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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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화 목사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33년 10월과 11월호에 실린 채이스가 쓴 글에 김문화
목사의 영문이름 이니셜(M. W. Kim)로 볼 수 있는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그는 일본 요츠야선교부 소속의 교회들로부터
후원을 받고 한국의 교회개척지에서 사역하고 있었으며, 그해 8월에 7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만일 이 사람이 김문화였다면, 그가 어떻게 존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의 초기 사역자가 되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김문화는 장로교 출신의 목사로서 성낙소와 함께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의 사역자였으나 이인범 목사의 보복으로 1936년 9월 4일 기독교회 포교자 자격을 잃었다<조선총독부관보 제3007호 5면(소화 12년 1월 26일)>.
김문화는 1937년 전반기에 채이스와 재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문화는 1937년 6월 7일 박판조와 함께 한강에서 채이스로부터 침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채이스는 한국인성경훈련원에 성실히 출석하여 공부하는 장로교출신의 두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연장자가 어느 날 채이스에게 말하기를, “저는 20여년 이상 많은 선생들로부터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침례가 구원에 본질이라는 것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라고 하였고, 장로교출신인 이 두 사람이 6월 7일 월요일에 침례를 받고자하여 한강에서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 하였다<"Another Gospel Victory in Korea," CS, 17 July 1937>. 김문화와 박판조는 장로교출신이었고 채이스의 학생들이었다. 그는 1937년 4월경에 성낙소 목사에게 채이스의 소식을 전하였고[‘제7장 기독의 교회 선교사와 신학교 시작,’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1938년 1월경에 촬영한 한국인성경훈련원 제1회 2학기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채이스는 그를 김요한, 최상현, 박판조와는 달리 기독교회 목회자로는 소개하지 않았다. 그 때 김문화에게는 섬기고 있는 기독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한국인 전령(Korean Messenger), 1938년 2월호>. 채이스는 1940년 1월 23일 포교규칙 제2조에 의거 김문화의 포교계를<조선총독부관보 제3943호 3면(소화 15년 3월 14일)>, 포교규칙 제9조에 의거 자신의 제4호 교회인 기독교회 경성 돈암 제2교회(경기도 경성부 돈암정 산 55번지)의 포교소설치계를<조선총독부관보 제3946호 2면(소화 15년 3월 18일)>, 포교규칙 10조에 의거 기독교회 경성 돈암 제2교회에 김문화(경기도 경성부 성북정 109의 2번지)의 포교담임자선정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3956호 6면(소화 15년 3월 30일)>. 1940년 가을에는 총독부가 소집한 각 교단 대표들의 모임에 최상현, 성낙소와 함께 참여하여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940년대는 조선인들에게 매우 엄중하고 험난한 시기였다. 1941년 4월 1일 새로운 종교법의 시행으로 선교사들의 입국활동이나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7일에 태평양전쟁(1941-45년까지 연합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시기에 신사참배는 말할 것 없고, 행사 때마다 기미가요 합창, 동방요배, 전사 장병 묵도, 황국신민서사 낭독,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강요당하였다. 심지어 예배당 안에 일장기를 매달게 하였고, 1942년 이후에는 예배 시작 전에 천황 사진을 앞에 놓고 동방요배까지 강요하였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회’ 곧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신사참배, 동방요배 및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 가입에 반대함으로써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은 6월 30일에 포교자 및 포교소 폐지계를 계출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4256호 13면(소화 16년 4월 2일); 제5387호 3면(소화 20년 1월 23일); 제5352호 5면(소화 19년 12월 6일); 제5306호 1면(소화 19년 10월 10일); John T. Chase, "Workers Contacted,” CS, May 1947: 9>.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 ‘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에 따르면, 채이스는 1947년 1-2월 중 서울에 머무는 동안 예전의 동역자들과 접촉하려고 애썼는데, 김문화는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까지 한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채이스는 김문화 목사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다. 장례는 그의 아들의 집에서 이뤄졌고, 성낙소 목사가 주관하고 최상현 목사와 채이스 선교사가 보조하였다. 김문화 목사는 사망하기 한 주전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설교하였고,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으로 청중을 집중하게 만드는 훌륭한 설교가였다.
