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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방문기-김영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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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댓글 1 조회 8,613 2002.10.0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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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여행-김영수목사

7월29일(월)

설레이는 날은 밝았다 새벽에 집사람과 작고 진지하게 조용히 중국선교를 맡기며
기도한다. 정성스런 조찬과 한나와 안나와의 기도 그리고 집사람이 가방을
들어주어 큰길 택시를 타고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한다.
공항까지 안내해줄 첫번째 일행은 권ㅇㅇ전도사님(평화교회)의 승합차에 몸을
싣고 주님 감사합니다. 기도하며 출발한다.
두번째 일행은 김ㅇ호목사님과 유ㅇㅇ,유ㅇㅇ전도사님들 마지막 순번인
허ㅇㅇ전도사님을 만나 우리는 북대전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유전도사님의 준비하여오신 김밥과 계란을 먹으며 운전해 주시는 반석교회
집사님의 차분하고 안전운행으로 예정시간보다 30분 전인 10시에 도착하여 하나
하나 해야할 일을 진행한다.

작고 아담한 비행기에 앉았다. 주여 도우소서 기체는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더니 잠시후 광음을 내고 이륙하여 멀어져가는 세상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 가는 것 같구나 조금씩 선회하여 구름을 뚫고 하늘을 향해 오른다.
솜털위를 날은 다 할까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구나 하얀 백설위에 끊임없는 백설들
저 밑에 뛰어내려 걷고 싶고 먹고 싶고, 둥글고 싶구나 많은 구름사이로
평야같은곳 때론 협곡같은곳 어느곳은 몇층의 구름층이 있고, 구름산,
구름나무---무수한 상상과 모양이 보인다. 등등 헤아릴 수없고 눈이 부신다.
그런데 언듯 적막해 보였다, 지저귀는 새도 푸풋한 산도, 나무도 졸졸 흐르는
시내도 더더욱 사람의 모습도 없구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마냥 구름위를 떠다니다가 그만 다왔다고 친절하게
한국말로 방송해 준다. 밑을 보니 지붕은 붉은색, 벽은 흰색의 건물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서있고 푸른 밭은 제식훈련을 하는 군인들처럼 질서 정연하다고 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질서정연하게 펼쳐져있는 저 많은 넓은 들판 도대체 무엇일까 옥수수가 많다는데
그리고 식용 차 종류가 많다던데 갖가지 상상하며 이땅을 배우게 하소서 한다
공항이나 시내나 매일반이지만 우리나라의 60-70년대을 상상하며 보는 듯했다.
신호도 중앙선도 넘나들고 빵빵거리면 최고고, 낡은 택시, 작은 체구의 차들과
택시, 자전거, 리어커에 자전거(발)로 운전하는 택시, 오토바이로 운전하는 택시,
등등 가격차이가 있었다.
장춘이 첫번째 경유지인데 갑자기 비가내린다. 이곳에서는 약 6시간 정도를
기다렸다가 ㅇㅇ로 가야한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말 하는 여직원이 오더니만
우리를 자세하게 안내한다. 그래서 부랴 부랴 다시 수속을 밟고 3:30 비행기가
있다고 이것 저것을 도와준다 참으로 이상하다고 작은 선물을 건너는데 김상호
목사님의 사랑받고 있는 분들의 연결로 계속 도와주었단다.

그 고마움을 인사로 대신하고 국내선을 타고 ㅇㅇ에 내린다.
젊은 청년(27세), 믿음의 어머니, 김ㅇㅇ목사님 몇분이 마중나왔다.
김ㅇㅇ목사님의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후 특수학교 버스로 학교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었다.
첫마디에 많이 초청하여 많이 오실줄 알았는데 하시며 아쉬워 하셨다.
김ㅇㅇ목사님은 10년을 내다보고 서서히 하는데 김ㅇ호 목사님은 단기로 왔다가
위험을 무릎쓰고 강건너형제들을 만나고 지원과 선교, 교육, 위로를 아끼지 않는
단다. 지금도 공안에게 매우 위험하게 노출되고 있다고 경고했으며 그 청년은
죽음을 각오하고 지금 준비한단다.
김ㅇㅇ목사님의 준비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일행은 제일 목적지인
ㅇㅇ특수장애인학교 버스를 타고 밤에 약 3시간 긴 여행을 하여 도착해 보니
호텔시설처럼 잘해놓은 건물과 내부구조 각방에 침대는 물론 화장실까지
편의시설이 완벽했다. 또한 한성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던 김ㅇㅇ(한성신학교
이야기와 박남용목사등 선배들의 소식을 물었다) 목사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안내와 친절을 받았다. 약 3시간을 차를 타고 A현에서온 젊은 전도인(다음주
사역지의 목회자)과 김ㅇㅇ 목사님은 일정을 논의하느라 밤 가는 줄 모를때 나는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한후 하루를 조용히 돌아보며 하루의 문을 닫았다.

7월 30일(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니 김ㅇㅇ목사님은 벌써 일어나셔서 삽을 들고 화단을
정리하시고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학교 건물은 현대식으로 자 지어진
3층건물이고 앞에 운동장과 한국지도, 중국지도로 만든 꽃밭 넓은 호수와
낚시꾼들, 방송으로 무엇을 사라는 큰소리, 그리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아름다웠다.

