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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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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523 2022.10.25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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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소 목사

sung_nakso_20n.jpg성낙소는 1890년(호적상으로는 1893/명치 26년) 5월 16일 출생하여 1964년 11월 30일 별세하였다.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3의 4번지이다. 1900년 3월부터 1912년 11월까지 한문을 수학하였고, 1915년 11월부터 1916년 8월까지 경성구세군사관학교, 1920년 8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경성 죽첨정(竹添町)성서학원(아현동 경성성서학원),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기독교회선교부’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성낙소는 홍주성 의병군에 가담하려했다가 기회를 놓치자, 구세군에 가입하였다. 성낙소는 십대 후반, 곧 1908년 10월 정령 허가두 사관(Colonel Hoggard, 영국인)에 의해 한국선교가 시작된 초창기부터 구세군에서 활동하였다. 나라를 잃고 독립을 염원하던 민중이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때였다. 민족의 안위를 염려하던 청년 성낙소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세군사관이 되려고 결심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포기하였다가 1915년 11월에 경성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9월에 구세군 사관 소위(참위)로 임관되었다. 구세군사관생 때인 1915년 11월부터 1919년까지 부여, 서천, 익산, 영동 구세군전도관에서 목회하였다.

구세군은 1915년 12월 17일 삼용리구세군전도관(충청남도 부여군 남면)에 사관생도 성낙소의 포교담임자계를, 12월 28일에는 포교계(布敎屆)를 계출<조선총독부관보 제1090호 3, 5면(대정 5년 3월 25일)>한 것을 시작으로 옥북리구세군전도관(충청남도 서천군 서남면)<조선총독부관보 제1194호 6면(대정 5년 7월 26일)>, 어량리구세군전도관(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조선총독부관보 제1772호 4면(대정 7년 7월 3일)>, 1919년 3월 5일 계산리구세군전도관(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각계리구세군전도관(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신항리구세군전도관(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에 성낙소의 포교담임자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2050호 12면(대정 8년 6월 11일)>.

%EC%84%B1%EB%82%99%EC%86%8C_%EC%9D%B4%EB%A0%A5%EC%84%9C.jpg성낙소는 1919년 이 충북 영동에서 유지들과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왜경에게 쫓겼고, 1920년 7월 30일 포교폐지계를 계출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2438호 2면(대정 9년 9월 25일)>. 이에 성낙소는 성결교 목사 곽재근의 추천서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고[성낙소, ‘제1장 성낙소의 출생과 가정 및 교양,’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2년간의 학업을 마친 직후 곧 1922년 3월 구세군에 백의종군하였다. 성낙소는 하사관을 거쳐 정사관에 복직되었으나 1926년 1월 구세군 사관직을 사임하고, 1927년 1월 1일 고향인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2구 290번지 처가댁 사랑방에서 ‘기독의교회’(基督之敎會)를 시작하였다가 예배처소를 처남의 집(화수리1구 325번지)으로 옮겼다. 이후 이 기독의교회 출신 청년이 동경신학교에 유학하던 1930년에 성낙소를 ‘기독교회’(요츠야선교부) 선교사 커닝햄에게 소개하였고, 커닝햄이 도항증과 뱃삯을 보내 성낙소를 일본에 초청함으로써 요츠야선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성낙소는 1930년 5월에 동경에 도착하여 커닝햄을 만났다. 이날은 커닝햄 가족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귀국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성낙소는 요코하마시 미야다죠 조선인교회(橫浜市 宮田町 朝鮮人敎會)를 맡기로 하고 먼저 요코하마로 떠났고, 뒷날 요코하마 출항부두에 나가 커닝햄 가족을 환송하였다. 커닝햄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는 존 T.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의 감독아래 횡빈조선인기독교회를 1931년 1월부터 9월 사임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그리고 성낙소는 1931년 9월(신미년) 하순경에 장로교 목사 박흥순을 대신하여 동경 요츠야선교부 조선지역 포교관리자로 임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성낙소 목사가 서둘러 한국에 아주 귀국한 이유는 한국에 남아 있는 사모의 병환 때문이었다.

