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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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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5,540 2022.10.2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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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중 목사

kcbs1949_1209prof.jpg백낙중은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 오랜 기간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부부가 다 교사였다. 백낙중은 당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교사였던 부인과 함께 30년 지기(知己) 최상현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그도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교편을 잡고 있던 기간에 시간을 쪼개서 근 4년간 김요한, 최상현, 성낙소, 김문화, 박판조와 함께 신약성경교회에 대해서 학습하였다. 백낙중은 1938년 1월경에 촬영된 한국인성경훈련원 학생들의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고, 당시 최상현 목사가 개척한 돈암정기독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존 J. 힐(John J. Hill) 선교사는 1972년에 남긴 ‘한국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선교 약사’에서 백낙중 목사가 왕십리기독교회를 시무하였다고 하였는데[John J. Hill, “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 <쎄메론> 제7호 편집부(한성신학교, 1972)], 1940년 10월 26일 포교규칙 제9조에 의거 포교소설치계가 계출된 왕십리기독교회(경기도 경성부 하왕십리정 893번지)<조선총독부관보 제4162호 5면(소화 15년 12월 5일)>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왕십리기독교회는 1944년 6월 30일 일제에 의해 포교소폐지계를 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5306호 1면(소화 19년 10월 10일)>.

백낙중은 해방직후 자신이 세운 공립학교 교실에 공덕그리스도(인)의교회를 개척하였다. 존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가 태평양전쟁으로 백낙중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1948년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백낙중은 공덕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고 있었고, 교인들은 그가 세운 공명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집회소는 그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실이었다. 또 1949년 5월 8일 존 힐이 공덕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참석한 인원이 125명이었는데 소수의 성인남녀와 아이들과 백낙중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이었다<John J. Hill, "'Progress of Work in Korea Encouraging,' States John J. Hill, Missionary," CS, 25 June 1949: 405>.

kcbs1949_12_09.jpg백낙중은 존 힐이 1949년 2월 18일에 입국하여 연지동에서 개교했다가 학생이 많아져 필운동그리스도(인)의교회로 옮긴 ‘한국기독성경신학교’(Korean Christian Bible Seminary)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9년 12월 9일자 사진들에 의하면, 이 신학교의 교수들은 존 힐, 성낙소, 최상현, 백낙중 네 사람이었고, 이때의 학생들 중에는 최춘선(목사, 애국지사), 오현팔(목사, 독립투사), 이흥식(전도자)도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열거된 한국인 교수들이 모두 존 T. 채이스(John T. Chase)가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교육하고 협조하여 신약성경교회를 개척하게 한 사람들이고, 일제의 탄압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목회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상현 목사는 6·25전쟁 때 공산군에 납북되었고, 백낙중 목사는 공산군에 살해되었다. 최상현은 미군정 때 연락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백낙중은 미군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통역관으로 일한 교육가이자 목회자였다. 그런 그들의 경력이 공산군들에게 납북되고 살해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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