곧 일정대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는데 중국교회의 미래와 비젼을 현지 삼자교회
P목사(기독교 연합회 회장,3000명출석)의 강의 특히 그는 장애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중국에 2,700백만 장애인이 있고 그들보다 더 약한 티벳족, 당족, 여러
부족을 도와 선교하고 있었고 중국의 신앙자유가 많지 않아 아마 소수 부족사회로
나아갈 것 같다는 비젼을 제시하고 ㅇㅇ교회(약 3,000명 출석) K장로(78세, 형은
순교, 기독교의 산 증인) 의 삼자교회 형성과정 그리고 가정교회의 어려움과
삼자교회가입문제와 중국교회의 연합문제 폭넓게 알고 있는것을 전해주엇다.-
예를 들어 전국기독교 대회는 5년마다, 현회장은 85세 여자목사님이 회장이고 총
7명의 목사님밖에 없다. 기독교는 하나로 교파가 없고, 정부의 허가없이는 세울수
없으며 18세 이하는 교회에 못 온다, 세례안줌, 설교 교육을 외국인이 할수 없다.
삼자교회 될려면 일정한 장소, 책임자, 교인 20명이상, 10리(4KM)이상 정부의
설교와 교회간섭이 있긴 하나 거의 책임자 목회자에게 맡기고 단지 보고를
가끔한다.
PP목사의 열린 예배, 김ㅇㅇ목사님의 학교소개 숙소 약28명은 충분하고 컴퓨터
33대 현재 근교에 있는 교회 관계자들과 필요한 이들에게 무료로 학습하며
영어회화반을 운영하며 장애인 축구선수를 발탁해 정부에서 거의 지원해주어
베이징에서 전국대회후 영국의 장애자 축구대회에 참석할 예정이고 학교관계로
비자와 초청이 가능하고 정식인가 받은 공식 학교이고 처음 초중고 교사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k성에서 꽤나 유명해진 학교이며 베트남에는 사모님과
더불어 고아원에 13명이 현재 고센에 있으나 실은 (김ㅇㅇ목사님께서 월남의 아이
하나를 입양하여 아들삼았음) 월남의 남자 아들입양때문에 관계되었고 정부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2003년 4월까지 건축할 예정으로 있음, 북한의 H에 염소
농장 1000마리와 6월 22일 건축 기공을 하여 현재 병원, 유치원을 짓고있다는
계획 그리고 사모님과의 사역의 진면모를 자세히 사진과 더불어 청사진을
펼쳐주셨다. 사실은 위 모든 일을 위해 한국에서 벨기에 프랑스, 중국, 미국,
영국등 각국에서 도움과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 하시다며 후원해 주는 각국의
국기를 게양해 놓았다고 하였다.

점심은 특식으로 보신탕 먹고, 여자 0전도사(한족교회)남편은 서울 돈 벌러 가고,
오빠는 조선족교회 담임목회자(약100여명 출석, 수요예배참석했음), 한족교회와
조선족교회의 조화와 문제점, 탈북자들의 보호와 80여명 한족들의 신앙지도문제,
특히 말 못할 여러 상황들을 보고하고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부탁했다.문제는 일군 양육문제 신학부재와, 자료부족, 공부많이 하면 타락한다고
공부 안시키고 돌벌으라고 함 왜 삼자교회로 등록을 안하는가 물으니 18세 이하는
교육을 못하게 하고, 설교 본문까지 종교국에 보고해야 하며 3자교회 원하지만
가입비 많고 현재 가정교회가 80-90% 된다고 말하며 심양신학교를 졸업해야
전도사지 그 외엔 전도인이고 목회자 인정 안해준다.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경비가 많이 든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 중국사역의 실제를 김ㅇㅇ목사님
강의로 하루를 공부하는 것으로 마감했다.

7월31일(수)