성낙소는 1932년 6월 11일 최초로 ‘그리스도(인)의교회’ 곧 ‘기독교회’라는 교단명칭을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계출(신고)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1692호 6면(소화 7년 8월 26일)>. 성낙소는 자서전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제5장 본국에 포교 임명(1931)’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포교관리자설치계를 계출하게 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낙소는 1931년(신미년) 9월 하순경에 귀국하여 본가에서 1개월 간 휴양하고, 그 해 11월 15일에 경성에 도착하여 계동에 거주하며 포교를 하려고 한 즉, 일제정책에는 포교하려면, 조선 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를 내어 등록된 후에야 하는 고로 포교계를 내는데, 교회 명칭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매우 지연된 것은 기독의 교회라 함은 각 교파도 기독의 교회이니, 기독의 어떤 파라고 하라 하므로, 성낙소의 답은 우리 교회는 교파가 아니고 초대의 교회가 기독의 교회이며, 기독의 각 파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니, 제출한대로 등록하여 주기를 원한다고 수삼 개월을 힐난하다가 관리들도 어찌할 수 없으니, 성목사의 임명장을 휴대하고 출두하라고 하므로 지참하였더니, 열람한 결과 동경 요츠야선교회(東京四谷宣敎會) 기독의교회 선교사 커닝함이라고 싸인한 것을 보고는 이와 같이 증정(證正)하여 제출하라고 하기로 ‘동경사곡선교회 기독의교회’라는 명칭으로 제출하였더니 즉시로 등록되어 포교를 활발히 하여 계동, 공덕동, 청엽동, 내수동, 인천 송현동 외 2곳과 평북 구성(平北 龜城)에 기독의교회를 1년 반 동안 7개 교회를 설립하였고, 부여 지방에는 기성(旣成)한 교회였다.

%EC%84%B1%EB%82%99%EC%86%8C_%EC%82%AC%EA%B3%A1%EC%84%A0%EA%B5%90%EB%B6%80.JPG1932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서 생산한 기록물철,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 포교관리자 설치계에 관한 건>(관리번호 CJA0004799, 문서번호 88-69, 286면) 및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 포교관리자설치계에 관한 건’<사원 창립허가 포교관리 기타의 건(소화 7년)>에 의하면, 성낙소는 1932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포교규칙 제7조 제2항에 의거 계출한 포교관리자설치계에서 교단이름을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 포교관리자를 “성낙소”라고 기재하였고, 주소를 “경기도 경성부 숭4동 4번지”로 적었다<조선총독부관보 제1692호 6면(소화 7년 8월 26일)>. 성낙소는 포교방법으로 “포교소에서의 설교, 순회포교(각 지방 순회하여 전도 강연, 사경회 및 부흥회), 가정전도(가정을 방문하여 성서, 구원, 기도회 인도), 통신포교 및 노방전도”라고 기재하였고, 포교관리자의 권한으로 “총회, 연회, 지방회 의장, 목사안수례 집행, 교역자 임명 등을 관리 감독 등”이라고 적었다. 성낙소는 포교관리자설치계를 계출하면서 요츠야선교부가 1932년 2월 8일 발행하고 윌리엄 D. 커닝햄이 서명한, “경성 계동 127번지의 성낙소 목사를 박흥순 목사를 대신해서 한국 사역자로 임명한다”는 신분증명서를 첨부하였다.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성낙소는 포교관리자설치계를 계출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포교관리자설치계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접수된 날짜는 1932년 6월 11일이었고, 심사와 조사를 마치고 결제가 난 날짜는 동년 8월 6일이었으며, 그 내용이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날짜는 8월 26일이었다.

성낙소의 포교관리자설치계를 접수 받자마자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는 25일 일본 동경 문부성 종교과에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동경시 사곡구 중정 6번지)가 정규 수속을 받아 포교하고 있는지 사실여부를 취조하여 결과를 알려달라는 조회서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일본 문부성 종교과에서는 조선총독부 사회과에서 조회를 요청한 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신하였다(관종 34호 소하 7년 7월 11일).

문  부  성
관종34호
1932년(소화7년) 7월 11일
문부성 종교과

조선총독부 귀중

6월 27일부로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에 관한 건에 대하여 조회한 결과, 상기의 교회는 당국에 있어서 기독교회의 일파로써 취급하는 것으로 신청한바와 같이 기독교의 일파로써의 승인은 법규상 그런 수속이 정해져있지 않아도 포교 병교회 등에 대해서는 각각 수속을 끝내고 포교하고 있는 것으로 상기와 같이 회답함.

조선총독부는 조회서에 대한 답변을 받고, 8월 20일에 다음과 같은 ‘관보 게재안’을 작성하였다.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 포교관리자설치계에 관한 건

경기도 경성부 숭4동 4번지 성낙소에 의해 상기 제목의 신고서를 별지대로 계출한 결과, 동파의 본국의 본부는 내지 동경시에 소재하며, 이것의 연장으로 포교하는 취지에 대하여 만일을 위해 문부성에 조회 한 결과, 실제로 기독교회의 일파로 취급하여 포교 병교회 등에 각각 정당히 수속을 마치고 포교하고 있는 취지에 대해 상기와 같이 수리하여 하기의 공고와 같이 결정됨.