필자는 김문화 목사가 김동열 목사의 부친인가를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김문화 목사가 김동열 목사의 부친이라고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289쪽)가 명기(明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부(可否)를 판단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김동열의 부친은 김용수(金龍洙, 자: 용하/容夏)로서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국가공훈록과 조선총독부재판소 광주지방법원형사부 판결문에 따르면, 김용수는 1882년 7월 7일생이며, 1957년 4월 28일에 별세하였다. 본적과 거주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水北面) 주평리(舟枰里) 657번지였다. 학력은 8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득(修得)한 것이 모두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여 1938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동향인 박동환(평동) 및 조용택과 함께 낙향하였다는 글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박동향과 조용택은 같은 날 광주지방법원에서 박용수가 3년형을 받을 때 각각 2년형을 받은 같은 지역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김용수의 학력을 “무(無)”라고 적었다. 한때 불교(佛敎)신앙을 갖기도 하였으나 1924(대정 13)년경 장로회파 야소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담양군 담양면의 집에서 농사일을 하며 전도포교에 종사하였다. 판결문에 김용수의 직업이 “농업겸전도사”라고 적힌 이유이다.
김용수는 전라남도 순창군(淳昌郡), 고창군(高敞郡), 추자도(楸子島), 제주도(濟州島) 등지에서 예수교의 순회전도사(巡廻傳道師)로 활동하다가 1935(소화 10)년경 담양으로 돌아와 포교활동 중에 일제가 강요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했다가 1938년 5월 20일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담양경찰서에 1개월간 구류 당하였다. 1938년 6월에 일본종교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신앙은 허구적인 것이고 위장된 것임을 역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39년 8월 10일에는 예수교 부흥회에서 ‘사후중생론’(死後重生論), 1939년 12월 4일에는 ‘천국총론’(天國總論), 1940년 5월 19일에는 ‘말세(末世)와 예수의 재림론(再臨論)’ 등을 주제로 일제의 멸망을 설교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문초(問招)를 받고 61세 때인 1942(소화 17)년 8월 10일 광주지방법원형사부에서 소위 “신궁불경죄”(神宮不敬罪)로 징역 6월형,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 총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판결문에 실린 이 같은 내용을 근거로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보기;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김용수 등 판결문,’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diquest/Search.do#;)]
국가공적개요에 김용수는 박동환(평동) 및 조용택과 함께 조선선교회(朝鮮宣敎會) 전도사로 되어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계출(신고)된 교단들에는 도쿄 요츠야선교부(윌리엄 커닝햄 선교사)의 후원을 받았던 ‘기독교회 조선선교회’가 유일하다.
김문화 목사는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의 전신인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에서 서울 아현동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포교관리자 이인범 목사로부터 1936년 9월 4일 포교폐지계를 계출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3007호 5면(소화 12년 1월
26일)>. 그러나 김동열 목사의 부친인 김용수 목사는, 광주지방법원형사부의 징역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장로교회 목회자였다. 김용수는
1930-40년대 초 기간에 장로교 전도사로서 전라도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김문화는 ‘기독교회’ 목사로서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와
‘기독교회 선교부’에 소속되어 같은 기간에 경기도 경성부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점이 크게 다른 점이다. 김동열 목사는 부친 김용수가 장로회
소속 목회자였으나 세례를 매우 중요시 하여 김동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였다<요한복음 영해(하2): 120>.