아침 일찍 우리는 김ㅇㅇ목사님의 배려로 26인승 학교 버스를 타고
김ㅇㅇ목사님께서 처음 중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 후원하는 교회를
방문했다. A그리스도의 교회(모ㅇㅇ 전도인 23세) 한족마을에 대지가 약120여평
교회는 10여평 젊은 전도인이 결혼도 안하고 목회를 하고 있었음(현재 어린이
4명, 어른 10명) 우리는 각각 간절히 기도후 합심기도하고 작은 헌금과 기념사진
박아(그쪽 사투리) 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가고 있었다. 경제
합작국(러시아와 중국의 무역시장)지역을 통과 시장은 3-4일에 한번씩 교류가
있다고 하였다. 가는 길목마다 한국 차며, 쌍방울, 현대 우리와 가까운 사이인듯
눈에 몇번 볼 수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약 1시간 가량 달리자 안내하시는
집사님(학교 돌보는 계장)이 우리 모두 살까기(다이어트)가 저절로 된다고
하였다. 더욱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우리 지도의 토끼모양의 맨 위 꼭대기를 향해
가고 있다. 일명 권하다리라 하는데 이곳은 중국에서 나진 선봉지역으로 무역이나
사람 왕래 통로인 긴 다리이며 북간으로 가는 곳이고 샛별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중국 군인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고(옆에 작은 중대가량의 군부대 있음)
다리를 건너는 버스, 트럭이 오고 가며 왕래하는데 나는 멀뚜감치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강만 건너면 북한이라니/ 너와나 엎드리면 코 달데구나/ 고요하게 말없이 흐르는
물결들아/ 나의 소원하는 복음의 소식을/ 마음의 소원을/ 주님의 사랑을
전해다오/ 할렐루야 예수님 믿으시오/ 큰소리쳐 보지만 대답이 없구나/ 아 다리만
건너면 북/ 중간까지는 중국 그리고 그 다음은 북한이구나/ 아무리 뇌까려 보아도
대답도 매아리 조차도 없는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쳐다보며 계속 북으로
전진하여 방천이라는 곳으로 간다. 이곳은 러시아와 북한 중국의 삼국의 경계이며
전망대이다 특히 이곳은 중국사람들이 러시아에 세를 주면서 러시아 땅을 밟고
가야 갈수있는 방천으로 약 20분을 달렸다.
이곳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해 하싼 진 개항 조선두만강료동자구역 방천에서
15km가면 일본해 중국에서 로씨아로 가거나 조선 동해안 일본 서해안,
북아메리카와 북 구라파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란다. 도문강남쪽은 조선 라진
선봉시 두만강 로동지구역이며 750호 3천명인구 철로 노동자, 가속이 살고 조선과
로씨아로 연결된 우리철도, 철교가 있었다. 라진과 남양만 통하며 기차가 하루
2번 정도 다니는데 일부 소식에 의하면 군사물품들이 북에서 러시아로 향한다고
한다. 철교는 큰 교각3개는 러시아에서 작게 5개는 북에서 만들어 두만강을
건넌단다. 그리고 김찬영 목사님께서 계시는 특수학교 건물을 지으려고 이곳에서
수십차의 모래를 가져가는데 북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4구의 시신을 발견하여 잘
뭍어 주었다한다. 아마도 북에서 넘어오다가 생명을 잃은 듯 싶어 우리는 절규와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으며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그곳에서 또한 번
넉두리를 하여 보았다.
리시아 중국, 북한 삼국이 국경지인 방천아 비수한 너와나, 산도, 물도, 나무도,
집도, 사람도, 짐승도, 들력도/ 단지 북의 산은 민둥산이구나/ 이놈아 누가 산을
타고 야밤도주 하려는 것을 막으려하느냐/ 차라리 넘어가게 내버려나 두지/
그러나 선은 있고 말이 틀리구나/ 다리만 건너면 북한과 러시야/ 가깝고도 먼
당신이라 했던가/ 굽이 굽이 흐로는 강물은 말이없건만/북에서 오는 바람은
연민의 바람이요 / 러시아에서 오는 바람은 새로운 바람이다/ 중국바람아 내말,
소망, 믿음, 사랑 전해다오/ 드넓은 러시야(평야)/ 유유히 갖혀있는 굽이 굽이
호수/ 만나고 싶고, 보고싶고, 말해보고싶다/ 그리운 동포들아/ 우리 선배들이
광활한 몽골 시베리아를 달리던 말 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하구나/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고 숙소로 와야했다. 늦으나마 우리는 가정교회 조선족 교회를 방문
예배드리고 한족 교회에 들러 여러가지 보고 듣고 나눈 뒤 숙소에 피곤한 몸을
맡겼다.

8월1일(목)

다른이의 등정기를 살펴보자
백두산에 오르려고 하는데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온천을 하고 상인들이 팔러 나온 물건들을 구경하면서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렸다. 백두산 주차장에서 16시가 지나 일행들과 함께 차를 타고 백두산
천지로 올라갔다. 고산지대의 낮은 들꽃을 바라보니 멀리서 불어오는 비바람이
차창에 부딪친다. 백두산 정상 주차장에 내리니 정상 부근에는 풀이 없는
땅이었다. 땅을 밟고 꼭대기로 올라가니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뽀얗게 산을 덮어
사막처럼 황량했다. 밑을 내려다 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가리워져 낭떨어지와 같아
내려다 보기가 무서웠다. 우산을 펴고 날리는 비바람을 막고 사진을 찍는데 하늘
북쪽에서 안개가 걷히면서 빛이 비쳐지더니 무지개가 천지와 하늘을 연결 하는
것이 아닌가! 밝은 햇빛과 함께 선녀가 왕림하는 것과 같았고 옆에 드리워진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 시켜 주는 구름다리와 같았다. 와! 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안개가 걷히면서 파랗게 백두산 천지가 드러났다. 몰려든
사람들이 천지를 보며 사진을 찍고 나도 놓칠세라 일행과 천지못으로 내려가서
사진을 찍는데 안내원이 올라오라고 한다. 일행이 모이자 나의 살던 고향,
애국가, 선구자 등 노래를 부르니 모두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몰려오는 구름떼가
천군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 같이 아름다왔다. 천지의 수면은 해발고가
2155미터나 되는 하늘의 못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천지의 남북의 길이는 4850미터,
동서의 넓이는 3350미터, 물의 평균 깊이는 204미터, 제일 깊은 곳은 373미터로
중국에서 제일 깊은 담수호이며 세계에서 5번째로 깊은 고산호수이다.