성낙소 목사가 계출한 포교관리자설치계는 1932년 8월 26일자 관보에 게재되었다<조선총독부관보 제1692호 6면(소화 7년 8월 26일)>. 그리고 이 교단명칭은 제2대 포교관리자가 된 이인범 목사에 의해서 1936년 7월 8일 ‘기독교회 조선선교회’로 바꿨다<조선총독부관보 제2883호 6면(소화 11년 8월 21일)>.

한편 1935년 3월 20일경 한국에 도착한 J.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 선교사는 입국 한 달 만인 1935년 4월 25일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와는 별개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기독교회’(基督敎會 南大門通)란 교단명칭으로 포교관리자계를 계출하였고<조선총독부관보 제2526호 7면(소화 10년 6월 15일)>, 1936년 11월 7일에 입국한 존 T.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가 이것을 이어받아 1937년 2월 25일 포교관리자변경계를 계출하여 제2대 기독교회포교관리자가 되었다<조선총독부관보 제3087호 9면(소화 12년 5월 4일)>. 또 채이스는 1937년에 ‘기독교회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다.

다른 한편 1936년 9월 4일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의 포교관리자 이인범으로부터 포교자폐지와 자신의 이름으로 계출(신고)된 모든 것들을 세탁당한 후<조선총독부관보 제3042호 6면(소화 12년 3월 9일), 제3143호 9면(소화 12년 7월 8일)>, 성낙소는 목회를 이어가기 위해서 적선정에 있던 경성기독교회를 내수정 106의 1번지로 옮겨와 ‘조선야소교회’에 가입하였다. 다만 성낙소는 조선야소교회에 적만 두었지, 내용적으로는 침례와 매주일 주의 만찬을 시행하였다. 이런 정황 때문에 성낙소는 1937년 4월에 김문화(金文和) 목사로부터 채이스 가족이 선교사로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만나지 않고 있다가 12월 24일에서야 비로소 10대 아들 성수경을 채이스에게 보내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nesoochungcc_1939.jpg그리고 성낙소가 채이스와 재회한 것은 1938년 전반기였다. 성낙소는 1938년 11월 4일 채이스로부터 침례를 받았고, 1939년 초에 제3교회로 편입하였으며, 1940년 3월 25일까지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신약성경교회를 연구하였다<“May I Introduce to You,” Korean Messenger(KM), 1949년 3월>과 <“After Two Years,” Christian Standard(CS), 18 March 1939: 262; 17 June 1939: 594; “Three Evangelists,” CS, 8 July 1939: 666>. 채이스는 1939년 3월 29일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106의 1번지에 포교규칙 제2조에 의거 성낙소의 포교계를, 포교규칙 제9조에 의거 기독교회 경성내수정교회(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106의 1번지)의 포교소설치계를, 포교규칙 제10조에 의거 포교담임자선정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3726호 9-10면(소화 14년 6월 23일)>.

성낙소 목사와 내수정(46년부터 필운동)교회는 모든 면에서 가장 확실히 신약성경교회를 실천하였고, 끝까지 살아남았으며, 존 채이스와 존 힐이 미국의 형제들에게 크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 또한 많은 수의 유능한 목회자들이 이 교회를 통해서 배출된 것은 성낙소와 필운동교회가 내세울만한 업적이다.

