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기독교역사사전 출판소식
본문
*이 사전에 북한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사역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에 대한 내용이 개별 항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도 '그리스도의교회 북한선교'란 항목으로 실려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에는 크게 두 지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敎會, 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 협의회 및 총회)과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의敎會, Churches of Christ, 교역자협의회)이 있다. 먼저, 교파명이 ‘기독교회’(基督敎會)였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도쿄 요츠야선교부(Yotsuya Mission)의 윌리엄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 부부에 의해서 1924년 3월 25일 서울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목회자들의 상당수가 성결교 출신이었다. 포교관리자 성낙소 목사가 1932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로 교파명을 계출하였다가 1936년 7월 8일 이인범 목사가 ‘기독교회 조선선교회’로 교파명변경계를 계출하였다. 북한지역 선교는 요츠야선교부 산하 심천조선인기독교회(후카가와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였던 이인범이 1932년 8월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두 달간 체류하는 동안 평북 구성군 방현면 하단동 방현교회와 인근 교회들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여 많은 이들에게 침례를 베풂으로써 시작되었다. 장로교회였던 방현교회가 즉시로 요츠야선교부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1933년 초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이원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그들과 선교부의 헌신으로 평안북도 구성군에 방현교회, 오봉교회, 평지동교회, 정주군에 용포동교회, 문인동교회, 약수포교회, 근담동교회, 신의주교회 및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대류리교회가 1930년대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되었다. 1941년 4월 1일부터는 선교사들의 입국활동이나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외국후원을 반드시 거부해야했다. 이에 요츠야선교부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에게 매월 주던 보조금을 1941년 초에 한해 치를 몰아서 주었고, 그해 말까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돈은 1936년 6월 24일 별세한 커닝햄기념기금(The Cunningham Memorial Fund)에서 조달되었다(Tokyo Christian, Feb.1941).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남아 있던 교회들은 총 일곱 교회로서 구성군에 방현교회, 오봉교회, 평지동교회, 정주군에 용포동교회, 문인동교회, 약수포교회, 그리고 신의주교회였다. 나머지 근담동교회와 대류리교회는 1937년 이후 선교부와 멀어졌다. 한편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포교관리자 이인범 목사는, 전임 포교관리자 성낙소 목사와의 갈등으로, 1937년이 되어서야 북한지역의 교회들과 교역자들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계출할 수 있었다. 이 때 계출된 교회들은 오봉교회, 용포동교회, 문인동교회이고, 나머지 교회들의 계출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구성군과 정주군의 교회들에서 2-3명의 사역자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계출된 교역자들에는 방현교회에 김성산 목사와 주정국 목사, 오봉교회에 장신주 목사 그리고 용포동교회와 문인동교회에 최성진 장로이다. 다른 한편 도쿄 요츠야선교부의 초청으로 한국 주재 선교사가 된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는 1935년 4월 25일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와는 별개로 ‘기독교회’(基督敎會)로 교파명을 계출하였는데, 이 ‘기독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들’(협의회 및 총회)이며, 해방직후 ‘기독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파명을 변경하였다. 또 다른 한편, 교파명이 ‘기독의교회’(基督の敎會)였던 ‘그리스도의 교회들’(교역자협의회)의 북한지역 선교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감리교 목사였던 동석기 전도자가 재차 미국에 입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敎會)의 신학교(Cincinnati Bible Seminary)에서 M.A.학위를 받은 후 선교사 파송을 받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의敎會)의 대학교(David Lipscomb University) 신학부에서 추가 연구를 한 후에 선교사 파송을 받아 1930년 11월 8일 함경남도 북청군에 귀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동석기는 1930년 11월 29일 함전교회를 시작으로 1931년 5월 22일 서흥교회, 1932년 5월 22일 수동교회를 개척하였다. 동석기는 1934년부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敎會)과의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의 교회들’(基督의敎會)만을 대표하는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하였다. 1936년 10월 11일 빙애(임자동)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어서 만경교회, 죽평교회, 수서교회를 개척 또는 기존의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흡수하였다. 함전교회, 서흥교회, 수동교회는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교역자협의회측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었다. 동석기는 1937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기독의교회’(基督の敎會)로 포교계를 계출하였다. 동석기는 북청의 일곱 개 교회들 가운데 다섯 개 교회들 곧 함전교회, 서흥교회, 수동교회, 빙애교회, 만경교회를 1938년 4월 4일 계출하였고, 죽평교회를 1938년 7월 27일, 수서교회를 1940년 11월 10일에 계출하였다. ‘기독의교회’(基督의敎會)들도 ‘기독교회’(基督敎會)와 마찬가지로 해방직후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파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협의회 및 총회측과 교역자협의회측의 교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의회 및 총회측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교회’(Christian Churches)에 가깝고, 교역자협의회측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이다. 도쿄 요츠야선교부의 한국담당 선교사 오웬 스틸(Owen Still)은 1939년과 1940년에 각각 두 차례씩 한국의 기독교회(基督敎會)들을 순찰하였는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한국인들의 열정은 매력적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찬양한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그들은 선포된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둘째, 한국인들의 친절함과 환대가 아름답다. 이보다 친절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손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무엇도 그들의 훌륭한 우정의 열정을 식힐 수 없다. 셋째, 한국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인상적이다. 한국에는 모더니스트가 거의 없다. 장로교 교인들은 그곳에서 많은 선한 일을 해왔으며 사람들에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한국인에게 보여주면 모든 논쟁은 끝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희생정신은 고양되고 있다. 어디를 가든, 돈을 요구할까봐 걱정을 한가득 안고 한국에 왔지만, 월급을 올려 달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올해 한국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쌀은 평소 공급량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이다. 배고픈 아이들이 볼을 꼬집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 용감하게 전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의 복음주의 정신은 고무적이다. 그들은 열렬히 복음을 전한다. 그들이 외곽 지역에 개척만 하면, 외곽 지역들은 곧바로 교회들이 된다. 어떤 집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바라봤다. 그는 교회에 가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집의 칸막이를 제거하고 집회소로 개방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들일 뿐’(Christians only)의 교회가 서게 되었다. 한국인 형제자매들한테서 열정적이고, 친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희생적으로 바치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배우자(Tokyo Christian, Jan.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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