백두산의 기후는 온대대륙의 전형적인 계절풍 고산기후이며 백두산 기슭으로부터
산정에 이르는 60여 키로미터의 수평거리와 1600여 미터의 상대 높이를 가진
구간에서 판이한 5개의 기후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백두산의 날씨는 한 해동안
8급 이상의 바람이 부는 날이 무려 267일이나 된다. 이 명산의 닐씨는 금방 봄날
같이 맑다가 갑자기 흑운이 밀려오고 비가 많이 쏟아져 사위를 분간할 수 없다가
잠간 사이에 우박이 쏟아지며 써늘해져 가을 날씨를 방불케 한다. 이러한 기후,
토양 등 요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백두산은 식물 자원이 풍부한데 산삼, 불로초
등 귀중한 약용 식물이 300여종이나 되며 원시림에는 범, 곰, 사향 노루 등
50여종의 짐승과 꿩, 부엉이 등 130여종의 조류들이 살고 있다.

백두산을 향하기위해 우리는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준비하고 거의 6시간 30분
달려야 영산인 백두산에 다다른단다. 훈춘에서 연길 안도현 신합에 이른다 이곳은
특히 한국의 경상도 사람들이 집단 이주 한곳으로 민속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 들러 잠시 감개 무량한 우리이웃이요 식구인 형제를 만나는 듯 그리고
미송(여인이 서있는자세)이 군락을 이룬 지역을 통과하고 (이도 백화지) 천지를
향해 갔다.
2194m의 높이요, 깊이가 373m, 동서로 3375m, 남북이4850m, 약 9.8평방미터이고
물은 지하수와 눈, 비 로 강수량이 존속하고 봉우리가 16개 있는데 북쪽이 7개
그중 장궁봉이 최고인데 2749m, 6개는 중국 그곳에는 백운봉2691m 이곳에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가 되는 천지 과연 나는 전체의 광활하고
영롱하며 신비스러운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장백상 입구에 도달하여 잠시 건문을
마치고 차가 오르 수 있는 천지까지는 특수차만 운행하는데 그곳에서 웅성
웅성댄다 왜냐면 빗방울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맑은 모습(천지가 다 보이는)을
보기란 매우 어렵다고 오르지 말자 오르자 많은 관광객들이 옥신 각신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대전의 목회자들을 만났다. 나중에 선교사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넓은 중국에서 한국분 만날려면 장백산 밑에 있어라 한단다. 왜냐면
중국에 온 한국인은 반드시 거치는 코스란다. 그도 그럴것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민족의 정기가 이어진다는 곳을 누가 오르려 안할까? 우리는 팁까지 주면서 해발
2194m를 향해 Z자의 굽이 굽이 험한 길을 짚프차를 타고 오른다 마지막 정상까지
오르니 안개만 자욱하다.바람이 세다 못해 몸을 가눌수 없다. 실망스럽지만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가파른 민둥산을 올랐다. 드디어 이곳이 천지라니 온통
구름밖에 안 보인다. 가이드가 인도하는데로 조금 내려 천지라는 돌(기념석)로
기록한 곳으로 가본다. 왜냐면 바람불면 가장 먼저 구름이 거친단다 갑자기
천지는 봐 하는소리에 그져 심장이 멎는듯 안개가 몇 십미터 걷히고 모습을
드러내 볼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개와
바람속에 여기 저기서 주여 할렐루야 하며 나라와 민족, 교단과 목회자들위해
이제 한국변방의 선교를 위해 중국, 북한, 러시야, 소련 , 인도 까지 다시모여
합심기도와 뜨거운 눈물과 열정으로 손을 잡고 기도한다. 민족복음화와
평화통일로 다시 오를 수 있을때까지... 제주도의 한라산은 몇번 올랐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는 매우 힘든 기회를 찾아 만난다. 내려오는 길에 자세히 보니 맨 위
천지 주변은 민둥산으로 풀한포기없고, 8-9부능선에는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양귀비꽂과 잡풀이있고 흑풍구(산과 산 사이에 오묘한 계곡으로 세차게 불어 오는
바람의 길)가 있었다 조금 내려오니 6-7부 능선에는 사스레나무만 존재하고
있었다. 천지를 내려온 우리는 장백폭포로 향했다. 밑에는 온천물이 흐르는데
겨란, 옥수수를 삶어 먹을 정도로 뜨겁다, 손으로 만져보니 유황냄새와 미끈
미끈한것이 천연 온천물이다. 우리는 장뇌삼을 맛보고 건강을 위해 누구에게 줄까
계산하며 몇 뿌리 사서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쳐 골아 떨어져 밤 11경에
숙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A현에서 귀한 여선교사님이 한분 동승하였는데 용모와 체구 어디하나
한국여성인데는 찾아 볼수 없는 분이었다.
7년전 우연히 중국선교 여행중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기도로 준비하고
중국에 아는 사람하나 없이 들어와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계셨다. 장애아동, 노인들을 돌보고 있으면서 어려운 농촌의 학생,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사역을 통하여 미래의 일꾼들을 서서히 양육하고
있었다. 그 선교사님은 한국의 중국선교방향은 조선족을 통한 한족선교에 박차를
가해야 하며, 눈에 보이는 성전건축에 주력을 할것이 아니라 10년앞을 바라보고
일군을 양육하는사역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중국선교의 내실을 기하는 것이며,
조선족목회자들에게 우리의 목자장되신 예수님의 제자도를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한족선교, 소수민족선교, 나아가서는 북한선교를 감당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한국의 중국선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8월2일(금)