성낙소가 1936년 9월 4일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의 포교관리자 이인범으로부터 포교자폐지를 당한 후 적선정에 있던 경성기독교회를 내수정 106의 1번지로 옮겨온 때는 늦어도 1937년경으로 볼 수 있다. 조선야소교회가 1938년 3월 31일 성낙소(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106번지 거주)의 포교계<조선총독부관보 제4024호 3면(소화 15년 6월 21일)>와 경성교회(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106의 1번지)의 포교소설치계 및 경성교회에 성낙소의 포교담임자선정계<조선총독부관보 제4038호 4-5면(소화 15년 7월 8일)>를 계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역자 측에 따르면, 이 건물을 동석기 목사가 3,000원에 매입한 것은 1939년 9월이었다. 동석기는 이 건물을 성낙소에게 빌려주었다가 회수하여 “1945년 9월 내수동교회를 시작하였다”[박규현(1962),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약사’, <그리스도의 교회>2권: 19-20]. 그리고 경성교회가 1939년 초에 ‘기독교회선교부’의 제3교회가 되면서 기독교회 내수정교회로 바꿨다. 채이스가 1941년 2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한 달간 머물면서 촬영한 3월 10일자 사진에는 내수정교회 제2주년으로 되어 있어서[오수강,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6] 성낙소 목사가 조선야소교회를 떠나 내수정기독교회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39년 초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그해 9월 이후에 동석기 목사로부터 내수동 106번지 건물을 임대하여 해방 직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pilwooncc_1949.jpg성낙소의 내수정기독교회는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1941년 후반기에 폐쇄 당하였다. 이후 성낙소는 매주일 예배와 주의 만찬을 비밀리에 진행하던 중에 1943년에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에 대지 42평 초가를 매입하여 7월 7일 옮겨간 후[<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202] 해방 후 그곳에 내수정교회를 복원하였고, 이듬해 1946년에 개명하여 본격적으로 필운동그리스도(인)의교회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도의교회’라는 명칭이 문서에 쓰인 가장 이른 시기도 이때 곧 1946년 8월이었다. 성낙소 목사가 작성한 ‘그리스도의교회 합동 선언문’(서울 사직공원 내 그리스도의교회 성낙소 선언서)에서였다. 다시 성낙소는 1952년 7월 3일에 발행한 책, <신약교회 목회학>(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출판부)에서도 ‘그리스도의교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1) 1946년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 선언문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오늘날 각각 분열된 기독교 각 교파는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도록 주 예수의 성지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요한복음 17장은 주 기도문인 것을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아시는 바인 동시에 11절 하반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사람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사 하나이 되기를 우리가 하나이 됨 같이하게 하옵소서" 하시고, 21절에 "저희로 하여금 다 하나이 되게 하사" 하시고 또 23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화를 내가 저희에게 주어 하나이 되게 하기를 아버지와 나와 하나이 된 것 같이 하오니." 이와 같이 3차나 모든 신자 성도들이 하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적으로 기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한가지 말로하고 상호 분쟁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완전히 합하라." 하셨고, 또 12-13절에 "이는 무타(無他)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요,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 자요,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여럿이 되며, 바울이 어찌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하시었으니, 이는 신약시대부터 교회분열이 생길 위험성을 경계함이다. 지금은 모든 신자들이 각각 말하되, 나는 희랍교에 속한 자요, 나는 카톨릭에 속한 자요, 나는 성공회에 속한 자요, 나는 장로교에 속한 자요, 나는 감리교에 속한 자요, 나는 성결교회에 속한 자요, 나는 구세군에 속한 자요, 기타 각 교파에 속한 자라하고 그 단체의 헌법과 장정 규칙을 존중시하고, 성서는 그 다음으로 생각하여 분열됨으로써 분쟁하는 것은 사실이 증명되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분 설명이 요하지 않는다. 만일 교파 자체로나 신자 자신으로서 합동 통일을 반대하거나 부정한다면, 주님의 기도를 무시하는 자요, 성 바울 사도의 합동 교훈을 부인하는 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생각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부인할 신자나 교파는 없을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기약이 왔은즉, 다 통일하여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기약이 찰 때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하여야 한다" 고하였으니, 이제 기약이 찬 때가 왔다. 만물도 통일할 것인데, 그리스도 신자가 통일치 못하면 만물들에게 부끄럽지 않는가? 다시 조선교단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의 각 교파나 교회가 악마 왜정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마귀의 명령으로 합동하여 신사참배하는데 통일 공작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즉 악마에게는 굴복하여 신사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주님의 성지인 성경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을 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가? 덮어놓고 합동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면, 신약시대의 교회를 찾아야 한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신약성경 중에서 찾아야 한다.

1. 교회 창립자와 머리를 찾자 -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마 16:18; 엡 5:23). 각 교파의 창립자와 머리는 누구인가? 카톨릭은 저스테니안, 성공회는 헨리 8세, 루터교는 마틴 루터, 침례교는 코날드 그레벨, 장로교는 존 낙스, 칼빈교는 칼빈, 감리교는 요한 웨슬레, 구세군은 윌리암 뿌드, 성결교는 카우만이다.

2. 교회 명칭과 터를 찾자 -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른 이름이며, 그리스도의 터는 그리스도이다(마 16:18; 롬 16:16; 고전 3:11). 그러나 각 교파의 명칭은 성경에 전혀 없다.

3. 교인의 명칭을 찾자 - 오직 그리스도인이라(행 11:26; 갈 2:24; 벧전 4:16). 그러나 각 교파교인의 명칭은 성경에 없다(장로교인, 감리교인 등 . . . ).