이밖에도 다른 점은 별세 일자이다. 국가공훈록에는 김용수의 별세 일자가 1957(혹은 1956)년 4월 28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문화의 별세 일자는 1949년 2월 초이다. 남아 있는 사진들을 면밀히 비교해보면, 얼굴형은 거의 비슷한데 머리까락의 차이가 난다. 김용수는 머리까락이 많았던 반면, 김문화는 머리까락이 많지 않았다.
<한국인 전령, KM> 1949년 3월호의 내용은 대부분 채이스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에 떠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낸 보고들로 채워졌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존 힐 선교사 가족이 1949년 2월 15일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것이고, 김문화 목사가 1949년 2월 초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이다. 채이스는 존 힐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KM, 1949년 3월호>.
채이스 선교사는 김문화 목사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로 얼마 전 겪은 이번 주 가장 큰 손실은 김문화 목사의 서거였습니다. 돌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 그는 신약성경교회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성경의 명백하고 단순한 가르침에 사람들이 집중하도록 만드는 일에 있어서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장례는 그분의 아들의 집에서 성낙소 목사의 집례와 최상현 목사와 채이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치러졌습니다<“A Great Loss,” KM, 1949년 3월호>.
김문화 목사의 별세 및 그가 김동열 목사의 부친 김용수(용하)라는 증언을 다음의 고리들로 연결해 볼 수는 있겠다. 첫째는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도서출판 한림, 2006: 289)>가 김문화 목사를 김동열 목사의 부친으로 언급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김문화 목사의 별세 전인 1947-48년에 최상현, 성낙소, 할 마틴 군목이 부강교회에서 신약성경교회를 한 두 차례씩 강의한바가 있었다는 점이며, 셋째는 지철희 목사가 “김동열 목사님의 부친은 순교를 하셨는데... 일제말엽 때 복음을 전하시다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투옥을 당하셨고, 많은 고문과 고통을 받던 중에 해방을 맞이하여 출감하셨는데, 오갈 때가 없어서 부강 그리스도의교회 사택에서 간호를 받으시면서 기거를 하실 때에 내가 딱 한번 뵌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가 듣기로는 우리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아주 귀하고 유명한 목사님이시었다... 부강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순교를 하셨다는 소식을 소문으로 알았다.”는 글을 남겼다는 점이다. 다만 지철휘 목사는 본명인 김용수 또는 이명(異名)인 김용하를 김용환으로 잘못 기억하였다.
김문화의 별세 소식은 채이스가 김문화의 장례를 치른 직후에 쓴 것이어서, 만일 김문화가 김용수와 동일인이라면, 채이스의 별세연도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김동열은 1953-57년 사이에 신탄진에서 목회활동을 하였으나 이미 그 이전 1940년대 말부터 부강교회에서 개최된 신화신학연구회의 백일집회들에 참여하였다.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가 1956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교회순방에 나섰을 때, 4월 2월 월요일에 신탄진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담임목사가 김동열이었다. 3일 화요일에는 부강교회(김은석 목사)를 방문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문화 목사와 김용수 목사가 별세한 장소는 신탄진교회이거나 부강교회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부강교회의 김은석 목사는 동역자들의 별세자 명단을 성경에 기입해 두었는데, 정찬성 목사(1957년 4월 25일), 김재순 목사(1958년 2월 26일), 강순명 목사(1959년 3월 12일)가 포함되었다. 심지어 이신 목사 부친(1954년 6월 16일)과 이종만 목사 모친(1957년 8월 14일)의 별세 일자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김은석은 1957년 4월 23일 목포로 내려가 28일에는 주일이었는데, 강진군 강진읍 용동면과 황동면에 있었으며, 5월 중순까지 전남지역에 머물며 집회를 인도하였다<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그리스도의교회연구소, 2010: 50, 57, 196), http://kccs.info/keskoreanpaul.pdf>. 국가공훈록대로, 김용수 목사가 정찬성 목사의 별세 3일 후인 1957년 4월 28일에 별세하였다면, 김은석 목사가 몰랐거나 성경메모에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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