아침 읽찍 서둘러 침례식을 위해 출발한다
이곳 저곳 몇군데를 지나 차에 30여명이 탔다. 차는 자꾸만 깊이 깊은 골짜기를
향하여 약 2시간 깊숙히 들어갔다.
경찰들이 잘 다니지 않는 깊은 골짜기를 찿기위해 가는 도중 성도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역역하다. 깊은 산중 장소를 발견하고 계곡으로
내려가니 발이 시려웠다. 잠시 서 있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김ㅇㅇ목사님과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한분 한분 침례가 시작되었다. 온몸이 떨리는 추운 물에
성도들이 침례는 참으로 감격 그 자체였다.
나오는 중에 점심식사를 다 같이 하고 차안에는 긴장감 대신 이젠 중국어로
찬양이 이어졌다. 내가 기회를 잡았다. 특송을 하고 율동을 가르치며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그칠줄 몰랐다. 그곳에서도 나는 계속 강조를 잊지않았다. 중국
선교는 자국인이 해야하며 소망이 젊은이들에게 있다고 열띤 어조로 목청을
높이지만 저들의 진지함과 열심 적극성 내가 지금부터 30여년전에
김ㅇㅇ목사님으로 부터 침례받고 기뻐하던 생각이 아른거려 목이 매이며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밤에는 야시장에 잠간 들려보았다. 모처럼 밖에 나온듯 우리는
마냥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중국의 진 면목을 보는듯 이것 저것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8월 3일(토)

용정의 거리는 남한의 60년대 초반의 거리와 비슷했다. 이주 민족으로서 중국에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 과정은 조선의 정치적 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에 조선족이 한반도로 이주해온 역사는 1840년대로부터 시작 되었고 그 후
1860년대에 이르러 1차 교봉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소수 민족에 대한
자치주를 허용하고 있는데 연변의 자치주는 6개의 시와 2개의 현으로 되었으며
인구는 길림성의 4분의1, 213만으로 조선족이 46%, 중국인이 25%로 10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기후는 한국보다 1달 늦고 겨울은 길고 여름은 덥고 길다.

연길 안내원이 용정을 소개하기를 용정은 1914년 이 구역내에 36個所의 조선족
사립 학교가 있었는데 학생은 약 1731명 정도가 되었으며 1916년에는 55개의 학교
가운데 일본인 학교가 13個所였다. 1931년에는 조선인민학교가 150개소, 학생수는
866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족들은 자손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거의 대학에 들어 가는데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식교육
즉 한국의 문화와 역사 등으로 수업을 받고 대학은 일반 중국에서 운영하는
중국인 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조선족 안내원의 경우 거의 대학을 나왔으며
역사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용정은 항일 운동을 한 지역으로 민족 운동을 한
인사들이 많았는데 윤동주 시인, 김국진, 박기송 등 청년 문학가와 송몽규,
작곡가 윤주영 등이 배출되었으며 저명한 작가로는 강경애, 최서해 등이
겨례문화를 키우고 근대 문화를 가르치며 독립사상을 키우는 민족 문화의
발상지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곳은 민족 문화의 선구지로 3,13일 반일대시위(
일제를 반대하는 연변 지구 조선족 인민들의 대규모 반일 투쟁 ), 15만 탈취기(
일제의 투자금 15만원을 빼았은 사건 )로 항?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구자란 재목의 노래는 용정의 경치와 함께 슬픈 애환을 담고 있었다.
선구자의 원 재목은 "용정의 노래" 였는데 해방후 조두남이 개제한 것이라 한다.
조두남은 1912년생으로 21세때 찾아온 방문객 윤해영에게서 그 가사를
받았고(1933년) 가사 中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에 깊었나"는 구절구절 용정을 아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한다. 우리는
선구자에 얽힌 사연을 안내원으로부터 들으면서 일송정에 깃든 해란강을 따라
갔다.