4. 교인이 되는 방법을 찾자 - ㄱ)믿고 침례받음(마 28:19; 막 16:16). ㄴ)회개하고 침례받음(행 2:38). ㄷ)신앙을 고백한다(행 8:37). 그런즉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받으면 사죄 구원하는 동시에 성신을 선물로 받는다. 침례는 죄의 몸이 죽고 부활과 신생을 얻는다(롬 6:4; 골 2:2). 물과 성신으로 중생한다(요 3:5). 약식 세례는 성경에 없다. 이는 기원 753년에 로마법왕 스티븐 2세가 애돌프스의 집에 시작된 것이다.

5. 침례는 누가 행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찾자 - 목사, 집사, 성도들이다. 침례받는 자는 누구나 행할 수 있다(행 2:38-41; 8:38; 9:17-18). 이상은 사도 집사 빌립이 성도 아나니아가 시행하였음. 목사만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교파들의 주장이다.

6. 그리스도인이 되면, 첫째로 하나님께 예배한다. 예배일을 찾자. 칠일 중 첫날은 주일이요, 일요일이 아니다(행 2:41-42; 20:7). 이 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일곱째 안식일 다음날인 오순절날 성령강림하신 날이요,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 침례받아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날이 주일이요, 유대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다.

7. 신약시대 교회에서 주일을 예배 일로 지켰는가? 주님의 부활과 십자가를 기념하는 주의 만찬을 위해 모였다(행 2:41-42; 20:7). 주일에 주의 만찬을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안식일을 지켜 유대교인 율법으로 돌아감이 어떨까?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가 아니다.

8.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성경만 믿는다. 성경 이외에 헌법이나 규칙은 죄가 된다(계 22:18). 이상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거나 깊이 연구하시려면 성경에 나타난 신약교회로 오시면 됩니다. 여러 교파와 교인들이여 우리 모두 교회의 합동 통일 운동을 위하여 힘을 합칩시다. 다른 교파에서 신학을 마친 교역자들은 우리 신학 별과를 단기로 수양하니 같이 합시다. 환영합니다.

서기 1946년 8월 일

서울 사직공원 내 그리스도의 교회 성낙소 선언서

필운동교회는 해방직후까지 ‘기독교회선교부’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의교회들에서 가장 확실하게 살아남은 자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그 덕분에 존 힐 선교사는 1949년 2월 18일에 입국하여 거주하던 연지동의 임대저택에서 개교한 신학교를 이곳 필운동교회로 옮겨 1950년 6월 25일전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8년 10월 17일에 단기 입국했을 때 성낙소 목사는 만 58세였다. 필운동교회는 1948년 11월 21일 주일 오후에 채이스의 한국방문환영회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또 이 무렵 필운동교회는 아현동교회의 목사 윤낙영의 생활비를 후원하고 있었다. 힐은 1949년 전반기경에 필운동그리스도(인)의교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 67명이 참석하였다고 했다<John J. Hill, "'Progress of Work in Korea Encouraging,' States John J. Hill, Missionary," CS, 25 June 1949: 405>.

(2) <신약교회 목회학>에 나타난 성낙소 목사의 신약교회

sung_nakso_bk2.jpg성낙소 목사의 저술에는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자필 자서전, 1958년경)>가 있고, 1953년 6월 10일 인쇄되어 동년 7월 3일 발행된 <신약교회 목회학>이 있다. <신약교회 목회학>은 서언부터 목차까지가 8쪽, 내용이 282쪽이며, 책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2.5, 17센티미터이다. 본서는  활자(活字) 인쇄본이 아니라, 필사(筆寫) 인쇄본이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 책의 제목이 ‘신약교회 목회학’(The New Testament Church Pastoral Theology)이라고 한 점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그렇고, 내용에서도 성낙소는 그리스도(인)의교회의 성격이 ‘신약성경교회’란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과 본서를 통해서 볼 때, 성낙소는 당대에 그리스도(인)의교회운동의 성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학지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여러 가지 정황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신약교회 목회학>에 나타난 성낙소 목사의 신약교회에 관한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란 인식이 분명하였다.

본서 ‘제18장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파교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교회’이어야 한다.
둘째, 교파교회의 명칭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넷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이다.
여섯째, 교파적 신앙과 주의를 경계하여야 한다.
일곱째, 모든 교파는 신약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여덟째, 교파분열은 비성경적이다.
아홉째, “신앙하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수(受)하고, 신자가되면 주일성찬으로 예배하는 신약 중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일(唯一) 교회이다.

