수는 있겠지만, 엄연히 졸업한 사람이 동문 명부에서 사라진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분은 동양의대를 졸업할 때 42세였고, 석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48세였다.
성수경11) 선배의 부친은 한국에서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했던 성낙소(成樂紹) 목사이다.12) 성수경 목사의 한의업은 전도의 목적이 우선이었고 또 생계활동으로도 필요했다. 그는 1920년 7월 27일에 태어났고 단국대학교 정치학과와 서울성서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62년에 동양의약대학을 졸업(11회)했고, 1963년 3월에 제15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968년에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요한의원(충정로)과 신성한의원(독산동)을 했다. 필운동교회와 위동교회의 목사, 대한기독교신학교 교수,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신길동 114-1) 목사였다. 1978년에 뇌출혈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요강』(1971. 5. 5.)이 있다.13).
10) 이 사진은 송일병 선생이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를 편집한 이경성 원장에게 제공했다.
11) 成守慶(1920.7.27. ~
1978)
12) 1927년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서 기독의교회(基督之敎會)를 시작했다.
13) 자료 탐색 도움 : 조동호
목사(빛과생명교회) 한기춘 원장(맥한의원) 서정철 원장(우리경희한의원)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이강재의 임상8체질] 목양체질(Hepatonia)과 고혈압 - 민족의학신문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편찬을 위한 편집위원들과의 인터뷰_송일병 교수 부분
“근데 그 인연이 노정우 교수가 사상의학을 최초로 지도교수가 됐어요. 내가 사상과목을 처음에 받게 된 경위가 대학원 1기생으로 사상과목을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됐는데 노정우 교수가 평소부터 나를 알고 있었지만 자주 알다 보니까 자기 무의촌 갈 영장을 나한테 넘겨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잖아요. 그 무의촌 갔다 와서 대학원 과정을 들어가야 되는데 ‘선생님 내가 무슨 과목을 하면 좋을까요.’ 하니 ‘사상과목의학 해야지.’ 학부도 사상의학이 없어요. 가르칠 게 없어 그러니까 대학원 과정에 무슨 과목을 석사과정을 하겠습니다 신청서를 내야 될 때 사상의학과가 들어간 거야. 학부에 과목은 없는데 근데 교육부에서 허가를 내줬어요. 최초로 학부는 없는데 대학원 과정을 개설이 된 거야. 사상의학과를 개설해서 그래서 두 사람이 들어갔어요. 성수경이라고 내가 사진을 주려고 가지고 있어요. 그때도 이제 일부러 인연이 그냥 말씀 없으니까 가서 우리 기념으로 석사과정이 인연이니깐 찍자고 해서 찍은 건데 흑백사진인데 이게 대학원 석사시절에 노정우 교수하고 찍은 거야. 이 사람이 성수경 목사에요 나보다 10살이 더 나이가 많고 그때 시절에 벌써 딸이 있고 자기 아버지가 여기 그리스도교 목사고 이 사람이 그 밑으로 해서 목사를 했어요. 나는 12기고 이 양반은 11기에요.” [성수경 목사는 동양의약대학 11기로써 1962년에 졸업하셨다.]
성수경/송일병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염태환 선생의 답신_2011년 3월 28일
“문의하신 성수경 동문은 사상의학을 한다는 말씀은 들었으나 평소의 교제는 없었고 학부는 나보다 2~3년 아래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대학원 석사과정이 설치되자 모두들 응모하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걸 해서 무엇 하겠느냐는 부정시 되는 바가 커서 입학을 보류했습니다. 그런데 어언 2년이 지나자 이들이 석사 논문을 제출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결국은 이들이 대학원은 나의 선배가 된 것입니다.
하루는 권 선생 한의원에 갔더니 위의 성수경 씨와 송일병 씨가 와서 옆방에서 대기하면서 면회를 요청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논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권 선생이 그들의 논문에 뭔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는 인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일종의 항위 시위차(?) 온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격한 음성을 지르면서 옆방의 권 선생 진찰실을 향해 소리치는 등... 웃지 못 할 상황이었습니다. 다소 폭력적인 면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권 선생 방으로 들어가 이들을 빨리 보내버리자고 요청하고 현장을 수습했습니다. 나는 이때 만난 성수경 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래 사각모 쓴 성수경 목사의 사진은 1969년 서울시 한의사회 사진첩에 실린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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