해란강 기슭에 높은 산이 하나 있는데 이 산을 비암산이라고 불렀다. 이 비암산
부근에는 사과배 과일이 (일종의 사과와 배를 접붙여서 만들어낸 과일) 아주 맛이
있다고 한다.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비암산 10여미터 깎아 지른 벼랑 끝에
두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바위위에 뿌리를 박고 억세게 자라고 있었다. 그
소나무의 모양이 흡사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게 보여서
사람들은 일송정이라고 불렀다. 일송정이 대를 이어 오면서 조상들의 길상물로
여기게 되었고 백성들은 일송정을 사랑하게 되었다. 용정 사람들이 일송정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용주사에서 일송정을 바라보면 마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길상물로 보아온
연유이기도 했다. 용정에는 광명 중학, 은진 중학, 동흥 중학, 대성 중학 등
6개의 중학교가 있었는데 애국인사와 열성 청년들이 일송정에 모여 반일, 즉
反日노래를 부르고 반일에 대한 의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송정에 대한 인민의
찬사가 높아지자 일본인들은 비암산의 일송정을 없애라고 명령하니 일본인이
일송정을 없애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의 ! 애국 청년들이 비암산으로
달려가 일송정을 둘러싸고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화가난 일본인들이 일송정을
사격 연습으로 매일 총포를 쏘아 댔지만 우박처럼 퍼붓는 탄알은 일송정을 피해
산너머에 가 떨어지지 않으면 비암산의 절벽에 떨어져 일송정은 눈보라 속에서도
더욱 푸르러 싱싱하게 자랐다. 이에 분노한 일본인이 일송정 줄기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후추쇠를 밀어 넣고는 대 못을 박아 흔적을 없애니 1938년에
이르러서는 말라 죽게 되었다. 1990년 용정시 인민 정부와 각계 인사들이 이곳을
보조하고 후배들에게 향토 애교향을 하기 위해 일송정자를 새로 수건하고 그 옆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고 "일송정"이란 기념비를 세워 후대에 일송정에 대?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고 한다. 아픈 사연의 일송정 이야기를 뒤로 하고 보아산을 거쳐(
연길시와 용정시의 분기점 ) 해란강을 따라 동방 곰락원을 갔다. 여기는 580여
마리의 반달곰이 있는데 반달곰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웅담을 2년간 체취하여
약재로 이용하는데 번식을 위주로 사육하고 있었다. 웅담은 간, 눈, 급성 간유에
좋은데 동물관리는 중국인을 초빙하여 사육을 하고 있으며 관리 체재는!
國營이다. 곰락원을 관람하고 윤동길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을 방문 했다.

대성중학은 1921년 10월 8일 창립 되었다. 민족주의자 강 훈이 학교 운영사 겸
교주로 되어 매달 초하루날 아침마다 "존공 의식"을 거행하고 "공자제"를 지내고
있다. 반일 투쟁과 민족 독?운동에서 앞장선 학교로 용정에서 첫 당지도부가
건립된 학교이며 1934년 3월 일제는 강박적으로 대성, 동흥 학원을 합병하여
"인성 중학교"라 하였다. 이 대성 중학교 內에 윤동주 시비가 있었다.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 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으며 용정
은진 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 중학으로 전학하여 1년을 보냈다.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을 보낸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경도 동지 사대학부에서 진리를
닦다가 1945년 2월 16일에 29세에 운명했다. 평소 신시를 즐겼고 작품이 많아
그의 필명을 동주라 했다. 저항 시인이라 불리우는 윤동주는 외숙부 김약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김약연은 1900년대에 명동 학교를 세우고 많은 애국 지사를
길러낸 선각자로 윤동주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윤동주는 용정 북부 감리
교회의 여름철 아동 성? ?학교에서 교포를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는 법과
애국가를 가르쳐주고 기미 독립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사건 등 민족 운동을 예를
들어 조국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였다. 1943년 7월 14일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
되어 1944년 3월 31일 경도 지방 재판소의 재판 결과 독립 운동의 죄목으로 각각
구형 3년과 징역 2년의 언도를 받고 복강 형무소에서 투옥 되어 징역살이 하던 中
일제의 인체 실험을 당하여1945년 2월 16일 운명하였다.

윤동주는 29세의 짧은 나이에 110여수의 시를 남겼는데 숭고한 민족적 저항
시인으로써 자유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중국땅에서 조선족 민족의 지주가
되었다. 이 대성학원에는 이 학교를 졸업한 민족 운동가나 교육자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고 이들을 안내하는 조선족의 말투가 북한 여성과 닮아 억양이
세고 눈빛이 매서웠다. 조선족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이곳 용정의 조선족은
부지런하고 또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데 여러개의 대학, 즉 기술 학원, 전문
학원들이 많았으나 이것을 통합하여 학생을 수용하니 연변 대학은 5개 대학을
통합하여 학생들을 수용하여 중국에서 대학 인구가 전국 대학 인구의 3배로
늘어났고 맥주 소비량이 전국 1위로 높은 교육 수준과 문화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대성학원에서는 삼베, 옥, 책, 서예용품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재단의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관광객들에게 기부금을 받고 있었다.