2. 신약성경에 기초한 교회, 즉 신약성경교회에 관한 인식이 분명하였다.

sung_nakso_1.jpg책의 제목을 “신약교회 목회학”이라고 정한 것이나 서언(緖言)에서 “신약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란 표현을 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첫째, 교회는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사도들이 신봉(信奉)하던 그 신경(信經)과 그 교리(敎理)와 그 신학(神學)을 성경그대로 고수(固守)”(제3장, 2절)하는 신약성경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교회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실천, 즉 사도전통을 모본(模本)하여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인식이 분명하였다. 특히 성경 중 신약시대의 신앙교리를 강조해야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주님의 성훈(聖訓)과 사도들의 교훈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제3장, 3절, 3조).

셋째, 교회의 조직과 치리는 인위적인 교리를 배척하고, 신약교회 교리는 성경중교리(聖經中敎理)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제3장, 3절, 3조).

넷째, 그리스도는 교회는 ‘성경이 명한대로’ 혹은 ‘하나님이 명한 대로’ 따라야 한다는 신념(信念)이 철두철미(徹頭徹尾) 하였다.

聖書를 減하지도 말고, 異點을 加하지도 말고, 新約書中에 있는 그리스도의 敎會로 還元하야 一敎會가 되도록 祈禱하며, 役事할지니다(제18장, 3절).
우리가 聖經中에 있는 聖禮를 行할 時에는 聖經中에 記한 法을 依할지니, 何敎派立法이나 何人의 意見이나 方便을 推尋하지 말고 聖書에 根據하야 如何히 할지니라(제12장, 2절, 3조, 2).

3. 그리스도인 침례(Christian Baptism)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첫째, ‘제12장 목회자와 성례급예식(聖禮及禮式), 제2절 침례(浸禮)’에서 약식세례는 서기 753년에 시작된 것으로써 “일종(一種) 허명(虛名)의 의식화하여진 것”이므로 “차(此)는 성경위반이다.”고 하였다.

둘째, 침례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깨달아 주님을 믿고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에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誰던지 福音을 聽하고, 覺而信主하고, 過去 不信 不義 不法 不行과 其他諸般 罪惡을 眞心으로 悔改하고, 信仰告白하고, 浸禮를 受할 수 있고(제12장, 2절, 1조).

셋째, 침례는 죄로 물든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고, 물속에 장사하였다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의 젖을 먹고 성장하여 성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罪의 몸는 十字架에 釘死하고, 水中에 葬事하였다가 主任의 復活에 合하야 水과 聖神을 重生(新生)하야 上帝의 子女로 道의 乳으로 長成聖潔하나니(제12장, 2절, 1조).

넷째, 침례는 주님께서 친히 받으시고, 합당하게 여기셨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의 침례를 받으신 후에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대(大) 사명(使命)이며, 친히 아끼시고, 세우시고, 명령하셨으므로, 인간이 감(敢)히 변개(變改)치 못할 성례(聖禮)임을 피력 하였다.

浸禮를 主께서 當身이 親愛하시고 立하시고 命令하였으니 人間으로서는 敢히 變치 못할 것이오, 變치 못할지니라(제12장, 2절, 2조).

sung_nakso_bk1.jpg다섯째, “침례는 기독교의 구원방법에 있어서 중대한 성례(聖禮) 중(中) 일(一)이” 된다고 하였다. 한 생명(生命)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에는 수정, 배아, 태아, 출산, 성장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 수정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배아단계나 태아단계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정부터 출산까지 모든 과정이 필수적이다. 또 출산만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죄(赦罪)의 구원도 믿음만으로 혹은 회개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 성낙소 목사는 이런 뜻으로 “침례는 기독교의 구원방법에 있어서 중대한 성례(聖禮) 중(中) 일(一)이” 된다고 하였다.

救援이 곧 赦罪이다. 信仰하고 浸禮를 受하는 人은 救援을 得할 것이오 하였으니, 信仰만하면 다 되는 것이 안이오, 浸禮를 受하여야 한다. 又는 “悔改하야 예수 그리스도의 名으로 浸禮를 受하고 罪赦함을 得하라. 然하면, 恩惠의 聖神을 受하리니” 하였으니, 悔改만 하면 다 된 것이 안이오, 浸禮를 受하여야 한다. 然則 信仰하고, 悔改하고, 信仰告白하고, 浸禮를 受하여야, 救援을 곧 赦罪를 得할 뿐만 안이라, 恩惠로 聖神을 受한다고 主任과 使徒 배드로가 有力하게 말삼하시였다(제12장, 2절, 2조).

