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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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조(朴判祚) 목사
박판조는 존 T.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보다 3살 어렸다. 박판조는
장로교신자였고, 채이스에게 추천될 당시 수년째 성서공회에 고용되어 있었다. 박판조는 채이스를 만나 한국인성경훈련원에 출석하던 중에 자청하여
1937년 6월 7일 김문화 목사와 함께 한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박판조는 이때 29살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채이스는 한국인성경훈련원에 성실히
출석하여 공부하는 장로교출신의 두 사람이 있는데, 6월 7일 월요일에 침례를 받고자하여 한강에서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
하였다<"Another Gospel Victory in Korea," Christian Standard(CS), 17 July 1937:
6; “Korean Christian Mission Notes,” CS, 21 August 1937: 769>. 박판조는 침례를 받은
후에도 다니던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 후 박판조는 채이스에게 자기가 장로교회를 떠나겠다는 것과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피력하였다. 그래서 박판조는 1937년 11월 1일부터 정식으로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채이스는
그를 디모데가 될 재목으로 꼽았고, 마음을 준 젊고 능력 있는 일군이었다<“Korean Mustard Seeds,” Korean
Messenger(KM), December 1937: 3-4; "Introducing Pan Jo Pak of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 CS, 11 December 1937: 1154>.
박판조는 곧바로 김요한 목사의 신당정기독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38년 5월 3일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채이스는 이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이유를 막론하고 혼인해야했고, 박판조가 이 여인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가정도 부유했다고 적었다. 또 채이스는 ‘한국인 겨자씨(Korean Mustard Seeds)’에서 박판조의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하였다. 박판조의 동생이 전차운전사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열렬한 감리교신자였던 한 동료 학생이 박판조의 동생에게 ‘기독교회’(그리스도의교회)를 단지 새로 생긴 이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에 박판조는 김요한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감리교 목사였고, 미국에서 7년 넘게 공부한 애국지사 김요한 목사가 나서서 이단이라고 말한 그 젊은이에게 그리스도(인)의교회를 설명하였더니, 그 젊은이가 복음을 받아들여 그 후로 신당정기독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KM, June 1938: 1, 3; "For This Cause," CS, 2 July 1938: 657>.
박판조는 1939년에 김문화 목사가 담임을 맡았던 산돈암정기독교회를 개척하였고 동년에 정릉리기독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였다. 채이스는 1940년 5월 17일 포교규칙 제2조에 의거 박판조(경기도 경성부 송월정 32번지)의 포교계를<조선총독부관보 제4037호 12면(소화 15년 7월 6일)>, 제9조에 의거 기독교회 정릉리교회(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145의 4번지)의 포교소설치계를, 포교규칙 제10조에 의거 기독교회 정릉리교회(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145의 4번지)에 박판조(경기도 경성부 송월정 32번지)의 포교담임자선정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4035호 2-3면(소화 15년 7월 4일)>.
박판조는 채이스를 대신해서 1939년 6월 21일 새벽 6시에 부산에 도착한 존 힐(John J. Hill) 선교사 가족을 서울로 안내하였다. 존 힐 가족은 1939년 6월 1일 가노마루(Kano Maru)호를 타고 LA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21일 새벽 6시에 부산에 도착하였고, 박판조의 안내를 받아 오후 3시에 서울에 도착하였다<KM, 1939년 8월호>.
그리고 모든 교단의 모든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고 아무도 없는데다가 일제의 압제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때에 채이스 선교사가 어렵게 재입국하여 1941년 2월 24일부터 한 달 남짓 머무는 동안에 박판조 목사는 선교사들의 공백 기간에 ‘기독교회선교부’의 회계와 관리를 맡기로 하였다. 이에 박판조는 이듬해인 1942년에 일제가 ‘기독교회선교부’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선포하고 몰수하여 1943년에 임차인 전항섭에게 매도할 때까지 ‘기독교회선교부’ 건물에 입주하여 살면서 재산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The Korean Messenger(Bristol, Tennessee, May 1941), Published in the Interest of New Testament Christianity in Korea, by J. T. Chase, Editor and Publisher>.
이후 박판조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기독교회를 시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도리교회는 1940년 여름에 존 힐과 김요한에 의해서 새롭게 침례 받고 교인이 된 33인들로 세워진 교회였다[John J. Hill, “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 <쎄메론> 제7호 편집부(한성신학교, 1972)]. 초도리교회는 다른 기독교회들과 함께 1944년 6월 30일 포교자 및 포교소폐지계를 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4256호 13면(소화 16년 4월 2일); 제5306호 1면(소화 19년 10월 10일); 제5352호 5면(소화 19년 12월 6일); 제5387호 3면(소화 20년 1월 23일)>.
존 채이스 선교사는 해방 후 박판조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그가 소련군정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 머물며 한의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Workers Contacted,” KM, 1947년 5월호; John T. Chase, "Workers Contacted,” CS, May 194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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