김ㅇㅇ목사님은 마지막을 다시한번 민족의 혈이 서려있는 곳을 방문하라고
권면하셨다. 용정이라는 곳인데 연길에서 그곳으로 가는 중 중국에만 있는 사과배
과일밭이 고속도로를 따라 20분 달렸을까 상당히 많은 과일밭이 있었다.
용정 이곳은 일본군의 치열한 핍박과 압박으로 전장의 소리 말밥굽소리,
고함소리, 죽창으로 으악 외마디의 비명으로 목숨이 떨어지는 아비귀환의
현장이었다. 그때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선배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사실 이곳은 3가구 이 있었단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북쪽에서
이곳으로 1865년 이주하여 집을 지으며, 농사를 짓고 1870년대에 정착하여 산것이
시발점이 되었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가꾸는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개척정신이 이곳에있는 많은 역사와 피가 뭍어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선구자
이는 본래 용정의 노래였다. 조두남곡 윤해영시 였던 선구자의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역사의 현장 일송정이 서있는 정상에 오르니 70여리에 걸쳐 펼쳐있는
광활한 논,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 그곳을 쳐다보며 선배들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고 가슴을 주었던 곳이다.
소나무와 도토리 들꽃 중국에서 특이하게 볼수 있는 묘소(중국은 모두 화장)를
보니 과연 한국의 얼이, 피가, 정신이, 문화가 숨쉬는 곳처럼 느켜진다.
일송정이 있는 이곳은 사실 한국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우뚝 서있었단다.
일본인들이 관에서 나와 이 소나무를 죽이려고 별의 별 공작을 했지만 하지
못하고 끝내는 강제로 태워 1938년 소나무가 없어지고 1991년도 임재천 총재와
이승래사장의 도움으로 8각정을 지은것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못내 아쉬웠던지
지금은 10여년 된 소나무 한구루를 다시 심어놓아 잘 자라고 있었다. 너도 그
과거는 모르겟지 보지도 체험하지도 고통도 없었겠지 그러나 이곳에 오는 이마다
한숨을 지고 그 옛 선배들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고만 있는 너 이재 역사의
증인이 되어 우뚝 서거라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기개를 높일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용정 우물과 선배들의 독립사상과 불굴의 의지를 태웠고 믿음의
산실이었던 용정 기독교 설결교 예배당 지금은 관광지와 문화재로
보존되고있었다. 그리고 현 교회는 조금 앞으로 나가 현대식 건물로 큼지막하게
지어져있다. 그리고 대성학교 의 역사적인 박물관이 된 그 지역의 독립사상과
혈투를 버리고 인제들을 돌아보았다는 전 중학교들 명신여자중학교, 동흥중,
광명중, 대성중, 광명 여자중 여러 학교의 발전사화를! 설명들으며 우리는
윤동주의 시문앞에 사진만 박을뿐 더이상 말도 행동도 할수없었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김ㅇㅇ목사님의 배려로 장애자의 가정(아버지, 어버니,
아들모두 장애자)을 방문하였는데 새 집을 지어주어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늦게 도착하여 우리는 김ㅇㅇ목사님의 숙소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김ㅇ호목사님은 급했다. 이곳에 온 사명이 기다리고 있으니 저녁이지만 007
작전이 시작되고 북녁형제의 집으로 몰래향한다. 차도 집 멀찌감치 내려 이리
저리 골목으로 가더니 아지트에 다다른다. 3가정을 돌보고 있는데 서로 집을
모르고 오직 그 어머니만 안다. 참으로 핸섬하고 건강하며 명철하게 생긴 청년,
그리고 어머니는 세 아들을 데리고 믿음을 지키며 매우 단조로운 생활을 할수
밖에 없는 현실, 4살 먹은 아들과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아줌마, 그리고
목말라하는 말씀과 우리의 간절한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이 역역했다. 11시까지
계속되는 교제와 학습 아쉬운 인사를 하고 김ㅇ호 목사님께서 대전 교도소에서
5년 여동안 돌보았던 중국 현지인(조선족)의 집에 도착 여장을 풀고 새벽3시까지
이런 저런 대화를 멈출줄 몰랐다. 특히 북의 친척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쪽편지를
내 보이며 3번이나 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양식을 나른 이야기 처참한 이야기,
증거로 나는 편지 두장을 선물로 받고왔다.

8월4일(주일)

ㅇㅇ삼자교회(3,000명교인이 출석)2부예배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김ㅇㅇ목사님의
여권과 미화 그리고 증명서류들을 잃었다. 이리 저리 연락하고 방송국에도
부탁하고 그러나 예배시간인지라 예배를 드리자하고 기도하였는데 광고시간에
주운사람이 있다고 강대상에서 광고했다. 고마운 분들 알고보니 K농군학교
관계자들이 중국의 땅 기증과 건물, 운영문제로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그들도
예배드리러 왔다가 서류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만남속에서도 많은 선교의 정보들을 나눌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

오후에는 ㅇㅇ교회내의 장애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김ㅇ호 목사님의 설교와
허ㅇ옥전도사님의 몸찬양, 특송, 그리고 김영수 목사의 축도로 공식적인 예배를
80여명과 더불어 드렸다.