여섯째, 그리스도인 침례를 “중생(重生)의 침례,” “죄 사함과 성신을 수(受)하는(행 2:38)” 침례로 인식하였다. 또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고(막 16:16), 죄사(罪赦)함을 받고(행 2:38), 죄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롬 6:3-7), 부활하고(고전 15:29), 중생하고(롬 6:5, 골 2:12, ?3:5, 행 2:38), 그리스도로 옷 입고(갈 3:27),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심왕(尋往)하고(벧전 3:21), 성령을 선물로 받는(행 2:38) 유익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의 敎는 主 여호와 하나님 創造主의 말삼이신 그리스도께서 十字架에 犧牲하시고 復活하사 우리 人類를 贖罪救靈의 光明이 照하야 誰던지 그리스도를 믿고 悔改浸禮를 받으면 聖神이 卽時 內住한 重生者가 主의 名으로 祈禱하면 信仰이 점점 長成하야 聖潔의 生活을 할 것이오, 聖神의 結果가 있어야 한다. 異蹟은 赦罪重生의 大하고 聖經에만 있는 異蹟, 요나의 異蹟과 같이 水中에서 重生의 異蹟이다.(제6장, 2절, 8조, 1)

일곱째, 침례의 집행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신도일지라도 신앙생활이 무흠하면 집행할 수 있음을 성경적인 전거(典據)를 들어 설명하였다.

浸禮 執行者는 浸禮를 受한 者로서 信仰이 聖書中에서 無欠하고, 聖神이 充滿者면 執行할 수 있음. 牧師라도 信仰生活에 聖書的 欠陷이 有한 者는 執禮資格을 喪失하였음으로 執行할 수 없을 것이다. 牧師나 長老나 執事나 平信徒나 聖書的 信仰生活이 無欠한 者가 執行함이 可하고, 牧師만 專行的으로 執行權을 聖書中에 주지 안이하였다(제12장, 2절, 3조, 1).

여덟째, 어떠한 경우에도 약식으로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유아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으로 침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幼兒는 天國에 入할 資格이 有함은 예수님이 證明하셨다(太 18:3). 又난 病中에 主의 福音을 覺悟하고 確實한 信仰과 悔改와 告白이 分明하면, 浸禮를 施할 수 있으나, 危篤中 不完全 意識으로 信主한다는 것으로 로마 天主敎式으로 하면 안 된다. 浸禮가 안이고 略式洗禮는 容納할 聖書中에 條件이 없는 까닭이다. 囚獄罪人의게 傳道하야 確實한 信仰 悔改가 分明하면, 何人 男女를 莫論하고 獄官의 承認을 請하야 執行할 수 있나니라(제12장, 2절, 3조, 2).

4. 주의 만찬 중심의 주일예배를 강조하였다.

첫째, 일요일을 성찬예배일로 인식하였다(제12장, 3절, 1조). 구약교회의 5대 제법(祭法) 곧 번제(燔祭), 평제(平祭), 소제(素祭), 죄제(罪祭), 건제(愆祭)가 신약교회에서는 찬송, 기도, 헌금, 성찬, 성경설교로 바꿨으며, 안식일 대신 7일중 수일(首日)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바꿨으며, “주님이 일차(一次) 자기를 희생의 제사를 헌(獻)하사 죄를 속(贖)하시고(히 9:26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주님의 성찬예배로 5대 제전(祭典)을 대신하였다.”고 하였다. 또 “구약예전은 신약의 영자(影子,그림자)니, 할례는 신(身)의 사(事)요, 침례는 신심(身心)의 사(事)이며, 제례는 의식(儀式)이오, 성찬예배는 영(靈)의 사(事)이다.”고 하였다(제12장, 1절).

둘째, 초대교회에서의 주일예배는 떡을 떼기 위한 모임이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3)主의 晩餐 - 主日 禮拜는 初代敎會 創立日로부터 始作한바 主님의 死中復活을 記念하는 無酵餠과 葡萄汁盞으로 主님의 살과 피를 代身하야 祝辭하고 浸禮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參與하야 主님의 十字架 犧牲祭를 記念하는 聖禮이니 初代敎會에서 安息日을 바리고 主日禮拜가 主의 晩餐으로 創立하였다. “七日中 首日에 我等이 餠을 擘하려하야 集하였더니”(行 20:7). 日曜集會는 餠을 擘하기 위하야 모였음이라. “恒常 使徒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交際하며 餠을 떼여 먹으며 祈禱하기를 務하더라”(行 2:42). 此는 곧 五旬節에 聖神降臨日, 그리스도인 浸禮 始作日, 그리스도의 敎會創立日, 主日禮拜에 聖餐式한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集會中에 主日禮拜가 此聖禮로 由하야 聖禮中 首位되는 聖會로 嚴守하는 것이다(제6장, 2절, 6조, 1).