첫번째 사역지인 A현에 도착하여 우리는 본격적으로 사역을 진행하였다. 여러곳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6명이지만 3조로 나누어 약 1시간 가량 택시를 타고 저녁
예배를 드리고 그곳 형제 자매들과 믿음의 교제, 살아온 이야기, 한국의 이야기,
자녀가 한국으로 시집가서 방문한 이야기, 한국에서 3년동안 계속 돈을 벌어
이곳으로 보내는 이야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8월5일-6일(월,화)

목회자반과 평신도반, 몸찬양 율동반을 나누어 각각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9시-12시 1강, 점심먹고 1-5시 2강 7-9시 3강 2일 동안 온전히 우리의 가진
은사들을 나누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현지인을 교육하는 것은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이상한
사상을 넣어 주기때문이란다. 그리고 18세 이하는 현지인들도 종교 교육을 할 수
없도록 했단다. 중국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있는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중 목회자의 수급문제이다 광활한 대국에
조선족목사가 열손가락안의 숫자고 심양에 있는 신학교만 졸업해야 목사안수가
가능하며 입학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니 전도사님도 거의 없고 그중 교회에 신실한 분을 선택하여 설교하다보니
자연 그가 목회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전도인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신학교 다닌다든가 졸업한분들이 현지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열심히 목회하는 전도인들을 무시하고 나중에는 밀려나가야 하는
갈등속에 있으므로 한국의 신학교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고 졸업장이라도 받기를
원했다. 고로 그들은 한국에서 온 분들로 하여금 말씀과 신학을 조금이라도
나누길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몰래 아지트를 만들어 놓은 선교사님과 현지
전도인들 우리 60-70년대 교회 교육과 부흥회가 그랬듯이 사방에서 모이며,
그들의 열정과 마음은 젊은이들을 능가했다. 한국의 많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현지를 보고 안타까워 교회는 크게 잘 세웠는데 성도가 없고 전도인이
관리 능력이 없고 생할이 어렵다보니 선교사님과 한국의 교회만 바라보고 있었다.

A현의 한교회는 한국의 어느 권사님이 70세기념으로 하나님께 새성전을
봉헌하겠다고 3,000만원을 헌금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셔서 성전건축을 할수있는
기회를 맞아 기쁨으로 교회설계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교회는 담임전도원이
하나님앞에 성전건축을 위해 40일을 금식기도를 하며 성도들에게 헌신을 강조해서
성전터를 비롯한 기초공사는 교회자체의 재정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다.재직들은 열심히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하는 말씀의 사모함이 있었다.
마침 한국에 유학 보낸 가족과 젊은 청년들을 만나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장래의 중국은 너희들 손안에 있다고 강조하며 인터넷을 통하여 교제하자고
약속했다. 그곳에서도 인터넷으로 멜을 확인했으며 우리 교회 홈 그리고 총회
홈도 구경시켜주었다.

A현에서의 2일간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두번째 사역지인 H현으로 향하였다.
기차가 비둘기호보다는 조금 빠른 기차로 9시간을 가야한단다. 우리는 죽었다
생각하고 차에 올랐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침대칸은 다 차고 우리는 일반석에서
10원(1500원)씩을 더내고 문화공간을 이용했다. 난 궁금하여 여기 저기 사람에게
물어보다가 조선족을 만났는데 17세때 한국의 무역선을 타고 고생한 이야기, 현재
한국형님삼은 사장님들과의 교제 이야기, 맛있는것(닭 날개로 훈재한것,
개구리튀겨서 양념한것, 오이 )을 먹으면서 5시간을 보내고 이곳 저곳을 보고싶은
호기심이 발동 하여 돌아보니 윗옷을 벗고 다니는사람, 의자밑에 잠을 청한사람,
좁은 의자에 등을 대고 다리는 창에대고자는 사람... 나도 조금 긴 의자에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잠을 청할수 밖에 없었다. 새벽 3시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택시를
1시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늘어지게 한숨을 청했다.

8월7일-8일(수,목)

H현의 두 교회에서의 사역을 위해 우리는 다시 두조를 편성하여 조선족들에게
우리들의 가진 은사들을 하나라도 더 나누기위해 강행군 하였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후원하여 운영하는 양로원이 세워져 있었으며 노인들이 그집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우리 한국의 성도들의 헌신이 있음을 보았다. 또한 조선족교회에서 폐교를
활용하여 소외된 빈곤층의 환자들을 위하여 중의원(한방의원)을 하려고 준비중에
있었다. 재정이 전혀 없는 가운데 그들은 최선을 다하며 복음을 증거하기위해,
이웃의 친구가 되기위해 자신들을 드리는 모습속에서 조선족선교의 소망을
본다.그곳에는 병원에서 내놓은 암환자가 있었는데 간절한 요청으로 기도하고
학습에 참석하는등 귀한 역사가 일어났다.

공안에 신고하기위해 3명의 여권을 가지고 갔는데 왜 6명의 단체인데 3 뿐이냐
하는 추궁과 이것 저것 트집을 잡아 모면하는데 매우 혼나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그래도 무사히 해결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8월 8일 모든 일을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며 아직도 남아 있는 물품들을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현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방을 정리했다.

새벽 3시 다시 기상하여 우리는 택시2대에 나누어 타고 공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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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백성
나 훈춘에 사는 사람인데요.
훈춘에 왔다 가신 것 같으데 사실과 다른 것 많네요