셋째, 주의 만찬은 우리 주님이 마지막 유언으로 명령하신 것임을 인식하였다.

使徒들이 主의 遺言의 命令을 受하였음으로 敎會를 始作하면서 主日인 日曜日集會는 主의 晩餐禮拜로 實行順從한 것을 聖書中에서 明白히 發見하였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의 敎會에서는 그대로 聖書的으로 主의 命令을 遵行하야 安息日이 안이고 곧 禧日에 神靈과 眞理인 十字架의 記念으로 聖餐의 禮拜를 奉行할지니라(제12장, 3절, 1조, 5).

넷째, 주의 만찬의 집례는 목사, 장로, 집사가 집행할 것이나, 만일 교직자가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집행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新約時代 敎會創立日인 日曜日에 主님의 遺言이며 命令을 受한 使徒들이 遵守하야 執行하였고(行 2:42), 바울 使徒도 主께 受한 命令을(고전 11:23) 各敎會에서 執行하도록 하였으니, 牧師, 長老, 執事가 執行할 것이오, 萬一 敎職者가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主日에 執行하면 된다. 主日은 浸禮 받은 信者가 禮拜한다. 緣故로 初代敎會에서는 安息日 翌日은 七日中 首日에 餠을 擘하는 禮拜集會(行 20:7)하였음으로, 安息日이 廢하고 主日禮拜가 始作된 것이니, 家庭에서도 信者들이 主日禮拜에 餠을 誠意로 擘하야 食하고 上帝를 讚頌하였다. 今日에도 우리 그리스도의 敎會에서 主日은 聖餐禮拜인 故로 牧師가 없는 敎會에서는 平信徒들만 모여서 信徒中의 一人이 集禮한다. 大東亞戰爭時와 6.25事變 當時에 各家庭에서 或防空壕에서 山野江邊에서 主日을 當하면 家族的으로 個人的으로 聖餐禮拜를 主日마다 奉行하였다. 牧師가 없으면 家族 個人이 禮拜하지 못할 法이 聖書中에 無한 同時에 信者가 集禮할 것이니라(제12장, 3절, 2조, 1).

다섯째,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에 대해서 논하였다.

主日은 男女聖徒가 여호와 上帝께 神靈과 眞理로서 聖晩餐禮拜를 奉行하는 것이 聖旨의 禮典이다. 그러나 聖書中에 注意의 警戒가 嚴然하다(고전 11:30-32). 또 그렇타고 해서 主日 聖餐禮拜를 廢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然則 聖書대로 資格者는 堂堂히 參與할 것이니라. 1)浸禮를 受한 者로서 信仰生涯中에 있는 者. 2)良心으로 回顧 곧 自醒하고 悔改한 後에야 食하고 飮할 것이오. 3)主의 몸과 피를 分辨하야 十字架의 釘死와 復活을 記念할 者이니라. 以上 三種의 以外에 處地에서는 絶對로 參與치 못할지니라(제12장, 3절, 2조, 2).

제대로 된 신학서적 한 권 없던 70여 년 전, 그것도 6.25사변 중, 성낙소 목사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신념이 이러했을진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가 넘쳐나는 오늘에는 그 수준이 어떠해야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성낙소 정도의 인식을 가진 목회자를 쉽게 찾을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한 신학도의 탄식을 들어보자.

....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들을 만나면, 그렇게 깊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제겐 큰 교만이자 정죄 받아 마땅할 부분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들과의 교제가 망설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냥 어린 후배의 푸념으로 이해해 주시길^^) ....

1924년 이후 척박한 한국 땅에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을 개척하고 일궜던 선배 목사들의 열정과 신념은 대단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모두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교회 등 타 교단에서 환원한 분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이 없어서였지만, 왜 오늘날에서조차 우리 가운데서 환원 2-3세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앓고 있는 가장 큰 고질병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교회를 너무 모른다는 점이고, 그리스도(인)의교회에 대해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 비춰볼 때, 김요한, 최상현, 성낙소, 김은석, 동석기, 강명석, 이신과 같은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인물들의 역량(力量)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고, 오늘의 우리가 그들에 대해 자부심과 존경심을 갖기에 충분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신약성경교회의 선구자였던 성낙소 목사의 깊은 영성과 복음에의 뜨거운 열정이 그대로 전수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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